웬델 베리Wendell Berry는 미국의 시인이자 농부이며, 문명비평가입니다. 다음의 글은 1977년에 출간된 그의 책 『The Unsettling of America: Culture and Agriculture』의 한 장章으로 미국 주립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유지 교부 대학의 설립 과정과 그를 뒷받침하는 법령에 관한 내용입니다. 역자인 이승렬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는 "실용 교육을 강조하는 현재의 대학 교육 분위기 속에서 의미있게 읽어볼 만한 글"이라고 전합니다. (편집자 주)
제퍼슨, 모릴, 귀족
“곡물의 품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부와 농장 노동자에게 직접 물어도 보고, 무엇보다도 관심을 갖고 농토를 실제로 다뤄보려면 연구자는 들판과 목장에 나가 있어야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새 교리에 따르면 문을 걸어 잠금 채 서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 알버트 하워트 경, 『토양과 건강Soil and Health』중에서
“…그가 받은 교육은 이상한 힘을 갖고 있어 직접 본 것보다 읽고 쓴 것들을 더 진짜처럼 보게 만들었다. 농부들에 대한 통계가 진짜고 도랑 공사를 하는 인부, 쟁기질하는 사람, 농부의 아들은 허상이 되어버렸다. 그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글을 쓸 때 그는 ‘남자’나 ‘여자’ 같은 구체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굉장히 꺼리게 되었다. 대신에 그는 ‘직업군,’ ‘요소,’ ‘계급,’ ‘인구’에 대해 언급하길 좋아했다. 어떤 신비주의자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하며 실재한다는 것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 C. S. 루이스, 『저 두려운 힘이여That Hideous Strength』중에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신념
제퍼슨은 농업, 교육, 그리고 민주적 자유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평생을 걸고 지켜온 필생의 신념에 대해 생을 마감하기 2주 전에 쓴 생애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간 대중은 신의 은총을 받아 합법적으로 말에 올라탈 수 있도록 등에 안장을 지고, 승마화를 신은 채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자유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권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류가 획득하여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특권이겠지만, 그 또한 애써 노력하여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제퍼슨의 생각으로는, 인류가 자유를 지켜내려면 생활이 안정되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며, 덕성을 지녀야 한다. 이런 자질들은 농민들에게서 가장 잘 발견되는 것으로 토머스 제퍼슨은 믿었다. 이런 그의 믿음은 ─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기도 하지만 — 국내외에서 쌓은 광범위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 가장 가치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장 활기차며, 가장 독립적이고, 자기 나라와 가장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나라의 자유와 이해관계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여기서 유대란 단순히 경제와 재산상의 유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정서적이고 실제적인 유대관계를 이르는 것으로서 그것은 일정한 장소에서 더불어 일하며, 지식을 쌓고, 기억을 나누며 협동하는 공동체에 몰입함으로써 생기는 유대를 의미한다.
제퍼슨의 다음 글은 농민에 대한 그의 생각과 대조를 이룬다. “기술자 계급은 악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며 나라의 자유를 파괴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기술자”라는 말은 제조업자들을 의미했다. 제퍼슨은 ‘경영’과 ‘노동’ 사이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 바로 앞에 인용한 기술자 계급에 관한 언급에 이어 어떤 설명도 뒤따르지는 않았지만 그에 앞서 농민을 언급한 인용문과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제퍼슨은 제조업자들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미 추상화되고 있었고 사리사욕이라는 동기에 지배되어 자신들을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존재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시민에게 필요한 힘과 덕성을 키우기 위해서 공공 교육이 분명히 필요했으며 제퍼슨은 그 필요성에 대해서 유념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최고의 교육이 최고의 인재들에게, 그리고 모든 시민들에게 시행되는 걸 몹시 보고 싶다. 그 교육을 통해서 모든 이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읽어내고 이해할 수 있고 자신들이 맡은 영역에서 올바로 일을 수행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시민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감독하는 것 빼고는 세상일을 올바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당시 농업과 농촌 사회의 쇠락에 대해 제퍼슨이 염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모든 진술들을 읽어봐야 한다. “재앙 수준으로 화폐가치의 부침이 계속되는 가운데 제조업 부양을 위한 세금의 압박 속에 흉작에도 불구하고 곡물가는 떨어졌으며, 농업 관련 사업은 전반적으로 쇠락을 면치 못했다. 이런 상황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자 농업은 절망적인 상태로 내몰리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사람들은 조금씩 동부지역을 빠져나와 서부로 몰려들게 되었다…”
저스틴 모릴Justin Morrill과 국유지 교부 대학설치 법안
제퍼슨이 죽은 지 36년째 되는 날에서 이틀이 부족한 1862년 7월 2일, 첫 번째 국유지 교부 대학설치 법안이 제정되었다. 이것이 바로 “각 주에서 상하원 1 명당 3만 에이커의 국유지를 교부…”하도록 하였던 모릴 법안이었다. 교부된 토지 판매 대금에서 나오는 이자로 각 주에서 기금을 마련하여 “적어도 한 개 대학의 기본 유지 관리비용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모릴 법안에 따르면, 대학설치의 주목적은…농업과 기술 관련 분야를 가르쳐서 산업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바와 직업 생활에서 교양 교육과 실용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다.”
1887년 통과된 해치 법안에 의거해 설립된 국가농업연구소의 주목적은 “고용증진과 국가번영과 안보에 필수불가결한 건전하고 번성하는 농업과 농촌생활”을 장려하는 것이다. “학술 연구에서 농업에도 산업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해줘서, 경제의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농업에도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여 양자 사이에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본 법안의 취지”라고 그 법안은 기술하고 있다. (강조는 필자의 것으로서 농업과 산업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농기업의 창설과 유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또 그런 기여를 할 연구, 조사, 실험을…수행하는 것이…국립농업연구소의 목적이자 임무가 될 것이다… 아울러 그런 연구와 조사의 목적은 농촌 가정과 농촌 생활을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1914년, 스미스-레버법에 따라 “농업과 가정경제 관련 주제들에 대한 유용하고 실용적인 정보들을 보급하고 그런 정보들의 실생활 활용을 권장할 목적”으로 각 대학은 지역협력 교육사업을 시행하였다.
해치법과 스미스-레버법은 모두 국유지 교부 대학 부지를 마련할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런 법안들은 버몬트 주의 하원의원(훗날, 상원의원)의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법안들이었다. 이 법안들에 사용된 언어의 역사적 타당성과 목표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1874년 작성된 게 분명한” 회고록에서 모릴의 의도를 밝힌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모릴은 토양 열화劣化와 농업 인구의 이향離鄕으로 인해 농업이 난맥상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유지의 불하 가격은 싸고 토지 구입과 양도는 용이해서 정착해 잠시 머물다 금방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도록 부추기다 보니 농지를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노천탄광으로 토지를 사용하여 토지를 황폐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앞서 이주자들이 정착했던 정착지의 토지는 빠른 속도로 황폐해져서 농민들로 하여금 좀 더 철저한 과학적 농업 지식을 갖추고 과학적 농업에 매진하도록 고등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는 토지의 열화 현상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퍼슨과 달리 모릴은 ‘기술자 계급’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 개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거친 손을 지닌 대장장이로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박탈감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산업노동자 계급이 더 유능해지도록 실시되는 교육 지원 정책에서 기계공들을 등한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릴은 “교육 독점”으로 보였던 현상을 타파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기존 대학 기관과 교육공급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른바 전문직에 종사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에 대한 교육만 계획하기 때문에 농민, 기계공, 그리고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독학이나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어떤 형태의 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적이든 공적이든 더 주목받는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한된 숫자의 인문교양 대학의 졸업생에게 한정되는 결과를 낳았다.”1)
국유지 교부 대학들
국유지 교부 대학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퍼슨과 모릴의 생각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민주시민 자질은 교육에 달려있다는 제퍼슨의 복합적인 사유가 모릴에게는 분명히 없다는 점이다. 제퍼슨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라는 관점에서 교육 이념과 목표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역에 토대를 둔 교육체제를 구상했는데, 거기엔 이중적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의 교육목표는 보통사람들이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비판의식을 키우는 것이면서, 동시에 “의무를 다하고 신뢰를 주는”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덕성과 재능’에 입각한 ‘자연스런 귀족정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주를 위해 마련했던 교육계획에는 어떤 형태의 전문화된 직업 훈련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제퍼슨은 분명히 지역공동체가 시민과 지도자의 덕목으로 안정되고 보존된다면 ‘실용기술들은’ 현지의 선례를 익히고 읽기와 같은 기초적인 공부를 하면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모릴은 교육을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봤다. 그는 교육의 기본 목표는 농부와 기술자들의 일을 개선시켜서 이들이 ‘유용함’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전문가 계급의 교육 독점을 깨고자 하는 모릴의 소망은 단지 제한된 의미에서만 제퍼슨의 이념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모릴은 노동자의 아이들도 전문가 계급에 들어가게 되기를 소망했다. 그는 교육 수준의 차이를 구분하기는 했지만 제퍼슨처럼 “재능의 정도”를 기준으로 차이를 두지는 않았다.
다시 모릴과 제퍼슨의 차이를 말하자면, 제퍼슨은 농부를 “가장 가치 있는 시민”으로 여겼던 반면에 모릴은 전문직을 “더 주목받는 자리”라고 봤다. 여기서 우리는 모릴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유용함을 발휘시키”고자 하는 모릴의 소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교육은 노동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 노동자들을 “더 주목받는 자리”로 신분상승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 둘 중의 어떤 점에서 노동자들의 유용성을 증진시켜준단 말인가?
이런 차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유지 교부 대학 법안에 이르기까지 농업과 관련하여 제퍼슨과 모릴은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교육을 통해 농업 인구와 농촌 공동체의 안정을 도모하고 땅과 농민의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영구히” 농업을 가능하게 하려 했다.
이런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땅과 농민을 파괴하는 ‘반反 영속적인’ 농업을 장려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교육 목표가 공적인 책임감 또는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제퍼슨의 교육이념으로부터 모릴의 공리주의로 하향조정된 것에 기인한다. 두 사람의 목표 상의 차이가 공적인 가치의 변화를 나타낸다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사실상, “산업 계급”과 다른 계급들에 대한 “교양 교육과 실용 교육(의 병행)을 장려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 바가 거의 없고” 오히려 그런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의 역사를 보면 이런 교육목표가 위축되어 가는 역사였다. 광범위한 ‘교양’ 교육에서 생계를 벌기 위한 ‘실용’ 교육으로, 거기서 다시 여러 가지 ‘인증’을 획득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교육 목표가 위축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교양 및 실용’에서 ‘실용’으로, 다시 ‘실용’을 ‘전문화 교육’으로 대체해왔다. 이 대학들의 목적 기준은 유용함에서 입신 제일주의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교수진의 수준의 하향화가 원인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교수진 기준의 퇴행에 동반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분과학문의 교수들은 ‘전문직 기준’의 지지자들이었다가 결국 권력, 돈, 위신을 추구하는 입신 제일주의의 지지자들이 되어버렸다.
국유지 교부 대학 법안이 지역의 필요와 문제에 대응하는 지역대학 체제를 요구한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대학 체제는 공항이나 모텔들처럼 점점 더 서로 닮아가고 있으며 경력지향적인 교수진은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지역 문제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면서 대학들은 점차 획일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늘날 교수를 움직이는 힘은 경력이다. 교수들은 경력지향이 지상목표인 닫힌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교수들에게 자신이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는 관심사항이 되지 못한다. 경력이라는 것은 이동의 수단이지 거주의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경력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보다는 어디를 향하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경력제일주의 교수는 당연히 전문 지식 추구를 제일로 삼는 교수다. 이렇게 전문가 주의를 추구하는 교수는 자신의 대학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기 때문에 그의 비판적 지성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대학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의 언어는 명쾌하지 못하다. 이런 식으로 그는 생기 없는 절름발이 지성으로 학교 일에 ‘복무’한다. ‘현실론을 앞세워’ 불필요한 절차와 과도한 관료적 행정 체제의 의미 없는 요구사항들을 묵묵히 따를 뿐이다. 관료체제의 교육 목적은 곧 대학의 교육 목적이고, 그 목적은 월급봉투 위에 적혀 있다.
교수가 대학이라는 제도에 의존하듯이 교수는 또한 학생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생계를 벌기 위해 그는 가르쳐야 한다. 가르치기 위해 그에게는 학생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교수에게 교육은 상품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을 매력적으로 포장하고, 수행과제와 숙제는 줄이고, 학점은 후하게 주며, 기준을 낮추고, 비용을 들여 수업 “홍보”를 펼친다.
이기심, 나태, 신념 부족으로 교육이 무엇이며 무엇이야 하는가에 대해 총제척 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며 탁월함의 기준이 적당한 차등평가제에 의해 대체되고 있지만, 국유지 교부 대학들의 설립 목적인 지역 문제 해결을 외면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지역의 문제들을 제도화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들 대학은 지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지역 공동체들을 파괴하는 유동성, 경력제일주의, 도덕적 혼란을 필요로 하고 부추기기까지 하게 된다. “학식 있는 자”들의 지적 재고는 무지로 가득 차 있게 된다.
농과대학은 기후, 토양, 작물 종류 같은 지역적 현안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예컨대 문리과대학보다는 농과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농과대학도 다른 단과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설립의도였던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보다는 대학 내에서의 위치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학계에 있는 농업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과업의 실제적 효용성보다는 실험실 작업을 통해서 연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들은 지역적으로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보다는 직업적으로 얼마나 평판을 얻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들의 연구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결과에 대해서는 사실상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불가피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농업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연구 결과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무신경과 가치와 관련된 모든 쟁점에 대한 무관심보다 현대 농업 연구의 특징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은 없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객관성”이라고 하는 학문적 이념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삐 풀린 기술진보와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이상한 교리 때문이기도 하다. “객관성”은 단지 도덕적 비겁성을 감추는 학계의 제복 같은 것이 되었다. “객관적”인 사람은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기술결정론이라고 하는 “현실주의”적 대세를 따르면, 당혹스런 도덕적, 지적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 탁월하고 바람직한 것인지를 규정해야 될 필요로부터도 벗어나 있게 된다. 교육은 학생들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진리에 대한 관심을 접어둔다. 교육적 기준이 “변화하는 세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여기서 변화는 물론 정부-군사-대학-산업적 복합체에 의해 결정되는 방향으로의 변화다─, 우리는 사실상 어떤 식으로 어떤 것을 가르쳐도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학을 기업체로 운영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좀 복잡하긴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은 4년간의 의식을 거쳐서 학위를 팔고 그 대가로 교수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대학이라는 기업체의 목적이다)
‘농기업’ 대학들과 농민의 이향離鄕
국유지 교부 대학은 학술 연구에서 농업도 산업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의무를 완수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대학이 농업과 산업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농업과 산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는 ‘농기업’이라는 용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농기업’이라는 용어는 기능이나 이해관계라는 면에서 어떤 실제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산업적 이해관계에 농업적 이해관계를 복속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이렇게 농업과 산업이 혼동되면서 국유지 교부 대학 법안의 원래 취지는 완전히 왜곡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실증 사례를 농기업 책임 프로젝트2)팀 산하의 특별전문위원회가 설득력있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아래 인용문에서 짐 하이타워와 수잔 드마르코는 특별위원회의 주요 주장을 이렇게 밝힌다.
“이런 연구로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구며 누가 피해를 입게 될 것인가?
“주요 수혜자는 대농들, 농기계와 화학비료와 농약 제조회사와 가공업자들이다. 존 디어,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매시 퍼거슨, 앨리스 찰머, J.I. 케이스 같은 기계 회사는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국유지 교부 대학들에서 공동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은 돈과 자기 회사의 연구요원들을 투입하여 국유지 교부 대학의 연구진들의 기계 개발을 돕는다. 그 대가로, 이 회사들은 첨단기술을 제품에 장착할 수 있다. 회사가 실제로 제조권에 대한 독점 라이센스를 받기도 하고 세금이 투입된 연구 성과물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기계화가 농기업에 혜택이었다면, 수백만의 미국 농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첫 번째 희생자였다. 1950년 농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430만 명이었다. 20년 후 그 숫자는 350만명으로 줄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기계화 연구로 잃어버린 일자리에 대해 보상받지 못했다. 그런 연구를 구상할 때 이들의 의견을 청취한 적도 없었다. 농장 노동자들의 실제 필요는 연구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어떤 재교육도, 실업에 대한 보상도, 국유지 교부 대학이 수행한 연구 결과 발생한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돕기 위한 연구도 없었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대부분의 독립적인 가족농들을 무시했다. 이 대학들이 수행하는 기계화 연구는 87~90%의 미국 농민들에게 적절치 않거나 단지 부차적으로만 적용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기계화 작업에 투입되는 공적 보조금은 가족농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납세자들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을 통해서 기업의 효율성과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기술 자원을 기업가들에게 지원해준 셈이다. 이런 식으로 기업가들에게 지원된 기술은 그들의 사업 규모에 딱 맞는 맞춤형 기술이다. 독립적인 가족농은 끝없이 진행되는 기술진보의 흐름을 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탕진하도록 방치되어 있다.”
특별전문위원회는 학계의 정부보조금 지원사업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농과대학, 실습용 농장, 지역협력 사업 등을 통해 제공된 부적절하고 부실한 연구와 교육의 문제점들이 지적됐다. “일자리가 있는 주부들은 전업주부들보다 가사일을 돌볼 시간이 적다”는 대단한 사실을 발견한 코넬 대학 연구로부터 사람들은 무슨 “도움을 받기”를 기대할 것인가?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켄터키 주 루이스빌의 지역지, 〈루이스빌 쿠리에 저널〉의 한 기사는 “20살 된 여급사가 최근의 한 대학 수업에 참가해 ‘훌륭한 식탁 차림법’을 배웠다고 보도했다.
“그 여급사는 ‘접시에 담는 내용물을 줄이면’ 오히려 식탁까지의 걸음 수를 줄일 수 있어 서비스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식의 요령을 몇 가지 배웠다. 그리고 길을 잘 모르는 관광객들을 더 잘 안내할 수 있도록 지역을 통과하는 대부분의 고속도로 번호를 배웠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켄터키 농과대학에서 배웠다. 레스토랑 경영 전문가들은 렉싱턴 캠퍼스를 여급사들 훈련 장소로 사용했다.”
“켄터키 농과대학은 관광을 촉진시킨다.”
“켄터키 농과대학은 또한 주 전체의 고속도로 건설, 숙박시설, 하수시스템, 산업개발을 기획하는 데 도움을 준다.”
“켄터키 농과대학은 베이비시팅, ‘가족생활’…에 관한 훈련을 제공한다.”
이런 종류의 “농업” 서비스를 정당화하고 있는 스미스-레버 법안의 347a 항은 1913년 하원의원 레버가 지역협력사업을 “의무화”하는 규정을 통해 삽입되었고 1955년 수정을 거친 바 있다. 1913년 최초 법안과 1955년 수정 법안에는 공통적으로 살펴봐야 할 사항들이 들어있다.
347a 항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의회의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농장에서 농사짓는 독립 농가의 규모가 너무 작거나 너무 비생산적인 경우 또는 둘 다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혜택을 보지 못하는 농장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치유책이 처방되었다. “⑴ 농가의 문제들을 평가하고 해결하기 위해 농가들에 집중적인 현장 교육을 지원한다. ⑵ 농업을 개선시킬 수 있는 자원이 어느 정도 되는지 평가하고 농가 수입 보조를 위해 고안된 산업을 소개하는 데 지역단체들에게 도움과 상담을 지원한다. ⑶ 특히 충분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농가들에 고용기회에 관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다른 기관들과 단체들과 협력한다. ⑷ 기회와 기존의 자원을 분석해서 농업 벤처를 권유해볼 만한 농가의 경우, 그와 같은 변화 모색을 위한 정보, 조언, 상담을 제공한다.”
하원의원 레버가 사용한 “의무화”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이런 표현은 적어도 켄터키 대학의 지역협력사업 담당부서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법률적 강제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지역협력사업 담당자들은 모든 정책에서 어떤 식으로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리더십의 목표는 물론 더 나은 농사, 더 나은 삶,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행복, 더 나은 시민이다.
347a 항이 특수 이익 관련 법률의 성격을 가졌다면, 그 특수 이익은 여기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소농의 이익을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고 그나마도 소농의 이익인지 애매하다. 우선, 이 법안으로 인해서, 법철학적으로 보나 대학의 철학적 관점에서 보나 다음과 같은 놀라운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즉, 어떤 농장은 “너무 작고” “너무 비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문장들에서 암시되고 있다. 그와 같은 농장의 농부들은 “이익이 남는 사업에 요구되는 조정과 투자를 할 수 없다.” 그와 같은 농장은 “유휴 노동력을 고용하여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많은 수의 이러한 농가들은 현재 제공되는 지역협력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라는 부분이다.
어떤 농장을 “너무 작다”든가 “너무 비생산적”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농업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 내려진 규정이다. 농장은 삶이 아니라 이윤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와 마찬가지로 1955년의 ‘농기업’ 친화적 경제에서 농업은 수익사업이어야 한다. (347a 항은 시대의 산물로서, 이 시기에 농무성 차관 존 데이비스와 버츠 백작3)은 “농업생산을 합리화하기 위해 기업에 의한 통제”를 옹호했으며, 이 시기에 “농기업”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데이비스 차관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 시기에 농무성 장관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농민들에게 “규모를 키우든 퇴출되든”이라는 말을 남겼다. 347a 항은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이윤창출 가능성은 일종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상대적인 기준일 뿐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이윤창출 가능성만 내세운다면 한 가족이 작은 면적의 땅에 농사를 짓고 그 땅을 훌륭하게 돌보면서 품위 있고 독립적인 좋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농장이 “너무 작다”든가 “너무 비생산적”이라는 규정 다음에 오는 세 번째 규정은, 농장에 대한 규정으로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반복해보자면, “너무 작고” “너무 비생산적”인 농장은 “현재 제공되는 지역협력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농장은 서비스 산업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산업이 농장의 기준이 되고 있다.
347a 항의 입법은 농장의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하는 실제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고 이 법안의 목표는 타개책으로서 새로운 지역협력사업 개발을 허용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만 맞는 주장이다. 1955년 농업은 분명히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때를 기점으로 농장과 농민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지역협력사업을 통해 농업 문제를 그 자체로 다루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을 고안하기 위한 국유지 교부 대학 관련 입법 활동은 많이 있었다. 347a 항과 관련하여 두드러진 점은 그 조항이 국유지 교부 대학들로 하여금 농업문제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을 포기하고 ‘농기업’ 혁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 농업문제에 대한 비농업적 해결책을 시도하도록 허용했다는 점이다. 347a 항이 규정하고 있는 지원책들은 너무 일반적이고 애매한 것들이어서 대학들은 이 규정을 멋대로 활용하였다. 1955년 이후 농학계는 기득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농학계는 농민들의 복지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농민들과 그들의 가족과 후예들과 관련된 일에는 어김없이 농학계가 관여하면서 기득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농학계 전문가들의 기득권은 농민의 실패로부터 나왔다. 농민들에게 단순한 허드레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것, 그것이 농학계 전문가들의 기득권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347a 항의 법조문 자체가 느슨하게 쓰여있는 데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급사에 대한 고속도로 번호 교육, 관광 촉진, 산업개발 기획, 하수시스템과 숙박시설 확충 등을 정당화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하원의원 레버의 “의무화”라는 말로서, 이 표현을 빌미로 사실상 지역협력사업 담당자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셈이다.
법적으로 볼 때 국유지 교부 대학의 합법적 고객들은 농부들인데 이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이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작전4)이 바로 이런 새로운 ‘사업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농부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대학 자체에 있다. 왜냐하면 대학들은 ‘농기업’과 협력하는 데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농사가 농기업으로 전환되면서 농업인구는 격감하였고 그에 따라 농업 전문가들은 한때 자신들의 수혜자들이었던 농민들을 따라 도시로 진입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대학에서의 생계수단을 잃든지, 농업 전문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농과대학들이 너무나 열심히 농업의 산업화와 농민의 도시화를 촉진시킨 나머지 이제 “미국 인력의 96 퍼센트가 식량 생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렇다면 농과대학의 필요한 생존책략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추진하는 대학이 되는 것이다. 그 대학이 바로 ‘농기업’ 대학이다. 농기업 대학은 사실상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져왔다. 농기업 대학들의 성공은 실로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농민의 숫자가 줄어들었는데도 농과대학은 성장했다. 그래서 농과대학의 성장은 더욱 놀랍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347a 항에 따라 프로그램 장사를 한 행위가 얼마나 농업에 대한 배신인지 생각해볼 수 있겠다.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혜택 받지 못한” 소농들의 농업 문제를 다루지 않았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소농에 적절한 작은 규모의 기술과 방법에 대한 개발 시도를 하지 않았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농기업’과 큰 기술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추정했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이 관광을 장려하고 하수 시스템을 계획할 수 있다면, 왜 이 대학들은 지역협력사업을 통해서 소농들에게 기업형 공급자들과 구매자들에 맞서는 보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장려하지 않았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소농 경제의 주요 생업이었던 가금류, 달걀, 버터, 크림, 우유 생산을 담당하는 소생산자들의 시장이 파괴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그런 시장들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던 위생법이 꼭 필요한 것인지 또는 정의로운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농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에 들어가는 실제 비용(도시와 시골에서 드는 비용)을 계산해보려 하지 않았는가?
국유지 교부 대학들은 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농과대학들은 사실상 ‘농기업’ 대학들이었으며 이런 대학들은 소농, 농장 공동체, 농지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연구를 했다는 사실은 농학 연구의 전문화 현상이 세상과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먼저, 우리는 농학 연구를 전공별로 갈라놓는다. 그리고 대학 구조 내부에서 농학의 각 전공분야들은 다시 다른 종류의 전공분야들과 갈라진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앙드레 메이어와 장 메이어가 학술지 〈다이달루스〉 1974년 여름호에 게재된 “농학, 섬으로 존재하는 제국”5)이라는 논문에서 통찰력있게 잘 요약해놓았다. 다른 학문분야와 마찬가지로 농학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그 자체의 방식으로 확대되어 왔다. “농학이 19세기 지적 분야 중 하나로 발전하면서 대학의 교양 중핵 분야로부터 단절된 분과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산하에 하위 전공분야가 있는 것처럼 농학도 자체적으로 하위 전공분야를 만들었다…” 그리고 농학은 “자체적인 학회와 직능, 사교 단체들도 조직했고 전문기술 잡지와 대중 잡지도 창간했다. 그리고 농학에 관심을 갖는 대중도 창출했다. 심지어는 독자적인 정치체제도 갖추게 되었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농학의 설립자들은 농학을 사회와 정치부터 심지어는 신학까지 포괄할 정도로 범위가 넓은 계몽주의적 학문 개념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현대의 학문 구조는 농학을 그와 같은 사유로부터 소외시켰다. 결과적으로, 농학은 터무니없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여, ‘영양학적 가치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은 채’ 유전학적 연구 결과를 내놓으면서 이른바 녹색혁명을 낳았다. 그러나 현대 농학은 유전자의 과잉 단순화에 따른 우려나 녹색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위험성에 대한 성찰은 보여주지 않았다. 농학의 독립으로 농학은 또한 생태와도 분리된 “분야”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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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c 말엽에서부터 시작된 미국 대학의 역사에서 초창기 미국 대학은 대개 정치적 야심가들을 키우는 역할을 했으며 그 커리큘럼은 고대 그리스 라틴어, 역사, 수사학, 논리학, 윤리학 등의 전통적인 인문학 텍스트로 제한되어 있었다.
2) 1970년 조직된 농기업 책임 프로젝트Agribusiness Accountability Project는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공익단체로서 원래는 대기업과 농기업이 이주노동자와 계절노동자의 빈곤과 어려움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곧 이들의 활동은 농업, 국유지 교부 대학들, 지역협력사업 전반에 대기업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를 밝히는 데까지 범위를 넓혔다.
3) 1971년 닉슨 행정부 때부터 1976년 포드 행정부까지 농무성 장관을 지내며 규모의 농업경제를 지향하여 전임 농무성 장관들과 마찬가지로 “규모를 키우든 퇴출되든”이라는 구호를 재임 내내 농민들에게 강조했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서 숱한 구설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4) 여기서 고딕체는 강조를 위해 번역자가 선택한 것이다. “작전”이라는 말 속에는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속임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 문장에서 기술되듯이, 대학은 농민의 급감, 농촌의 위기의 원인이면서도 마치 문제의 해결자라도 되는 듯이 행세하는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저자는 “작전”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고 그런 저자의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번역자는 “작전”이라는 어휘를 고딕체로 처리했다.
5) 앙드레 메이어와 장 메이어는 부자지간으로서, 장 메이어는 영양학자이자 오랜 기간 터프트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학자다. 이들이 쓴 “농학, 섬으로 존재하는 제국agriculture, the Island Empire”라는 논문은 농업 사회학적 접근으로 이 분야의 고전에 속하는 글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농학이 다른 학문들과 절연되었을 뿐 아니라 역시 섬처럼 존재하는 농민들과 농민 단체들과의 교류가 없는 섬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 이승렬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