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놀이터, 나쁜 놀이터
안찬수
‘기적의놀이터’를 통한 놀이터의 혁신, 새로운 놀이터, 그리고 공유 놀이터 이런 개념도 쓰시던데, 문제는 그건 하나의 예일 뿐이잖아요. 집에서 놀이터로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건 굉장한 사회적 과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기적의도서관’ 이야기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집에 왔는데, 도서관에 빨리 다시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도서관, 잠을 자려고 하는데 ‘빨리 아침이 돼서 도서관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도서관, 그런 도서관을 아이들에게 만들어주자고.
편해문
그런 면에선 놀이터가 엄청 유리하죠. 놀이터니까요.
안찬수
이제 가치 문제를 이야기해보죠. 이런 기적의도서관이, 이런 기적의놀이터가 있어야 된다 고 이야기할 때, 과연 어떤 도서관이, 어떤 놀이터가 좋은 도서관이고 놀이터인가, 어떤 도서관이, 어떤 놀이터가 나쁜 도서관이고 놀이터인가. 편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놀이터는 어떤 곳이고, 편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나쁜 놀이터는 어떤 곳인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저보고 뭐가 좋은 도서관이고, 뭐가 나쁜 도서관이냐 물으면 한참 설명해야 할 터이니까요.
편해문
놀이터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이냐. 첫 번째는,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저런 것들을 학교에서 배우기보다 놀이터에서 훨씬 많이 배운다. 이게 첫 번째 전제조건이고요. 두 번째는, 아이들한테 공간으로 봤을 때는 공공의 건축을 처음으로 학습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 속에서 벌써 지루한 거야 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 아이들이 어떻게 공공의 건축물을 읽어낼 수 있으며 사유해낼 수 있냐는 거죠. 그러니까 출발이라는 것인데, 놀이터가 왜 중요하냐면,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놀이터는 민주시민의 소양을 기르는 가장 중요한 장소라는 거죠. 놀이터와 민주주의라는 건, 그렇게 이야기가 많이 안 되어 있는데요.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부딪히게 되는 거죠. 다른 자아와 존재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다투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붙잡고 싸우기도 하면서. 그 부분을 풀어가면서 놀이가 재미있어지는 건데 학교에선 그게 불가능해요. 지나친 생각이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학교는 기본적으로 일단 하지 말아야 될 것들에 대해서, 금지와 규율과 제제에 대해서 배우는 공간이에요. 놀이터는 완전히 그 반대의 공간이라는 거죠. 아이들은 어디서 더 많이 배울까요? 금지가 없는 공간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거죠. 왜 놀이터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놀이터냐면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만나서 서로 갈등을 조율하고, 풀어가는 힘을 기르죠. 그런 점에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지 않으면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기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을 만나서 놀지 않으면 민주시민의 소양을 기르는 게 불가능하다 이거죠. 어디서 그걸 해줄 거냔 얘기죠. 집에서 그걸 해주나 학교에서 그걸 해주나. 놀이터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거예요.
제일 안 좋은 놀이터는 일단 ‘갈 수 없는 놀이터’죠. 아무리 잘 지어봤자 갈 수 없는 놀이터는 나쁜 놀이터에요. 갈 수 없다면 ‘죽은 놀이터’예요. 인공으로 떡칠을 해놓은 놀이터 많잖아요. 바닥은 완전히 100% 우레탄으로 깔고, 아이들이 놀면서 생명의 기운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그런 놀이터. 두 번째는 ‘영혼 없는 놀이터’예요. 다른 놀이터를 베껴오거나 기성제품을 베껴온 놀이터, 놀이터에 영혼이 없는데 거기서 노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영혼이 생기겠어요? 세 번째는 ‘거짓말 놀이터’. 다람쥐 놀이터, 어쩌고 해서 가보면 다람쥐를 PVC로 만들어놓았어요, 다람쥐는 없고.
안찬수
좋은 놀이터는요?
편해문
저는 이게 있으면 놀이터고 이게 없으면 놀이터가 아니라고 보는 데요, 그건 위험의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유치원 수준으로 놀이터를 만들어놓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놀기에 안전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안 가요. 가면 재미없고 지루하니까요. 아이들이 거기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거든요. 놀이터를 원래의 용도대로 쓰지 않는 것. 백 프로 그렇게 하거든요. 초등학생 놀이터를 유치원생 수준으로 만들어놓으니까 아이들이 미치지요. 놀이터에 가면 안전수칙이란 게 있거든요. 여기선 이거 하면 안 돼, 이거 하면 안 돼, 이거 하면 안 돼!. 근데 아이들이 이걸 보면? “오, 이거 해야 될 목록이구만.” 하고서 그거 다 하는 거예요. 결국은 사고가 왜 나냐면, 놀이기구를 원래 용도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거거든요. 그 아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도 그 놀이터를 쓸 수 있도록 그 수준이 만들어져야 된다는 거죠. 다시 말하자면 놀이터에 위험의 요소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여기서 위험이라는 건 ‘데인저danger’를 말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risk’를 말하는 거예요. 유럽의 놀이터에 대한 책, 혹은 놀이터 안전에 대한 책들의 첫 번째 장, 가장 첫 번째에 나오는 항목이 뭐냐면 ‘놀이터란, 위험을 만나고 그것을 아이들이 넘어설 수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어요. 위험이 빠지면 그건 놀이도 아니고 놀이터도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위험이라는 걸 완전히 탈색을 시켜서는 놀기 안전하니 안심하라는 얘기만 하고 있는 거죠.
안찬수
책에 보면 도식도 만드셨는데요. (Play+Ground+Risk)-Hazard=Safety: 〈(P+G+R)-H=S〉 라는 도식. 헌데 이 위험이라는 단어가 가진 어려움이 있어요. 위험, 어른들이 생각하는 안전이라는 것. 아이들의 놀이터에 필요한 위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따라오라고 다 따라갔던 사회에 대한 반성
편해문
쉽게 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놀 권리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잖아요. 그것보다 사실 중요한 권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애들은 ‘다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애들이 안 다칠 방법이 있긴 있어요. ‘가만히 있는 것’,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잖아요. 사실 이 책의 제목을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고 잡은 게 세월호를 겪으면서 촛불도 있고 다양한 활동이 있었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뭘 할 거냐, 그런 성찰의 결과예요.
안 다치려면 가만히 있으면 돼요. 에어백으로 감싸고, 아이들을 끈으로 묶어서 다니면 되는 거죠. 그런데 뭘 말씀드리고 싶으냐면, 집이라는 곳에서는 그런 리스크를 만나기 어렵잖아요. 도시에서 유일하게 리스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놀이터라는 거죠. 놀이터에서 그걸 싹 빼버리니까 아이들은 위험을 만날 수 없게 된 거죠. 그리고 이 아이들이 실제 현실의 위험과 맞닥뜨렸을 때, 어찌할 줄 모르게 되죠.
귄터 선생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대담을 했었거든요. 제가 여쭤봤었습니다. 막 세월호 사건이 터졌던 시기에 오셨거든요. “독일에선 이 일이 어떻게 수습이 되었겠습니까?” 이 양반은 공학도잖아요. 그러니까 배 구조를 생각하고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셔요. 자기가 봤을 때 서른 명 이상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왜, 우리는! 독일이 완벽한 사회는 아니겠죠. 그런데 독일의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물에 가라앉는다고 할 때, 물에 빠지고 있으니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독일의 고2 학생은,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단언컨대 영 명이라는 거죠. “이 일은 내 일”이라는 거죠. “나한테 닥친 바로 내 일.” 귄터 선생님은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해를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다 한국에서 일주일을 저와 내리 같이 자고 같이 다녔거든요.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은 왜 그렇게 되었고, 독일 아이들은 영 명이냐 물어봤어요. “편 선생, 한국에 있을 때 우리가 어디어디 가봤지? 부모나 교사들이 아이를 어떻게 대하디?” 귄터 선생님께선 말씀하시더라고요. 공원에서 영유아들이 소풍을 왔어요. 교사들이 계속 하는 게 ‘손을 잡고 다니세요. 줄을 서세요.’ 계속 그러잖아요. 지나가다 공원에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는데 귄터 선생님이 들어가서 한참 돌아다니고 오세요. “선생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바로 그 이유를 이야기해주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세월호 참사의 이유다. 자기는 이걸 통해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출입금지인데 그 이유가 안 씌어 있더라.” 왜 들어가지 말아야 되는지 이유를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는데 하지 말라고만 하는 거죠. 이유가 없는 금지, 그게 완전히 일상이 되어 있더란 거죠.
광주에서 선생님하고 회의 끝나고 둘이 택시를 타고 가는데 그때 시각이 밤 열한 시였어요. 신호등에서 걸려 멈춰 있는데 고등학생들이 그때 우르르 몰려나와요. 귄터 선생님은 또 말씀하셨어요. “편 선생, 저 아이들은 나라에서 월급을 주나?” 열한 시까지 앉아 있고 싶은 학생이 어디 있냐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공부 안 해도 되니까 밤 열한 시까지 있으라고 강제하는 거예요. 이렇게 십 몇 년을 지낸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했겠느냐는 거죠. 자기는 세월호 소식을 듣고 도저히 이해 못 했대요. 사람이 그런 위기 순간을 맞닥뜨리면 못 넘던 담도 뛰쳐 올라가요. 그런데 아이들이 가라앉는 배에서 그렇게 있었다는 건 오랫동안 덮어씌워졌던 그늘이 없고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가시면서 하는 말이 뭐냐면 한국은 자기가 봤을 때 전제주의 국가라는 거예요. 히틀러 이전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거죠. 자기네가 그랬대요. 히틀러 이전 시대에 부모들이 애들을 엄청 팼고, 학교는 더 했고. 그렇게 집과 학교에서 지내다가 히틀러가 나타난 거죠. 히틀러가 “얘들아 따라와라.” 그러니깐 다 따라갔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고 죽인 다음에 독일은 그걸 많이 생각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왜 그랬을까, 모두가 생각했고 그 결론이 이렇게 났다는 거죠. 교육이 문제다. 집과 학교에서 애들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문제다.
자발적 복종과 학습된 무기력
안찬수
그런 반성을 겪고 나온 사회에서 살던 사람의 눈에는 문제가 환하게 보였겠죠. 세월호 사고의 원인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이들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단면, 그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너무나도 부족한 거죠.
편해문
이제는 성찰할 기운도 안 남아 있잖아요.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와 선생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떨지 돌아봐야 합니다. 내 훈육의 방식이 이런 상황을 낳은 게 아닌가? 두 가지예요. 자발적 복종과 학습된 무기력. 이게 아이들을 완전히 휘감고 있는 거예요. 불의에 대한 저항은 전혀 생각도 못해요.
안찬수
그건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비유가 있잖아요? ‘대한민국호가 세월호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시민들의, 말씀하신 자발적 복종과 학습된 무기력, 사회 전체가 강고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어요.
편해문
데즈카 양반을 만나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안찬수
후지유치원의 데즈카 씨 말씀이시죠. 어떻게 법령이나 안전규정을 넘어섰는지 궁금하더라고요.
편해문
그분이 그래요. 뭐가 창의력이고 크리에이티브냐 하면 기존의 제도와 법률을 뛰어넘는 게 창의력이다. 그냥 저질러서 상 받았다고 해요.
안찬수
지금 열세 번째 기적의도서관인 부산 강서기적의도서관 설계안를 구상하는 단계인데, 설계자와 이야기할 때, 그 때가 이 책이 나오기 전인데, 인터넷으로 후지유치원을 보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사실 부지가 비슷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편 선생께서 가토 씨와 데즈카 씨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편해문
전 망했어요. 돈 쓰느라고(웃음). 데즈카 씨께도 똑같은 질문을 드렸는데 귄터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아주 뛰어난 지성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대답들이 한 사회가 도달해 있는 지성의 평균치를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봤느냐 여쭤봤거든요. 그러니까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이 참 공통적인 모습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국도 일본도 어떤 사고가 일어나면 원인 제공자를 꼭 찾아내려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사람의 잘못이나 자연재해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남을 비난하기보다는 자기 아이들이 그런 사고에 대처할 수 있도록 키우고 있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자기 아이들이 사고에 대처할 수 있도록 키우고 있느냐, 이 부분이 성찰이 되어야 하는데, 똑같이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이게 선진국의 평균치인 거 같아요. 아이들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안찬수
그 질문은 계속 던져야 될 질문이죠.
편해문
어떤 큰 운동의 흐름이 만들어지니까 정말 중요한 이러한 질문이 놓쳐진 게 아닌가? 지금은 그 동력이 완전히 상실이 된 것 같아요.
안찬수
내가 처한 자리에서 내 질문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냥 질문은 바깥에다 던지는 식이죠.
편해문
도대체 인문학을 왜 하냐는 거죠. 책은 왜 보냐는 겁니다.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
안찬수
시간이 많이 됐는데 두 가지만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위험이라고 하는 부분, 위험사회 논의도 있고 책의 뒷부분에서는 ‘리스크’와 ‘데인저’와 ‘해저드’도 구분하시고 하셨는데요. 우리가 평상시에 ‘아이들은 안전해야 돼.’ 할 때 그 반대의 의미의 위험과,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만나야 될 위험에 대해서요.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무슨 역설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건지 설명해주시고요.
편해문
사람들은 위험이란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위험을 영어로 하면 danger, peril, hazard, risk도 있고 개념을 크게 나눠서 볼 필요가 있어요. 이를테면 놀이터에서 해저드는 당연히 제로가 되어 있어야 되죠. 그물을 만들어놨는데 애들이 빠져서 목이 걸리는 위험, 회복이 불가능한 부상이 발생할 위험은 당연히 제거가 되어야 되는데 현재 놀이터에는 그런 위험은 거의 제로가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리스크’도 다 빠져 버린 상황이에요.
‘리스크’란 말을 사람들은 똑같이 위험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리스크risk'란 ‘리시카레risicare’에서 온 말이에요. 그 뜻이 ‘용기를 내서 도전하다’는 뜻이에요. 긍정적인 개념의 말로 저는 쓰고 있어요. 놀이터에 그물이나 망이 있으면, 아이들은 오늘은 요만큼밖에 못 가, 그래서 다시 내려와요. 또 며칠 있다 가서는 조금 더 올라가보고, 그러다 완전히 넘어가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여기서 이렇게 하면 떨어지는데 여기서 저렇게 하면 안 떨어진다는 걸 배울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한계상황과 만나게 되고 그 한계를 조금씩 넘으면서 배울 수가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놀이터에 곳곳에 배치·배열되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없을 때 아이들이 다른 용도로 기구를 사용하다 다치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고. ‘왜 이따위로 만들어놓은 거야?’ 반달리즘이라는 건데, 재미없으니까 제 용도대로 쓰지 않다 부수는 거예요.
이 위험이 참 중요한 까닭이 뭐냐면 놀이 속에서 그런 걸 만나보지 못한다면 실제 삶에서 위험을 맞닥뜨렸을 때 전혀 대처를 못해서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는 상황, 리스크를 넘어서 사고로 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에요. 거꾸로 현재 놀이터는 안전하게만 만들어놓아서 아이들이 아무런 위험에의 모험, 한계에의 도전을 할 수 없으니까 실제로 위험이 닥쳤을 때 ‘데인저’에 빠지는 상황을 조장을 하고 있다는 거죠. ‘안전한 놀이터는 위험합니다.’
안찬수
현재 안전하게 만들어진 놀이터가 역설적으로 위험하다?
편해문
안전한 놀이터가 놀이터 밖에서 아이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이죠.
안찬수
또 하나의 질문은 이 책을 내시게 된 목적이 있잖아요. 놀이활동가라든지, 현재 육만 개, 칠만 개 되는 공공놀이터와 민간놀이터를 혁신하는 데 뭔가 책임을 맡고 있는 또는 그런 활동을 하시려는 분들께 던지는 메시지가 있잖아요? 그 메시지. 그리고 이 책에도 나오지만 ‘놀이터 삼부작’ 중 이 책은 이부작이고 앞으로 세 번째 책을 펴내실 거라고 하셨는데, 앞으로 어떤 걸 펼쳐 나가시려는지 말씀을 해주시지요.
편해문
사실 제가 이 책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게 어떤 거냐면 놀이터를 만들 때 애들은 제일 힘이 없거든요. 놀이터를 만들 때 누가 힘이 세냐면 조경이나 건축을 하는 사람들 혹은 공무원들이란 얘기죠. 근데 이 분들은 놀이터를 짓고 난 이후에는 한 번도 안 와요. 반면 놀이터를 만들 때 가장 힘이 없는 이들이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이 놀이터를 가장 오래 쓰는 주인인 거죠. 이런 불일치가 있다는 걸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들은 생각해 달라. 우리는 만들지만 쓸 사람들이 아니고, 아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오래 쓸 사람이라는 이 불일치를 깊이 생각하고, 놀이터를 만들 때 아이들 이야기를, 주민들 이야기를 좀 들어야, 만들어진 놀이터가 안전한 놀이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육만 개 놀이터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데 출발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한국이 어떻게 보면 역동적인 게 있거든요. 저는 기적의도서관이 한국의 도서관 패러다임을 바꿔갔듯이, 기적의도서관처럼 기적의놀이터를 한 개, 두 개 만들다 보면 바꿀 수 있다고 봐요. 우리가 다 할 수 없잖습니까. 제 역할은 놀이터 변화의 물꼬를 만들어 내는 정도가 아닐까. 지금 고양시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놀이터를 실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하나둘씩 생기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 다음에 얘기를 해보고 싶은 건요. 아이들이 놀려면 세 가지가 필요한데 시간, 친구, 놀 공간이에요. 어떻게 보면 첫 번째 책은 ‘시간’과 ‘친구’ 얘기를 붙잡고 한 거거든요. 이번 책은 두 번째로 공간에 대한 얘기였고요. 한국도 이런 걸 알아야 할 시간이 된 거 같아요. 그럼 이게 놀이와 놀이터의 궁극이냐.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아이들 놀이터를 지칭하는 이름들이 몇 개 있는데 모험놀이터이기도 하고 폐자재 놀이터, 커뮤니티 플레이그라운드Community Playground, 정크, 쓰레기들 막 널려 있는 그런 것들. 유럽이나 일본 같은 데 이런 놀이터들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어요. 실제로 가보면 그 놀이터에서는 완전히 아이들이 주인공이에요. 일본에도 그런 놀이터가 사백 개가 있어요. 저는 그 책을 쓰려고 하고 있는데. 놀이터가 어떠냐 하면, 불을 피울 수 있어요 아이들이. 어떤 허락도 받지 않고. 톱과 망치를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나무를 이삼십 미터씩 올라가도 아무도 주변에서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요. 건물 지붕에 막 올라가요. 난간이 없는 지붕에 올라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요. 일본 놀이터를 보면 삼십 년의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런 놀이터가 도쿄에만 사십 개가 있어요. 그 놀이터를 가져오자 이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아이가 나무를 올라가잖아요. 그걸 왜 허용을 하느냐? 철학은 뭐냐면, ‘인간은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올라간다. 올라간다는 것은 내려올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건 한 인간을 믿는 거란 말이에요. 너는 그것을 할 수 있고, 네가 그만큼 올라갔다는 건 도움 없이 그만큼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세계를 가까운 일본에서 보면서 저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세계를 어떻게 열어나가느냐 하는 거죠. 이런 놀이터가 어디에 특히 많이 있냐면, 일본 도쿄의 강남이라는 곳에서 시작됐어요. 당연히 못 사는 동네에도 이런 놀이터가 있지만 출발은 그런 동네에서 시작됐고 완전히 활성화되어 있어요. 애들은 거기서 온종일 벌거벗고 지내요. 그런데 어른들은 거기서 어른들끼리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저는 경쟁이란 걸 굉장히 싫어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제 과잉보호에서 벗어나서 그런 놀이터의 세계를 열어가야 해요.
안찬수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 이 책이 어른들의 생각의 물꼬를 바꾸는 데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으로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