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동아리를 위한 책 읽기 4
분야별 추천 도서_ 서양철학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한국에서만 공부를 해 왔다. 똑같은 말이지만,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 지내 본 적은 있지만 그 곳에서 공부를 해 본 적은 없다. 나는 서양철학을 전공하였다. 좀 더 상세히 말해 본다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1980년대 초중반에 대학의 철학과를 다녔으며,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대학원을 다녔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학교를 떠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먹고살면서 사적인 차원에서 철학 공부를 하고 있다. 2014년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오로지 나 자신의 정신을 위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 아주 잠깐 대학에의 취직과 한국의 철학계에 기여하려는 바를 공부의 목적으로 삼은 적은 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영위된 내 삶의 궤적은 내 공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한국 상황은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의 전공 분야를 결정한 계기였으며, 그때 이후 실천철학은 나에게 주요한 공부 영역이다. 실천철학은 좁게는 정치 체제의 구성 원리와 구체적인 실행을 탐구하지만 그것에 덧붙여 인간 집단의 형성과 발전, 그 집단과 구성원을 묶어 주는 다양한 이념들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이러한 이념에는 종교적인 신념과 관행도 포함되기 때문에 한국 고유의 종교와 외부에서 도래한 종교들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공부의 대상이므로 그들이 살아온 역사, 즉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공부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일본제국 식민지 시기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공부한 선생님께 공부를 배웠는데, 선생님은 항상 ‘근본학으로서의 철학’, ‘형이상학’을 강조하셨고, 이것 역시 당연하게도 내 공부의 핵심 분야이다. 형이상학은 인간과 세계의 근본 범주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존재와 무,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가치 등의 근본 원리를 따져 묻는다. 이러한 문제를 탐구한 학자들의 저작은 읽기가 까다로운 까닭에 텍스트를 잘 읽는 것에 대해 늘 고민한다. 이는 철학 공부 자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도구를 연마하는 일이다.
한국, 넓게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은 철학 공부만이 아닌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들을 폭넓게 규율한다. 내가 가진 문제의식은 여기서 생겨날 것이다. 이는 철학이 보편적인 학문이라 해도 그 보편성은 공부하는 이의 지역성, 심지어 집안 분위기, 부모의 인간 됨됨이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한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애초에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생겨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서양철학을 전공하였다는 것은 학계의 편의에 따라 분류되는 기준일 뿐, 결국 내 삶과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해명하려는 시도가 나의 공부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이처럼 공부한 내력이나 관심사, 살고 있는 세상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스스로의 상황을 잠깐이라도 생각해 본 다음 철학이라는 학문 영역에서 낳아 놓은 책들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내가 추천하려는 서양철학 관련 책은 독자들의 요구에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독자는 누구나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왔으며,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관심사와 문제의식에서 철학 책을 집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책 몇 권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
철학, 아니 학문 일반에 대한 충동 — 이 말은 일반적으로 저급한 본능에 기인한 것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으나 모든 인간은 자연적 생물 유기체이므로 이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에 따라 인간의 행동의 출발점은 이것이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하거나 정리할 뿐이다 — 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과시욕에서 뻗쳐 나오기도 하며, 고도의 지혜에 이르러 삶과 죽음을 관조하려는 필요에서 솟아나기도 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든 이 충동은 잠시도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철학 책 읽기라고 하는 쓸모없어 보이는 행위를 하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이 살아 온 시대와 세상에 대한, 그것도 많다 싶으면 적어도 지금의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야 한다. 철학 책 읽기의 출발점은 여기이다.
철학은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범주를 찾아보려는 학문이다. 근본적인 것들, 간단히 말하면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세상사는 왜 이러한지 등에 관한 것을 묻는 학문이다. 이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물었던 것이고, 당연히 딱 부러지는 답이 나와 있지 않은 것들이다. 이러한 물어보기와 대답하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는 특정한 물음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 묶음인 지식과 삶의 겪음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것이다. 철학 ‘책’은 지혜를 주지 못하고 지식을 준다. 정답을 주는 것은 아니고 잘 물어보는 법과 잘 대답하는 법, 또는 물어보아야 할 질문 목록을 준다. 물론 철학자라 알려진 이들은 자신의 고유한 삶과 시대를 살아갔으므로 각기 다른 물음 목록과 질문 방식, 대답 목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가장 공통적인 것부터 알아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양철학의 첫 머리에서 거론되는 플라톤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흔히 서양철학 하면 소크라테스를 떠올리지만 소크라테스가 쓴 책은 없으며, 그는 당대의 사회와 맞서 싸운 실천가였다. 그가 사유 방식을 혁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혁신은 플라톤이 정리하였다.
플라톤에 관한 책은 남경희의 《플라톤: 서양철학의 기원과 토대》(아카넷)를 추천한다. 이 책은 희랍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강의하였으며,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학자가 쓴 것이다. 이 책은 플라톤 철학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다. 이는 서양철학에서 다루어지는 가장 오래되고 공통적인 것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올바름’, ‘앎’, ‘좋음’, ‘나라’, ‘우주’ 등의 주제는 플라톤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이 고심해 온 것들이다. 한국의 플라톤 철학 연구 역사에서 이만한 책은 없다.
57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을 단번에 읽고 이해할 수는 없다. 일단 전체를 통독하고 장章 단위로 꼼꼼하게 읽고 정리하려면 1년이라는 기간도 모자랄 것이다. 독서동아리에서 책을 읽는다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많은 책을 읽기 보다는 이러한 책 한 권을 함께 읽으면서 기초를 충분히 다지는 게 중요하다. 심화된 독서를 원한다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편 중 마땅해 보이는 것을 골라서 읽어도 좋다. 특히 《향연》과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드라마 형식으로 쓰였으므로 단순히 내용을 이해하는 것으로는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등장인물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등장하였는가, 각각의 등장인물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말하는 순서는 왜 이렇게 배치되어 있는가, 대화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소크라테스는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가, 여기서 플라톤이 제기한 물음들은 대답을 얻었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왜 대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 이런 식의 물음을 가지고 읽는다면 책 읽기의 방식을 습득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론적 탐구만으로 부족하다면, 실천적・정치적 탐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면, 폴 우드러프의 《최초의 민주주의: 오래된 이상과 도전》(돌베개)을 읽어 볼 수 있다. 왜 민주주의(또는 민주정)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적혀 있다. 우리의 정치적 판단과 실천은 이것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된다. 독자들 각자가 민주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를 것이다. 독자들 각자가 민주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다를 것이다. 곰곰이 따져 보면 민주정은 한반도에서 살아 온 주민들에게는 낯선 정치 체제이다. 한반도 주민들은 아주 오랫동안 왕정 체제에서 살아왔으나 일본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민주정체를 채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정을 회복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도, 내가 아는 한 없었다. 헌법이 제정된 이후 헌정이 심각하게 훼손된 적이 있고, ‘독재가 더 낫다’고 우격다짐을 벌인 이들도 꽤 있었지만 —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이것이 공론화된 적은 없다. 한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은 주변의 동아시아 국가, 즉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중국은 몇천 년 동안 황제독재정체를 유지했으며, 지금은 일당 지배 국가이며, 일본은 오랫동안 허울뿐인 ‘텐노天皇’와 실권을 쥔 ‘쇼군将軍’이라는 이원 체제에서 살아오다가 100년도 안 되는 기간에만 실권을 잡았던, 결국에는 국민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었던 천황을 상징적이나마 윗자리에 — 일본국 헌법 제1장은 천황에 관한 규정으로 시작한다 — 올려 두고 있다. 이러한 사정만 보아도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동아시아 세계에는 새로운 민주정체에 대해 깊은 이해에 이르러야 하고 그것을 잘 운영하기 위한 고민과 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많은 책을 기대하고 이 안내를 읽은 이들은 고작 두 권의 책을 추천한 것에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전문적인 학습이 아닌 독서동아리에서의 집단 독서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독서동아리에는 다양한 성향과 요구를 가진 구성원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맞추어 책을 정하고 읽어 나가는 것이 어렵다. 이 책 저 책 정해서 읽다 보면 읽어 오는(또는 그 책을 읽자고 했던) 사람만 읽어 오고 다른 이들은 ‘이런 거 같아요’를 남발하는 방식으로 모임이 진행된다.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지지’ 않으려면 표준 도서라 할 것을 정해 두고 제법 오랜 기간 동안 강제로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독서 모임을 가진다고 가정하면, 한 번은 정해진 책의 한 장章을 읽고 각자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야기 나눌 것들을 적어서 나누어 가진 다음 충실한 이해와 토론을 해 나간다면 적절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만 가벼운 읽을거리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 공부하는 동아리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읽지 말았으면 하는 종류의 책에 대해 말하고 싶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 본 사람은 삶의 지혜가 단박에 얻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것을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유혹하는 책들이 제법 있다. 독자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겪음을 차분히 응시하고 그것을 여러 차례 음미하면 ‘삶의 철학’은 넉넉히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