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MIT에서 열린 포럼에서 덴마크의 학자 토마스 프띠뜨Thomas Pettitt는 ‘구텐베르크 괄호치기gutenberg parenthesis’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프띠뜨는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이 만들어낸 책의 지배로, 지난 오백 년 동안 구술문화가 차단되었던 것인데, 이제 디지털문화와 그것이 품고 있는 구술성orality에 의해 책의 지배는 도전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띠뜨에 의하면 지난 20세기 레코딩이나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그리고 인터넷 등이 끊임없이 책과 출판에 도전해왔으며 현재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구텐베르크 괄호치기’는 그러니까 책의 종말의 시대에 다시금 책의 시작 이전을 반추해보자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를 통해 또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의사소통의 유동성입니다. 책이란, 단어를 행간과 행간 사이에 집어넣고, 페이지를 매기며, 제본을 하고, 표지를 입히고 서가에 꽂아 놓게 되는 것처럼, 언어를 ‘감금imprison’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일리치가 관찰한 바, 텍스트 기반의 문자문화에 기인하는, 자아에 부여한 안정성과 서사적 일관성.) 이런 특성은 다른 문화 생산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무대에 올린 희곡이나 콘서트홀에 가둔 음악이 그러합니다. 그것들은 고립되고 고정됩니다. 이는 사람의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텐베르크 괄호 이전과 이후 사이, 그러니까 구텐베르크 괄호 안의 시기에는 사람의 인식은 범주화된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인종, 민족, 젠더 등등. 사람들은 사물을 조직하기 위해 분류법을 창안합니다. 모든 것을 범주라는 그릇에 담고, 범주로 설명합니다. 구텐베르크 괄호의 밖은 어떠한가. 프띠뜨는 마치 우리가 중세의 농민들처럼, 범주를 벗어난 사유를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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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가 생빅토르의 위그를 통해 책읽기의 변화를 탐구한 지점의 끝자락, 혹은 프띠뜨가 말한 구텐베르크 괄호의 바깥은 어떤 읽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매우 단순화한 이야기지만, 확정된 텍스트-문서로서의 기억-개인-자아의식(개인의 서사)-소유-계약이 한 뭉텅이로 묶여져 있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우리가 바로 그 자본주의의 끝자락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책읽기의 가능성은 바로 구텐베르크 괄호 바깥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무척이나 건너뜁니다만, 새로운 책읽기의 가능성이 우리의 물질적 기반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봅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나온 경제서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책이라고 하는 미즈노 카즈오水野和夫의 저서 『자본주의의 종언과 역사의 위기資本主義の終焉と歷史の危機』(集英社, 2014년 3월 14일)를 놓고,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聡와 나눈 대담에서 이야기를 빌려 옵니다. 미즈노 카즈오는 금융완화와 성장정책이라는 수단으로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점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아베노믹스나, 한국의 초이노믹스나 그게 그거입니다. 실제로 미국이 양적 완화를 축소하는 국면에 들어간다고 하니 신흥국 경제가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르면서 양적 완화가 위기의 해결은커녕 위기가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2008년 리먼 쇼크 때의 금융 위기는 국가가 채무를 떠맡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제 세계 경제는 선진국의 양적 완화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양적 완화를 일시적으로 축소한다고 해도 어디선가 ‘버블’이 터져 결국에는 공적 자금의 형태로 국민이 떠맡게 되어 버렸습니다. 미즈노 가즈오는 자본주의가 종언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금리는 거의 이윤율과 일치하는 것이기에, 초저금리라는 것은 자본을 투하하고도 이윤을 얻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이란 자본이 자기 자신을 증식시키는 것인데, 이 초저금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미즈노 가즈오는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종언과 동시에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해온 국가와 민주주의라는 것도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는 아무래도 ‘프론티어’가 필요합니다, 중심이 프론티어를 확장하면서 이윤율을 높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을 추진해 가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진행되어 지리적 의미의 프론티어는 이미 소멸했고 가상의 전자 금융 공간에서도 이윤을 올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외부의 프론티어가 아니라 내부의 프론티어입니다. 미국으로 말하자면 서브프라임 계층에 대한 수탈이나, 한국이나 일본으로 말하자면 저임금으로 일하게 되는 비정규직이 바로 내부의 프론티어입니다. 경기 회복이 문제가 아닙니다. 노동 임금은 늘어나지 않고 중산층이 붕괴하고 몰락함으로써 국민의 동질성이 없어져서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합니다. 일찍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말한 카를 슈미트는 민주주의가 동질성을 전제로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국민국가 내부의 경제적 동질성이 깨져 버림으로써, ‘국민 없는 국가国民なき国家’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최근 김종철 선생이 계속해서 ‘깊은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熟議民主主義’를 거론하고 있습니다만, 최소한의 동질성이 붕괴된 상태에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살면서, 민주주의를 말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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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와 식민지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천정환 선생은 『근대의 책읽기』을 통해, “책 읽기가 역사의 특정한 국면에서 양식화되고 유행한 일시적이며 특수한 양식”이라고 하면서 그 일시적이며 특수한 양식을 추적합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통계가 있습니다. 식민지시대 한복판이라 할 1930년 현재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6.78%, 남성은 전체의 11.5%, 여성은 1.9%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반도는 대부분 농촌인데 농촌 지역의 문맹률은 90%를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식민지 시대 좌·우파를 막론하고 문화·사회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는 바로 ‘문맹타파’였다고 말합니다. 『근대의 책읽기』에서 문제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로 근대의 책읽기가 시작되자마자 맞닥뜨려야 했던 ‘식민성植民性’의 문제입니다. “대다수 민중이 문맹인 상황에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 책들이 교양과 지배의 도구가 되었으므로,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은 서로 다른 문자(및 표기법)로 책의 세계를 경험하며 그를 통해 각각 다른 계층적·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주체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읽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주체로 구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 백성들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독서회讀書會’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낙인을 찍고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니 책읽기의 역사로 보면, 식민지가 되었기에 근대화가 되었다는 논의는, 근대화를 도로와 건물과 제도 같은 것으로만 보는 짧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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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웨덴 방문 기간에 민중의 집을 포함해 많은 단체를 방문했는데 노동자교육협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스웨덴의 최대 시민교육기관인 노동자교육협회는 사민당과 스웨덴 노총, 협동조합협의회가 공동으로 만든 단체이다. 전국적으로 약 3만5천 개의 스터디그룹을 운영하고 있는데, 다양한 시민 교육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념 교육부터 시작해서 실생활에 필요한 실무 교육까지를 10여 명으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학습하고 있다. 대규모 교육이 아니라 소규모 스터디 그룹을 만드는 것은 그들만의 철학이다. 소규모 그룹에서 토론하고 학습하는 과정을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독서동아리study circle’ (이 글에서는 study circle을 독서동아리라고 말하겠습니다.)를 조사하여 보고한 다른 분의 자료에 따르면, 스웨덴의 독서동아리는 19세기 후반에 빈곤, 인구성장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경제조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농촌의 빈곤, 처참한 생활 조건, 높은 문맹률, 사회적 불안정 등 스웨덴의 어려운 사회적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남미영, 발표 당시 인천함박초 교사) 독서동아리란 ‘동아리 동료들의 공동 참여를 통해 미리 정해진 주제를 체계적으로 읽는 모임’으로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 함께 모여 공통적인 관심사에 대해 읽고 이를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헨리 블리드Henry Blid에 따르면 스웨덴 독서동아리는 몇 가지 기본적인 운영원리가 있습니다. ①평등과 민주의 원리Equality and democracy among circle members: 독서동아리는 모든 구성원 간, 구성원의 한 사람인 리더와 다른 구성원들이 모두 평등한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필요에 따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모든 의사결정은 독서동아리 구성원들의 대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②문제 해결과 해방의 원리Liberation of members’ inherent capabilities and innate resources: 독서동아리는 동아리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합니다. 독서동아리는 구성원들의 생활세계 속에서의 문제, 현실 속의 부정의와 부당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독서동아리 활동에서 얻어진 새로운 지식을 현실 문제의 해결과 개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합니다. 독서동아리는 개별 구성원과 그들이 지지하는 조직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발전할 수 없습니다. 독서동아리가 변화와 행동을 위해 헌신할 때 비로소, 독서동아리는 더 유익해지는 동시에 더욱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간적인 풍요와 환경의 개선을 가져오며, 조직적인 차원에서는 동아리 구성원들의 책읽기에 의해 그들의 결속력과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③협력과 동반의 원리Cooperation and companionship: 독서동아리의 활동은 협력과 동반을 기초로 서로 나누고 함께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④자유와 자율성의 원리Study and liberty, and member self-determination: 독서동아리의 목표는 동아리 구성원들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되며, 독서동아리는 일정한 형식적인 틀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율적입니다. 그러므로 동아리 구성원들은 그들의 책읽기에 대해 스스로 책임집니다. ⑤계속성과 계획성의 원리Continuity and planning: 독서동아리는 조직과 계획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계속성을 가져야 합니다. 독서동아리 활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⑥참여의 원리Active member participation: 동아리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헌신은 독서동아리 자체는 물론이고 민주적 조직의 근본입니다. 사람들은 적극적일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으며,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동아리 구성원들 사이의 책무를 공유할 수 없습니다. ⑦자료의 원리Use of printed study materials: 독서동아리에는 참여자 수만큼 자료를 구비해야 합니다. 책, 신문기사, 팸플릿, 발췌문 등 어떤 자료이든 정보를 제공하고 계획적인 학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료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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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작가들>(2015년 봄)이라는 문예지의 특집원고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