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6일 오전 10시. ‘책읽는사회’ 사무실에서 편해문(46) 선생을 만났습니다. 편해문 선생은 최근에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소나무, 2015년 6월 25일 초판)를 펴냈습니다. 이 책을 놓고 ‘웹진 나비’의 안찬수 주간이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책에 담긴 생각을 좀 더 깊이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약 두 시간쯤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서 싣습니다. ‘웹진 나비’는 앞으로도 저자 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가겠습니다. (편집자 주)
안찬수 (시인.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시간을 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질문을 예닐곱 개쯤 준비했어요. 첫 번째 질문입니다. 편해문 선생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신 게 1998년 옛 아이들 노래를 『동무 동무 씨동무』, 『가자 가자 감나무』 등으로 펴내면서부터인데요. ‘아이들 노래’를 탐사하시다가 ‘아이들 놀이’와 만나게 되고, 또 ‘놀이’라는 주제에 몰두하시게 된 과정을 먼저 소개해주시지요.
‘아이들 놀이’와 만나게 된 까닭은
편해문 (놀이터디자이너)
놀이와 노래를 사람들은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놀이와 노래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나라고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놀이 따로, 노래 따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아서 ‘원래 하나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결국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날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있잖습니까. 전래동요라는 말을 저는 안 쓰는 편인데, 할머니들께 그런 노래를 뭐라 하느냐고 여쭈면 “그거 아 쩍에 불렀던 노래지.” 하시니 그냥 ‘아이들 노래’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고요. 놀이와 노래의 원형을 찾는 작업을 현장에서 십 몇 년 정도 하면서, 노래는 할머니들이 기억을 하고 계셔서 원형적인 게 남아 있어 따라할 수도 있지만, 놀이는 담아놓은 게 없어요. 한국에서는 그 원형을 찾기 어렵겠지만 아시아나 중동 쪽에는 아직 남아 있겠단 생각으로 그 지역을 십 년 정도 탐방했었습니다. 탐방하면서 보니, 역시 제가 생각했던 게 맞더라고요. 아시아나 중동이나 다 같은 놀이를 하고 있더라고요. 아이들은 땅이 있으면 일단 금을 긋고 싶고, 금을 그으면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생기죠. 이쪽은 사는 곳, 저쪽은 죽는 곳. 동그란 게 있으면 일단 굴리고 싶고, 그게 굴렁쇠죠. 결국엔 이것이 보편성이라는 건데요. 아이들의 놀이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지, 어디에서 어디로 전파해서 발생하는 것은 굉장히 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마지막에 이르게 된 결론은, 문화라는 게 보편성에서 시작되는 건데 다툴 필요가 없다는 거죠. 문화로 인한 충돌과 싸움이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아이들 놀이’를 보면 우리의 뿌리와 출발은 같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안찬수
아이들 놀이의 차원에서 보면 인류의 보편성이 들여다보인다.
편해문
놀이를 공부하면서 결국 제가 어디에 이르게 됐냐면 ‘평화’라는 주제였습니다. 한국에서 십 년 정도, 그 다음엔 밖을 돌아다니며 십 년 정도 놀이를 공부하면서 ‘다 같은 건데 이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 얼개가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을 디자이너라고 말한다면
안찬수
그렇게 『가자 가자 감나무』 시리즈 이후, ‘아이들 놀이’에 관한 책을 몇 권 내셨잖아요.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놀기 위해 왔는데 이게 뭐냐고 외치셨죠. (웃음) 그런데 우선 책의 꼴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어요. 판형이 손에 들고 읽기가 불편해요, 책날개의 저자 소개도 불친절하고요. 약력을 뭉개놓았어요. 편해문은 놀이터디자이너다라는 짤막한 소개만 있어요. 이건 편집자가 하신 게 아니고 편 선생님이 이렇게 하시자고 하신 거죠?
편해문
편집자한테 동의는 얻었어요.
안찬수
책 내용에도 나오지만, 여러 가지 용어가 등장해요. 놀이터디자이너라는 말도 있고, 놀이터 운동가도 있고, 놀이운동가라는 말도 쓰시는 것 같고, 또 놀이활동가라는 말도 있고. 그런데 편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비평가로서의 자의식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책날개에는 놀이터디자이너라고만 박아 넣으셨죠. 뭐가 맞는 건가요?
편해문
저는 놀이터활동가, 놀이운동가, 그런 이름들의 차이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닌데, 그 까닭은 제 주변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바로 당신이 놀이운동가라고 해요. 그 이름을 주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들이 다 놀이운동이고 활동이다. 제가 그 이름을 독점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이 저에게만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금은 아이들을 돌보는 동네에 운동가가 필요하다. 기막힌 일이지만, 놀이운동가라는 게 말이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거죠. 놀이터디자이너도 마찬가지고요. 놀이터를 설계하는 것이 지금은 놀이터 설계나 조경 쪽에서 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아이들이 놀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느냐, 우리 자신이 가장 큰 영향을 마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디자이너란 귄터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결국은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사람을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거고 저도 거기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니 아이를 가까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이터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안찬수
아이들 놀이를 통해서, 놀이터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을 ‘놀이터디자이너’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의미라면 비평가도 디자이너고 활동가도 디자이너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이 책을 보면서 저는 분노가 읽혀지던데,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놀 수 없다는 것, 놀 시간도 없고. 어른들이 학습으로 윽박질러서 아이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생명체로서 숨 쉬고 몸짓을 하는 것들이 막혀 있는 현실. 대표적인 게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에 따라, 놀이터가 철거되고 폐쇄되는 현실, 이건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아요.
편해문
독서 쪽에서 말하는 검열하고 비슷해요. 세상은 한 바퀴로 굴러가는 거니까. 제가 느끼는 참담한 심정은 어떤 것이냐 하면, 이 일을 이십 년 해왔잖습니까? 이십 년 해왔으면 세상이 조금 나아져야 하는데 사실은 나빠지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아이들은 놀아야 된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백 명 중 세 명 정도는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솔직히 느끼는 건, 이제는 한 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어, 애들이 놀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지지 않았나요?’ 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저기서 ‘놀 권리’라는 말을 엄청나게 쓰고 있어요. 정부 각 부처에서 심포지엄이 막 열리고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 더 나빠질 거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어른들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닌데 어떻게 애들의 삶이 나아지냐는 거죠. 아이들 문제만 요렇게 따로 떼어내어 본다는 건 참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놀이’라는 말도 그래요. 놀이라는 말이 이제 완전히 세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놀이수학, 놀이영어, 놀이과학, 창의놀이, 놀면 공부를 잘 한다는 식으로 놀이라는 말을 마구 가져다 붙여 쓰니까 놀이가 무엇인지 탈색이 되어버린 거예요. 놀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못 알아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 놀이라는 말을 좀 덜 쓰려고 하거든요. 재개념화가 필요해요. 한 인간이 자유나 해방이란 걸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게 놀이다. 놀이라는 말을 새롭게 쓰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한국 아이들 삶의 질이 OECD 국가 중 꼴찌라는 현실이 드러나니까 위에서 “야 이거 어떻게 좀 해봐라”, 그러니까 작년 말부터 부쩍 ‘놀 권리’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일이 늘 그런 식이죠. 어제도 제가 문화체육관광부 연락을 받았는데 똑 같은 거예요. 보건복지부에서도 한다고 하고, 그런데 그야말로 포럼하고 끝나는 거예요. 그런 말들을 끝까지 자기 삶에서 책임을 지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집단, 평소 그런 고민을 해오지 않은 사람들이 말을 쏟아내는 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란 것이죠, “놀 권리? 나도 알아.” 사람들 귀만 고급이 되어서는, 귀로만 듣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어찌 되었든 앞으로 이삼십 년 동안 친구들과 동료들과 이 일을 할 텐데 오히려 더 힘들 게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놀 권리? 알았어, 그거 들어봤어, 그렇지만 난 안 할 거야.” 아이들한테 놀이가 뭐냐 물어보면, 아이들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은 건 “놀이란 엄마 아빠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요. ‘놀이’라는 말은 많아졌지만, 아이들의 현실에서는 ‘놀이’가 없어져 버린 것이죠.
‘놀이’란 과연 무엇인가
안찬수
그런 현실 속에서 다시 물어야 하겠어요. ‘놀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책에서도 놀이란 비강제적이고 어른들의 감시적 시선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몸짓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기는 한데, 하지만 진짜 ‘놀이’란 뭐지? 도대체 뭐야? 아이들이 논다는 게 뭔가? 그 본질은 뭘까?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하려는 사람들이 ‘놀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 점을 물어야 하겠어요.
편해문
제가 ‘책사회’하고 이야기를 나눈 게 출발이라고 볼 수 있는 게, 저는 이곳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못 갔지만 얼마 전 국회에서 토론하셨잖습니까? 검열, 독서이력, 그런 일에 대해서 한쪽에서는 해야 된다는 쪽이 있다면, 하면 안 된다는 쪽이 있는 거죠. ‘놀이’로 말하면, 한 인간을 교육시켜야 된다는 쪽이 있다면, 인간이란 자유라는 걸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쪽과의 싸움이에요.
‘책사회’와의 인연을 제가 왜 오래 유지하고 있는가 생각해봤을 때 이곳은, 아이들이, 한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쪽이에요. 한 인간을 가르쳐서 인간이 만들어진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다, 자유와 해방을 줬을 때 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계속 싸우고 있어요. ‘놀이’는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두 가지 말씀을 드릴게요. 하나는 자유에요. 아이들은 놀면서, 자유라는 게 무엇인지 느껴요. 아이들은 놀 때 자신이 신의 입장에서 자기가 놀이판을 짜요. 필요한 게 있으면 갖다 놓고. 그건 어떤 신의 자리에서 뭔가를 꾸려나가는 거거든요.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를 보면 마치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그럴 땐 우리가 중간에 손을 댈 수 없어요. 어른들한테 종교가 있다면 아이들한테는 놀이가 있는 거죠. 아이들한테는 놀이가 바로 신성한 세계와 만날 수 있는 통로인 거예요.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를 보면 마치 선승이 삼매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어떤 대안학교에 갔더니 아이들에게 명상을 시키더군요. 이런! 애들을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아이들은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있지 않아도 삼매에 들 수 있는데, 움직이면서도 삼매에 들 수 있는데. 놀이는 자유인 거죠.
또 제가 아이를 돌보는 어른들한테 놀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요. 놀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놀이를 얘기하는 건, 애들이 좀 잘 놀았으면 좋겠다, 비석치기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자유와 주인, 내가 자유롭게 주인이 되는 거죠. 그렇게 돼야죠. 주인이 되어서 무엇을 꾸려보는 것, 저는 그런 자유를 느낀 아이들이 당연히 자유의 어떤 반대 되는 것과 부딪칠 때 그것을 느낄 수가 있고, 누군가 나를 종으로 부리려고 했을 때 그걸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놀지 못하면 자유의 사람, 주인인 사람이 되는 걸,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어렸을 때 놀지 않으면, 종이 되어서도 불편함이 없고, 자유가 없어져도 불편함이 없게 되죠. 그러면 당연히 불의에 저항도 못하죠. 어떻게 보면 이곳이 자본의 한복판인데 논다는 건 자본에 가장 심하게 저항하는 방법이예요. 한 인간이 놀고 있어요. 안 선배님 보면 매일 놀고 있잖아. 노는 아이와 노는 아빠, 이게 바로 자본에 가장 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이죠.
안찬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책읽기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는 듯해요. 책읽기와 관련해서 엊그제 그런 토론을 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죠. 양쪽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요. 한쪽에서는 뭐를 집어넣으면 뭐가 나온다, 책읽기란 그런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사람은 기계죠. “이런 책을 읽으면 이 아이는 이런 행동을 할 거야.” 어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딱 나올 거라고 전제하면서 사람을 보는 거죠. 반대 입장은 뭐냐면, 이 책을 누군가 읽을 때, 저항하면서 읽을 수도 있고, 비판하면서 읽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읽으면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과정으로 보는 거죠. 그 과정 속에서는 어떤 인풋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아웃풋이 나오는 것은 아니죠. 양쪽의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다른 거죠. 그 관점의 간극이 커요.
편해문
저는 아이에게 책읽기 이전의 시기, 그 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책읽기 이전 시기에 자유가 무엇인지, 주인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던 아이에게 책을 전해주면 자기가 읽을 수 있지만, 아이들이 놀아야 될 시기에 아이들에게 책부터 읽으라고 하는 것은 걱정스러워요. 그 시기에 아이들이 충분히 놀았을 때 어떤 책이 와도 괜찮을 거예요. 노는 게 먼저, 책은 그 다음.
‘책사회’에서 할 얘기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책은 근본적으로 애들 장르가 아니에요. 이건 어른들이 만든 두 번째 장르인 거죠. 아이들의 본디 장르는 놀이, 노래, 이야기잖아요. 이 세 가지가 아이들의 한 시기에 잘 전해졌을 때 책도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안찬수
귄터 벨치히 씨를 보니까, 이 분이 유럽 사회를 전혀 다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뭔가 꿈꾸었던 세대, 흔히 말하는 68세대에요. 나이가 도정일 선생님과 비슷해요. 귄터 벨치히 씨를 보면,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그 통로로 놀이, 놀이터라고 하는 의제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질문이 있을 듯해요. 매개가 되어 있는 놀이와 놀이터를 바꾸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아무리 그걸 해도 세상은 더 참혹해지니 세상을 먼저 바꿔야, 아이들이 노래도 부르고 놀기도 할 수 있을 것인지. 이건 조금 단순하고 무식한 질문이죠? 뭐가 앞에 있다 하긴 어렵겠지만, 결국 놀이와 놀이터가 통로이기도 하고 결과물일 수도 있잖아요. 편 선생도 그런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편해문
귄터 선생님은 지멘스라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시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때 매일 상품을 만들고 있으려니, 이거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 귄터 선생님은 아마도 운동의 본류에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런 흐름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사회에선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요. 희망이나 좋은 걸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선생님께서는 삼십 년 정도 걸릴 거라고, 천천히 해라 하셨어요. 삼십 년이 걸려서 되면 좋을 텐데. 저는 책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제가 하려는 것은 놀이터를 여기저기 만들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책을 쓴 거거든요. 제가 두루 놀이터를 봐왔는데 저의 놀이터에 대한 결론은 뭐냐 하면, 궁극의 놀이터, 최고의 놀이터, 가장 중요한 놀이터는 뭐냐면 하우스와 홈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 거죠. 하우스는 건물을 말하고, 홈이란 정서적인 공간인데 그 속에서 아이들한테 얼마나 놀이, 놀이터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 집을 보는 거죠. 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애가 있는 공간. 하우스와 홈에서 아이들 노는 거. 아이들이 거기서 제일 시간 많이 보내잖아요. 그런데 바깥 놀이터만 이야기하는 것을 저는 인정 안 하는 거죠. 아이들 일상을 보면, 아이들이 어디서 크고 있냐면 놀이터에서 크는 게 아니라 길바닥에서 크고 있거든요. 어른들은 술 먹고 있으면, 아이들은 그걸 보면서 크는 거죠. ‘책사회’가 북스타트 하잖습니까. 같은 거예요. 놀이터를 자꾸 일상과 떨어진 독립된 공간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가까이서 하우스 홈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봐 달라. 그게 출발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게 출발이 안 됐는데 바깥에 있는 걸 바꾸고, 그런 게 얼마나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 놀이터 아무리 잘 만들어놔도 아이들은 갈 수 없어요. 가려면 허락받고 가야 하는데.
한국 아이들을 위한 경멸의 퍼포먼스
안찬수
이 책을 보면 뭔가 놀이터에 대한 담론이 갑자기 많아진 것은 알겠는데, 예를 들어 놀이터에 갑자기 안전 기준을 들이대서 폐쇄시키는 현실이 일어납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편해문
놀이터가 한국에 칠만 개에 육박하고 있거든요. 공공놀이터라고 다 얘기는 하는데, 그것이 공공놀이터라면 모든 걸 국가가 챙겨줘야 하는데 사실 이 칠만 개 중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게 민간 어린이놀이터 시설이거든요. 시나 구에서 관리하는 놀이터는 거의 폐쇄된 데가 없고. 어디가 폐쇄됐냐면 주로 못 사는 동네, 특히 어려운 동네의 놀이터가 폐쇄되었어요. 왜냐면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경우 주민들이 수선충당금이 내고 있거든요. 개보수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것이 불가능한 동네의 놀이터는 고치지 못하니 안전 기준에 불합격돼서 거기서 놀면 벌금을 내야 되고, 그러니까 놀이터 자체를 못 들어가게 칭칭 감아놓았어요.
안찬수
이 책에 아주 상징적인 사진이 있더라고요. 놀이터를 못 들어가게, 칭칭 감아놨어요.
편해문
제가 봤을 때 바로 그건 한국아이들을 위한 경멸의 퍼포먼스라는 거죠. 그대로잖아요. 아이들을 묶어놓은 것과 똑 같은 거잖아요. 좀 있는 동네 아이들은 스포츠센터에 레저센터도 있지만, 없는 동네 아이들은 그 놀이터가 유일한 공간이거든요. 그런데 거기를 폐쇄했어요. 칭칭칭 못 들어가게 막아 놓았어요. 놀이 기구가 위험하면 그걸 고쳐서 놀게 해줘야 되는데. 사실 이 책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제 나름의 대응으로 쓴 거예요.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세월호 이후에 “위험해? 그럼 폐쇄해!”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위험해서 폐쇄한다는 데 누가 뭐라 그래, 그러죠. 그렇게 폐쇄해버리니까 아이들은 더 위험한 곳에 가서 놀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렇게 해놓고는 눈을 감아버리는 거죠. 아, 아이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쪽으로 이젠 막 달리는구나… 그런데 또 한쪽에서는 놀이터 짓겠다고 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는 거예요. 정말이지 한국에는 돈이 많아요.
놀이터가 바뀌긴 해야 돼요. 획일적인 놀이터, 한국이 입만 열면 크리에이티브, 창의를 부르짖는 나라인데, 놀이터 가봐, 놀이터! 한국 아이들이 십 년을 놀아야 하는 놀이터, 아이들이 지금 놀고 있는 놀이터. 미끄럼틀 하나. 시소 하나. 그네 하나. 바닥은 우레탄. 똑 같아요. 이 속에서 무슨 애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나, 거짓말이에요.
이것보다 사실 더 중요한 게 책의 제일 뒷장에 나오는 거, 서울시랑 놀이터 약속 만드는데, 항목이 여섯 개가 있어요. 첫 번째 항목에 넣으려고 했던 것을 사람들이 도저히 못 넣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항목에서 빠졌어요. “놀이터를 잘 지어 놓으면 뭐해, 갈 수가 없는데.” 놀이터를 놀 만한 공간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과 함께 아이들이 놀이터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줘야 하는데, 무조건 짓겠다는 거죠. 지은 뒤 애들이 오든지 안 오든지. 저는 이걸 ‘놀이터토건’이라고 하죠.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부모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일의 비중이 ‘놀이터토건’만큼은 가줘야 하는데, ‘놀이터토건’만 가는 거예요. 지금 대기업에서도 사회공헌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뛰어들고 있어요. 얼마나 좋습니까. “봐, 우리 놀이터 만들어줬어. 봐, 개장하는 날 애들 많이 왔잖아, 우리 이런 거 하는 사람이야.” 아, 얼마나 좋습니까, 아이들은 놀이터에 갈 수 없는데, 아이들은 놀이터 못 가는데.
안찬수
도서관도 똑같습니다. 도서관 지어놨는데 아이들에게 도서관에 갈 시간은 안 주고, 학원에 보내는 거죠.
놀이의 사유화, 놀이터의 나이트클럽화
편해문
아이들이 가는 놀이터, 그곳에 가보면 아이들은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해요. 미끄럼 한번 타고는 더 할 게 없는 거야. 그러니까 아이들이 잘 안 가려고 그러죠. 그러니까 부모들이 토요일 일요일 차를 끌고 마트를 가면서 마트 안에 큰 실내 놀이터로 보내요. 노는데 돈 일이만 원, 이삼만 원 나가는 건 순식간이에요. 한 시간에 일이만 원 내야 되거든요. 두 명이면 뭐. 부모들의 그 심정도 참혹할 거라 생각해요. 왜 그런 일이 생기는가. 공공놀이터가 제 구실을 못해서 그렇죠. 애들이 노는 데도 돈이 드는데 돈 없는 애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아무것도 안 된다 이거죠. 그러니까 공공놀이터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제 자리 찾기를 해야 해요. 실내놀이터에 가보면 일단 공기도 안 좋죠. 그리고 중간에 보면 애들 흥분을 시키려고 사이키조명을 돌려요. 나이트클럽이에요. 소재도 다 PVC소재죠. 거기서 가장 서글픈 게 뭐냐면 애들이 여럿인데 다 각자 놀아요. 왜냐면 보던 애들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전혀 관계가 형성이 안 돼요. 이렇게 갈 거냐는 거죠. 장사꾼들은 이제 ‘나이트클럽 놀이터’를 가지고 주택가로 올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주택단지의 상가로 막 들어오겠죠. 사업은 당연히 대기업에서 할 거고. 저는 일단 공공놀이터를 아이들이 차 안 타고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죠.
‘참여디자인으로 만드는 기적의놀이터’
안찬수
그 일환으로 ‘기적의놀이터 프로젝트’를 진행하시고 계시죠? 연초에 도정일 선생님과 만나고 상의하신 적이 있잖습니까? 이 얘기를 해주시죠.
편해문
우리가 놀이터를 어디까지 혁신을 할 수 있는지 시험을 해보려고 해요. 시민들과 모임을 구성해서 진행하고 있는데요. 왜 순천이냐? 순천에는 기적의도서관이 있지 않습니까? 공공의 건축물이 아이들 삶을 어떻게 바꿔내는지, 순천 시민들은 학습이 되어 있어요. ‘기적의놀이터’ 하면 긴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런 걸 거야.’ 설명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기적의놀이터’라는 이름도 그렇고. 중요한 건 내용인데요. 일단은 기존의 놀이터를 만드는 과정과 좀 달리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참여디자인’이라는 건데, ‘커뮤니티디자인’이라고도 이야기하죠. 그 동네 아이들이, 그 동네 주민들이, 놀이터를 어떻게 만들면 좋겠다고 의논하는 워크샵을 통해서 밑에서부터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어요. 제가 총괄을 맡고 있는데요. 요즘 놀이터의 안전을 CCTV로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의 안전이란 CCTV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주민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 설계에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을 때, 부모나 아이들이나 오며 가며 결국 보게 되고, 그게 결국 안전을 담보하게 되는 거거든요. 귄터 선생님도 한국의 놀이터에서 CCTV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군요. 누군가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놀죠? 말도 안 되는 거죠.
첫 번째가 과정 면에서 기존의 놀이터와 좀 다른 거라면, 두 번째는 기존의 놀이터가 굉장히 기구 위주의 놀이터인데, ‘기적의놀이터’는 놀이기구가 없는 놀이터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기성제품의 기구가 완전히 싹 빠진 놀이터입니다. 저는 사실 그런 놀이터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무것도 없는 놀이터에서 시작해서 하이테크 놀이터까지, 놀이터에는 다양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놀이터를 통해서 다양성이란 걸 배울 수 있으면 해요. 우리나라엔 다양성이란 게 전혀 없잖아요. 자연에 가까운 놀이터만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첫 번째로 만들려고 하는 놀이터는 우리가 어렸을 때 놀았던 곳 있잖아요. 언덕이라던가, 터널, 펌프, 수로라든가 이런 것들을 다 넣어서, 큰 고목을 쓰러뜨리고 그렇게 자연에 가까운 놀이터를 만들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주민들과 나누는 과정이 또 하나의 기적이라면 기적이에요.
세 번째는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완전히 접근이 가능한 놀이터, 그걸 ‘통합놀이터’라고 하거든요. 사실 모든 놀이터는 통합놀이터가 되어야 하거든요. 서울에서도 무장애놀이터를 또 하나 짓는다고 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편견이고 차별이에요. 너희들이 몸도 불편한데 너희들만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겠어,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란 말이에요. 귄터 선생님이 아주 중요한 얘길 저한테 해주셨는데요. “생각해봐,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위한 전용 놀이터를 지어줄 수 있어. 그렇지만 그 아이들이 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나?” 그건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그런 놀이터는 지어주면 안 된다는 거죠. 일반 놀이터에서 몸이 불편한 친구들이 같이 놀 수 있게 하고 그 놀이터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는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