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 28주년을 맞아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진단과 과제’라는 주제로 학술토론회가 열렸습니다. 2015년 6월 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주최로 개최된 이 토론회는 한국사회의 갈등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수와 진보, 중도의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그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토론회는 경제, 사회, 정치, 생태의 4개 주제의 발표와 토론으로 구성되었으며, 대구가톨릭대 정성훈 교수(경제 부문), 고려대 정일준 교수(사회 부문), 서원대 정상호 교수(정치 부문), 서울대 환경대학원 윤순진 교수(생태 부문)가 주제발표를 맡았습니다. 아래에 발제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Ⅰ. 들어가는 말: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성, 지구성, 성찰성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다. 보수정치세력의 재집권이 이뤄지면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탈민주화de-democratization냐 민주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democracy냐 하는 갈림길이라고도 한다. 사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었다. 대체로 상대적 이념처럼 쓰였다.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세계화와 민주주의’, ‘경제와 민주주의’ 같은 경우이다. 전자는 시대정신이자 국가목표로 각광받고, 후자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항상 ‘안보상의 긴급사태’나, ‘경제개발’이라는 지상과제, ‘세계화’의 대세 또는 ‘경제 살리기’를 위해 유보될 수 있는 부차적인 가치나 목표로 취급했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과 뒤이어 수립된 ‘87년 체제’에서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정치권과 학계 그리고 시민 모두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떠들었다. 그런데 각자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달랐다. 사실 민주주의는 앞에 붙는 수식어만큼이나 다양하다. 자유-, 사회-, 시민-, 민중-, 작은-, 미시-, 생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따라서 단지 민주주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공허하다. “어떤 민주주의인가Which democracy?” 이것이 문제이다(최장집·박찬표·박상훈, 2007). 어떤 이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한국 민주주의는 이미 성취되었다. 주기적으로 선거를 실시하고, 커다란 선거부정 없이 대표자를 뽑으면 그만이다. 이념상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스펙트럼에 속하는 이들이 대체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선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가는 먼 길에서 단지 몇 발걸음을 뗀 데 불과하다. 더욱이 선거제도 자체가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매우 스펙트럼이 넓긴 하지만 진보적 이념을 가진 이들은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한국 민주주의는 두 번의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이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넘어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democracy가 이루어 졌다고 학계에서 주장하기도 한다(임혁백, 2011, 2014)
보수정권 2기를 지나면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교착상태에 빠졌다stalled democracy는 느낌이 팽배하다.1) 근본적으로는 1987년 민주주의로의 이행transition to democracy 이후 기대했던 것만큼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최장집, 2012). 이러한 비판의 화살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비껴가지 않는다(이병천‧신진욱, 2014). 그런데 애써 성취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로 역행하여 집회·결사와 언론의 자유 같은 기본권조차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이병천, 2014; 조대엽, 2015).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를 한국 민주화운동사라는 역사축에서 사고하는 데 익숙하다. 이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성historicity이라고 하자. 돌이켜 보면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라는 보편성보다 한국이라는 특수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냉전체제라는 전 지구적 지정학에 의해 규정된 분단체제라는 한반도적 현실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1997년의 외환위기와 이에 뒤이은 ‘1997년 체제’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군사적, 경제적인 지구적 압력을 한국 민주주의의 지구성globality이라 하자. 많은 이들이 지금 여기서 한국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사회행위를 한국 민주주의의 성찰성reflexivity이라 부르자. 역사성 없는 지구성은 몰역사주의ahistoricism이자 정치적 허무주의(“어쩔 수 없다”)이고, 지구성 없는 역사성은 행위자들이 마주한 권력의 장에 대한 무지이자 과잉정치주의(“판을 뒤집자”)를 부른다. 역사성과 지구성이 결합되지 않은 성찰성은 현실의 문제를 끝없는 과거로 소급(“친일파, 친미파 청산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하거나 남 탓(“미국 때문이야,” “자본주의 때문이야,” “신자유주의 때문이야”)으로 돌릴 우려가 있다. 역사성, 지구성과 함께 하는 성찰성만이 정치적 무관심과 과잉정치화라는 양극단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시론적인 글에서는 민주주의를 이념이나 제도보다는 행위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민주주의는 결국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의 통치”2)이니 만큼 민주주의를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실천하는 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러지만 시민들이 이미 민주적 정치주체로 형성되었다고 전제할 근거는 없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 한국에 부과된 자유주의 통치성liberal governmentlity이 현재 한국사회에 어떤 정치주체를 형성했는가이다. ‘48년 체제,’ ‘61년 체제,’ ‘87년 체제,’ ‘97년 체제’ 등을 거치면서 각기 상이한 주체형식들이 부과되었다. 주체는 타고난 것이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고 각 체제의 권력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Ⅱ. 한국 민주주의의 현황에 대한 인식3)
민주주의는 타살될 수 있다. 1961년의 5·16 쿠데타나 1980년의 5·17쿠데타처럼 군부에 의해 민주주의가 유린당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목소리는 권위주의 체제가 다시 들어설 것이라는 극단적 전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전복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전쟁이나 공황 쿠데타 등에 의해 타살되기도 하지만 소리 소문 없이 자살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림 1>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에 대한 분석결과이다. 5점과 7점에 응답이 각각 21.20%로 가장 많았다. 1점에서 4점에 ‘비민주적’이라고 답한 비율이 도합 22.6%였다. 이는 7점에서 10점에 ‘민주적’이라고 응답한 39.2% 보다 낮게 나타난 것이다. 이 척도를 점수로 환산한 평균값은 5.76으로 본 조사 척도의 중간 값 5.5보다 약간 상회하는 수치이다. 한국 국민이 평가하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보통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표 1>은 세대별, 정치성향별, 계층의식수준별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분석하였다. 세대별 차이를 살펴보면, 연령이 높을수록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60세 이상이 5.93으로 다른 연령층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정치성향별 차이를 살펴보면,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6.32로 중도와 진보성향을 지닌 사람들보다 한국 민주주의를 더 높게 평가했고 이는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한 차이였다. 계층의식별 차이를 살펴보면, 중층 상의 이상에 속한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6.24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평가했다. 반면, 하층의 하에 속한 사람들은 4.72로 상대적으로 비민주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는 민주주의 측정을 위한 구성요인들에 대한 분석결과이다. “행정부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설문에 대한 의견이 3.68로 가장 높다. 그 다음으로 “행정부 내에서 특정부처가 과도하게 권한을 행사한다”, 3.58, “국가정보기관이 불법사찰이나 수사를 하고 있다” 3.51, “행정 관료들의 권한과 자율성을 정치권력이 침해하고 있다” 3.45, “최고 권력자가 지역구 국회의원 의석을 실질적으로 지명하고 있다” 3.36 순서로 나타났다. 이로써 본 조사 척도의 중간 값 3보다 큰 수치로서 다섯 가지 구성요인들에 있어서는 대체로 비민주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표 2>는 세대별, 정치성향별, 계층의식수준별 다섯 가지 구성요인들에 대한 평균차이검증결과이다. 세대별 차이를 살펴보면, 4050세대는 “행정관료들의 권한과 자율성을 정치권력이 침해하고 있다”는 의견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높고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였다.
정치성향별 차이를 살펴보면, 진보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보수나 중도성향을 지닌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행정 관료들의 권한과 자율성을 정치권력이 심각하게 침해하고, 행정부내에서 특정부처가 과도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최고 권력자가 지역구 국회의원의석을 실질적으로 지명하고, 국가정보기관이 불법사찰이나 수사를 하고 있으며, 행정부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 더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였다.
계층의식별 차이를 살펴보면, 주관적으로 하층의 하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계층의식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정 관료들의 권한과 자율성을 정치권력이 심각하게 침해하고, 행정부내에서 특정부처가 과도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최고 권력자가 지역구 국회의원의석을 실질적으로 지명하고, 행정부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의견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하층의 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계층의식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가정보기관이 불법사찰이나 수사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계층의식별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게 나타냈다.
<그림 3>은 민주주의 측정을 위한 구성요인들에 대한 분석결과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라는 의견이 2.34로 여덟 가지 문항가운데 가장 낮게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2.38, “검찰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다” 2.41, “행정관료들이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견제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2.53, “검찰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권한을 행사한다” 2.56, “일반행정직 공무원의 인사가 외부개입 없이 자체 내의 인사규칙을 준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2.58, “경찰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권한을 행사한다” 2.63, “법관들이 양심과 법률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2.71 순서로 나타났다. 이는 본 조사 척도의 중간 값 3보다 적은 수치로서 여덟 가지 구성요인들에 있어서도 앞의 문항과 마찬가지로 매우 비민주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표 3>은 세대별, 정치성향별, 계층의식수준별 아홉 가지 구성요인들에 대한 평균차이검증결과이다. 세대별 차이를 살펴보면, 2030세대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일반 행정직 공무원의 인사가 외부 개입 없이 자체 내의 인사규칙을 준수하여 이루어지고 있고,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통계적으로는 유의미하지 않은 차이였다. 20대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국가정보기관과 검찰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경찰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법관들이 양심과 법 틀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고 평가하지만 이 또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차이였다. 60세 이상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행정관료들이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견제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차이였다. 반면,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 60세 이상이 더 높게 평가했고,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였다.
정치성향별 차이를 살펴보면,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중도나 진보성향을 지닌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여덟 가지 변인 모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이는 통계적으로 유미한 차이였다. 계층의식수준별 차이를 살펴보면, 주관적으로 계층의식이 높을수록 여덟 가지 변인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또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였다.
<그림 4>는 사회기관신뢰에 대한 분석결과이다. 전체 17개 기관 가운데 시민운동단체와 학계는 본 조사 척도의 중간값 2.5와 동일한 수치로서 보통수준으로 신뢰하는 반면에, 나머지 기관은 중간값 2.5보다 낮은 수치로서 불신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회는 1.65로 신뢰수준이 가장 낮고 그 다음으로 국가정보기관, 중앙정부 부처가 하위 순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대별, 정치성향별, 계층의식수준에 따른 사회기관 신뢰수준을 상호 대비시켜 살펴본 분석결과는 <표 4>와 같다. 세대별 차이를 살펴보면, 30대는 다른 연령층보다 노동조합과 시민운동단체를 더 신뢰하고, 50대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군대, 청와대를 더 신뢰했다.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였다.
정치성향별 차이를 살펴보면,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중도나 진보성향을 지닌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대기업, 종교계, 언론사, 방송국, 의료계, 중앙정부, 지방정부, 국회, 대법원, 군대, 청와대, 국가정보기관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진보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노동조합과 시민운동단체를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였다.
계층의식수준별 차이를 살펴보면, 주관적으로 중층의 상 이상에 속한다고 응답한 계층이 그 이하의 계층보다 17개 사회기관 모두를 상대적으로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시민운동단체에 대해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차이인 반면에 나머지 16개 기관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그림 5>는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갈등상황에서 미국의 선택은 어떠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석결과이다. ‘국가안보우선’이라는 응답이 48.80%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똑같이 추구’에 대한 응답은 26.40%, ‘민주주의 우선’ 16.90%, ‘모르겠음’ 2.90% 순서로 분포되었음을 보여준다.
세대별, 정치성향별, 계층의식수준에 따른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갈등상황에서 미국의 선택에 대한 의견을 상호 대비시켜 살펴본 분석결과는 <표 5>와 같다.
연령별분포현황을 살펴보면, 모든 연령층에서 미국은 갈등상황 시 국가안보우선을 선택했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세대별 분석결과에서 흥미로운 발견은 국가안보와 민주주의를 똑같이 추구하였다는 의견에 대해서 40대가 다른 연령층에 비해 가장 낮은 반면에, 20대가 60대보다 오히려 많게 분포된 것으로 나타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
정치성향별차이도 연령과 마찬가지로 국가안보우선이라는 선택 의견이 가장 많았다. 다만 진보성향을 지닌 사람들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우선 선택과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똑같이 추구에 대한 의견이 각각 22.7%, 26.8%로 나타난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
계층의식수준별 차이 또한 세대와 정치성향과 마찬가지로 국가안보우선이라는 선택의견이 가장 많았다.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똑같이 추구, 민주주의 우선, 모르겠음 순서로 분포되었으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게 나타났다.
Ⅲ. 한국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통치성
푸코 자신에 따르면 “국가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의 통일성, 개체성, 이와 같은 엄격한 기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결국 국가는 합성된 실재, 그리고 하나의 신비화된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의 중요성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되어 있다. 아마도 우리들의 모더니티에 있어, 즉 우리의 현재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의 국가화étatisation가 아니라 바로 국가의 ‘통치화’governmentalization이다. 우리는 18세기에 처음 발견된 ‘통치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4) 이러한 국가의 통치화는 역설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통치성의 문제와 통치테크닉은 정치투쟁과 경쟁의 유일한 쟁점이자, 유일한 실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통치화가 동시에 국가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국가가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동시에 국가의 안팎을 규정하는 바로 이 통치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등등을 끊임없이 정의하고 재정의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통치의 전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성의 전술 일반에 기초해서만 국가의 생존과 한계가 이해될 수 있다.”(강조필자)5)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향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고, 인권과 시민권 축소되며, 인종갈등이나 민족갈등 같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일시적인 것이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체제들의 토대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문제점이라면, 그 제도 바깥에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진태원, 2012).
한국 현대사를 통치성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지배와 저항’, ‘자본주의 발전과 비판’, ‘종속과 해방’ 같은 이항대립을 벗어날 수 있다. 또는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 같은 일직선적인 발전사관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역사로서의 현재present as history에 작용하는 안팎과 위아래의 힘들을 권력관계 안에서 추적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국가의 형성과 변형을 개별 시민주체의 형성 및 변형과 동시에 추적하는 것을 말한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권력을 관계의 원초적 항들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할 게 아니라, 관계야말로 자신이 향하고 있는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인 한에서, 관계 자체로부터 출 발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상적 주체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예속될 수 있도록 그들 자신으로부터 또는 그들의 권력으로부터 양도할 수 있었 던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예속관계들이 주체들을 만들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권력 형태들이 그 결과로서 또는 그 전개로서 파생되어 나 올 유일한 형태나 중심점을 찾기보다는 우선 이 형태들이 지닌 다양성, 차이, 종별성, 가역성을 부각시켜야 한다. 따라서 이것들을 서로 교차하고 서로에게 준거하고 서로 수렴하거나 반대로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소멸시키는 경향을 지닌 세력관계들로 연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법에 대해 권력 의 발현으로서 특권을 부여하기보다는 권력이 작동시키는 상이한 강제의 기술들을 표시해두는 것이 좋다.”
푸코 연구자 렘케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종언이 아니라 사회의 권력관계를 재구조화하는 정치의 변혁이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것은 국가 주권 및 계획 능력의 감소나 환원이 아니라 공식적인 통치기술로부터 비공식적 통치기술로의 전위이자 통치의 무대에서 새로운 행위자들의 등장이다. 이것은 국가와 시민사회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지시해준다. … 다시 말하면 국가와 사회, 정치와 경제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토대나 경계선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종별적인 신자유주의적 통치기술의 요소이자 효과로 기능한다.”(Lemke 2010)
신자유주의적 지배양식과 예속화 양식에 대한 분석을 넘어 이제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사고하는 데에도 푸코의 작업은 시사적이다. “내가 보기에는 자유들 사이의 전략적 게임으로서의 권력관계—이러한 전략적 게임은 어떤 사람들이 타인들의 거동을 규정하려고 시도하게 만들며, 여기에 대해 타인들은 자신들의 거동이 규정당하지 않게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애초의 타인들의 거동을 역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게 만듭니다—와, 우리가 보통 권력이라고 부르는 지배상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권력게임과 지배상태 사이에서 우리는 통치기술을 갖게 됩니다. 통치기술이라는 이 용어는 아주 넓은 의미, 곧 제도를 통치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통치하는 방식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론적 권력론은 민주주의를 법적인 정체政體로 규정하는 제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갈등적인 과정으로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위의 <그림 6>은 한국 현대정치사를 바라보는 전형적 틀인 ‘민주주의냐 독재냐’하는 이분법에 ‘자유주의냐 정치불안’이냐 하는 새로운 차원을 더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외부라 할 수 없는 미국이 지난 수 십 년 간 한국정치를 바라볼 때 중요시한 측면이기도 하다(정일준 외, 2014).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국가가 사회에 질서를 부과하는 방식이 강압에서 기율로 바뀔수록 ‘독재나 정치불안’에서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들어설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경로를 좌우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대응이 ‘동조냐 저항이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자유주의 통치성에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위의 <그림 7>은 사회위기에 대해 국가가 억압적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소통을 추구하는가를 한축으로 하고 시민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를 다른 한축으로 삼았을 때 나타나는 네 가지 통치양식을 보여준다. ‘민주적이냐 반민주적(반동적)냐’ 하는 축과 더불어 ‘개혁적이냐 전복적이냐’하는 축이 드러난다. 국가의 대응이 ‘민주적’이지는 않더라도 ‘개혁적’일 수 있으며, 국가억압기구가 전면에 나서는 ‘반동적’ 대응도 문제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이완되어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전복적’ 상황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8>은 통치제도가 하향식인가 또는 참여협력형인가를 횡축으로 하고 국가와 시민사회안의 지배집단에 대해 대항세력이 얼마나 형성되어있는지를 종축으로 삼아 통치체제유형을 구분한 것이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국가와 시민사회영역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에 대해 충분한 대항세력countervailing power이 형성되지 않고서는 주체적 시민참여형 통치를 정착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통치체제를 추구해나가느냐에 따라 한국 민주주의는 영구히 심화될 수도 또 한없이 지체될 수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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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착된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Bellin(2002) 참조.
2)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따온 구절이다.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3) 이 절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결과(정일준 외, 2014)에서 발췌한 것이다.
4) 통치성governmentality은 프랑스 학자인 미셸 푸코가 만든 용어이다. 학문적 전문용어이긴 하지만, 학계에서 이 개념을 이용한 실증적 연구 성과가 학문분과를 넘어 엄청나게 쌓여가고 있다.
5) Foucault, 1991/졸역, 1995, 47-48쪽.
★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주의연구소가 개최하는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 진단과 과제> (2015년 6월 9일) 사회분야 발표용 초고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거친 원고이므로 인용을 금한다. 토론은 환영한다. ijchung@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