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동아리를 위한 책 읽기 7
분야별 추천 도서_ 자연과학
초등학교 시절,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던 친구가 있었다. 늘 책만 읽고 있어서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던 그 친구는 고1 때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 “정치 경제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그 친구를 미워했잖아? 그래서 간 거라고.” 이게 아이들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이유였던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난 혼자만의 가설을 다른 아이들한테 퍼뜨렸는데, 대충 이런 것이었다. “그 친구가 초등학교 때 나보다 공부를 잘했는데, 고1 1학기 때 나보다 성적이 안 좋았잖아? 그래서 간 거라고.” 몇 년 전 그가 우리나라에 금의환향했을 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
“중학교 2학년 때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를 읽었어. 너무 대단한 책이더라고. 우리나라 번역판으로 열 번을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원서를 사 가지고 또 열 번을 읽었어. 그러다 물리학에 푹 빠졌고, 물리학을 더 자세히 공부하려는 마음에 무리해서 미국에 간 거야.”
이 친구가 바로 내 초등학교 동창이자 캠브리지 대학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장하석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열심히 읽었던 그는 결국 책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이 친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든 빌 게이츠도 못 말리는 독서광이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의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라는 그의 말은 그러니까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제국을 세운 것은 남이 미처 생각 못 한 것을 생각해 낸 상상력 덕분이고, 그 상상력은 책을 통해 길러지니 말이다. 이분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 역시 서른이 넘어서 읽기 시작한 독서 덕분에 삶의 방향을 정한 사람 중 하나다. 책을 읽으려고 할 때마다 “어떤 책을 읽지?”를 고민한다. 아무 책이나 읽다 보면 자신만의 취향이 생기기 마련이고, 읽은 책이 많아질수록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 더 많아지는 현상을 겪게 되지만, 그래도 다른 이의 추천서를 읽는 게 책에 흥미를 붙이는 방법이긴 하다. 안개 속을 헤매며 걷는 것보다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보고 가는 게 길을 찾는 데 훨씬 더 유리할 수 있으니까. 책 몇 권을 추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추천서가 재미없다고 해서 “난 역시 책과 맞지 않아”라고 결론을 내리는 건 성급하다는 것을. 장하석이 그랬듯이, 꾸준히 읽다 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책을 만날 수 있다.
『말라리아의 씨앗』, 로버트 데소비츠
널리 알려진 책이 아님에도 이 책을 굳이 추천하는 이유는 과학 연구가 어떤 것인지를 이 책만큼 잘 보여 주는 책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흔히 생각하기에 연구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제일 중요한 것 같지만, 과학 연구의 역사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니다. 지나칠 정도의 집착과 성실성이 인류가 풀지 못한 의문을 풀어낸 경우가 아주 많으니까. 이 책에 소개된 로널드 로스Ronald Ross가 그렇다. 저자에 의하면 로스는 “동물학에 무지해서 모기의 어느 쪽이 머리고 어느 쪽이 꼬리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203쪽)” 사람이었지만, 성실성만큼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로스가 살던 시절만 해도 말라리아가 어떻게 사람에게 감염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기가 주범일 것이라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고, 로스 또한 지도 교수로부터 모기를 가지고 연구하라는 명을 받고 말라리아가 유행하는 인도로 떠난 터였다. 거기서 로스가 한 일은 뭐였을까? (1) 일꾼들한테 모기를 잡아 오게 한다. (2) 그 모기로 하여금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의 피를 빨게 한다. (3) 모기를 해부해서 그 안에서 말라리아가 자라고 있는지 확인한다. 만일 말라리아가 정말로 모기의 주범이라면, 환자 피를 빤 모기의 몸 안에서 말라리아 병원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비록 자신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로스는 누구보다 열심히 이 일을 했다. 무려 2년이 넘도록. “이마와 손에서 흐르는 땀으로 현미경 나사가 녹이 슬고 마지막 남은 접안경마저 조각날 때(210쪽)”까지 이 일에 매달렸다니, 그 성실성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로스는 2년에 걸친 무수한 실패 끝에 결국 모기가 말라리아를 전파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 공로로 1902년 노벨의학상을 받는다. 첨단 기계를 이용해서 남들이 생각 못 하는 기발한 일을 해내는 연구도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같은 일의 반복이며, 머리보다 손, 발을 더 많이 써야 하는 허드렛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끝끝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다. 현장과 이론을 모두 겸비한 데소비츠가 쓴 이 책은 실제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 주며, 장차 훌륭한 과학자가 되려면 어떤 소양을 길러야 하는지 독자들에게 말해 준다.
『아파야 산다』, 샤론 모알렘
쓸모없는 것은 도태되고 필요한 것들만 남는 현상을 진화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왜 저런 게 남아 있을까?”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당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말이다. 세포가 이용해야 할 포도당이 세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혈액 속에 남아 있는 병이 바로 당뇨병이다. 혈중 포도당이 올라가다 보니 소변으로도 포도당이 나가는데, 그 바람에 소변에 개미가 꼬이는 일이 벌어진다. 높아진 포도당 때문에 신장과 눈, 그리고 신경계에 갖가지 합병증이 생겨 수명까지 단축시키는 이 당뇨병 유전자는 도대체 왜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일까? 저자인 샤론 모알렘은 갖가지 유전병들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정하는데, 그 유전자들이 어떤 순간에는 필요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단다.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게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도 포함된다면,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과학적 사고를 하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겠다. 궁금할 것 같으니 당뇨병이 왜 살아 남았는지만 얘기한다. 지금부터 1만 3천 년 전, 지구는 빙하기였다. 너무 낮은 온도가 인체에 해로운 이유는 혈액에 얼음 결정이 생겨 이것이 혈관을 비롯한 몸 조직을 파괴할 수 있어서란다. 이게 당뇨병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얼음물은 얼리기가 쉽지만 설탕이 많이 들어간 물은 잘 얼지 않는다. 즉 당뇨병은 어는점이 낮아지게 함으로써 인체 내에 얼음 결정을 생기지 않게 해 준다. 또한 인체의 혈당은 갈색지방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열로 쉽사리 변환되니, 혈당이 높은 건 빙하기를 견디는 데 훨씬 유리한 조건이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이 책에는 이보다 더 신기한 얘기들이 일곱 가지나 더 나온다.
『콘택트』, 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서른이 넘어서야 읽었다. 장하석은 중2 때 읽고 감명을 받았다지만, 난 그다지 재미를 못 느꼈다. 너무 지겨워서 몇 번이나 책을 읽다 까무러쳤다. 우주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사라졌다고나 할까? 그 직후 읽은 책이 바로『콘택트』였다. 저자 칼 세이건은『코스모스』에서 보였던 우주에 대한 관심을 한 편의 훌륭한 소설로 만들어 냈다. 외계로부터의 메시지를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엘리가 결국 신호를 수신할 때, 그리고 그 신호가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이었다는 게 드러날 때, 그리고 외계로 갈 우주선을 만들 때, 난 짜릿한 흥분에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심지어 그 전에는 시큰둥했던 외계인의 존재까지 믿게 만들었으니, 이보다 더 훌륭한 과학 안내서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휴대폰과 IT의 세계적 강국이긴 하지만 우주 항공 분야에는 아직 취약하다. 이 책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을 때, 우주 강국의 꿈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매력적인 장 여행』, 기울리아 엔더스・질 엔더스
인체에 대한 책은 대부분 지루하다. 입은 어떻게 생겼고 위는 어떻게 생겼느니, 생각만 해도 하품이 나온다. 우리 몸에 대해 재미있게 쓰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할 때쯤, 이 책을 만났다. “네가 의대생이니까 물어보는데, 똥은 어떻게 나오는 거야?(18쪽)” 책 초반부에 나오는 이 도발적인 질문을 읽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 후로도 이 책은 소화기관의 형태와 기능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생길 수 있는 질병에 대해 얘기해 주는데, 그 과정이 어찌나 유쾌한지 책을 읽는다기보단 즐거운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우리가 장을 더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소화를 마치고 마침내 청소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 군것질로 입이 쉴 틈이 없는 사람의 소장은 청소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95쪽)” 그냥 군것질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지 않는가? 책을 읽고 나면 변을 보고 물을 내릴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유일한 부작용이다.
『진실, 그것을 믿었다』, 한학수
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뭘까? 위에서 언급한 성실성도 그 후보가 될 수 있고, 뛰어난 상상력도 훌륭한 과학자가 가져야 할 덕목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덕목을 내게 묻는다면, 난 두말하지 않고 ‘정직’이라고 말할 것이다. 과학 연구란 수백,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강 저편에 있는 보물을 찾으려고 징검다리를 놓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징검다리라니? 과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 한 편 한 편이 바로 그 징검다리로, 연구자들은 먼저 그 길을 간 연구자들이 한 성과를 발판 삼아 한 발 한 발 목표에 다가선다. 그런데 징검다리가 엉뚱한 곳에 놓여 있다면 어떨까? 그 다리를 밟은 사람들은 더 전진하지 못한 채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엉뚱한 곳에 놓인 징검다리가 바로 논문 조작이다.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조작의 유혹에 휘말린다. “이 쥐가 죽어 줘야 결과가 잘 나오는데”라며 쥐를 째려본 경험은 연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쥐의 목을 조르면 그게 곧 조작이 된다. 그게 논문으로 발표되면 그 뒤를 잇는 연구자들은 “어? 이렇게 했는데 왜 쥐가 안 죽지?”라며 머리를 쥐어뜯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조작이 과학계에서 범죄인 이유는 수많은 연구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우리나라에서 큰 화제를 모은 황우석 사건을 취재한 PD가 썼다. 추리소설처럼 스릴이 넘친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이지만,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정직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데 이 책만큼 좋은 교본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