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책이 필요하다
지난해는 우연하게도 책으로 시작을 열고 책으로 마무리를 한 한해였다. 연초에는 안데르센 상 심사가 있었기에 전 세계 아동문학 작가들의 작품들을 허겁지겁 읽어야 했고, 연말에는 한국출판문화대상 심사로 본선에 오른 54권의 책들 역시 마찬가지로 허둥거리며 읽어야 했다. 동화책과 그림책을 읽으며 키득거리기도 울먹이기도 했으며, 저마다의 연구 대상을 사랑해 마지 않는 우리네 저자들의 통찰력이 깃든 저술들을 읽으며 조금 아니 많이 겸손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작품의 상상력이 아직은 일천함을 배웠고, 나 또한 모르는 것이 여전히 많음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자료의 더미를 헤쳐나가며 조금씩 사태의 본질에 육박해가는 성실한 학자적 태도에도 깊은 경의를 느꼈다. 이래저래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많은 한 해였다.
늘상 읽어야 하는 책들과 함께 덤으로 주어진 이렇게 많은 책들 속에서 보낸 한 해였지만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책을 한 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나는 《눈먼 자들의 국가》를 꼽고 싶다.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를 보고 듣고 겪으며 생각한 일들을 여러 문인들이 기록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망설임 없이 100권을 샀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 권씩 건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건네려고 하자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도 비극을 강요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이 책은 그만한 강요에 값하는 책이라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우려를 누그러뜨렸으며, 정치적 관점이 다를지라도 고통에 공감하는 정도쯤이야 각자의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차이를 애써 외면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이란, 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몸으로 부딪히는 경험이 아닌, 머리와 마음으로 부딪히는 경험. 물론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경험을 이어간다. 쉼 없이 생각하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의미의 마주침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경험들은 일별이란 말이 딱 맞을 정도로 쓰윽 훑고 지나갈 뿐이다. ‘이효리가 쌍용차 해고자들을 응원하는구나. 예쁘네.’ ‘이 시러배아들 놈은 아직도 이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구나, 쳐 죽일 넘.’ ‘우와 저 사람 진짜 노래 잘하네. 부럽다, 부러워.’ ‘미생, 진짜 재미있네. 장그래, 힘내라!’ 등등……. 물론 대성당의 모자이크 창문들처럼 작은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 커다랗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더욱이 섬세하게 빛나는 이 작은 유리조각 하나하나가 없다면 생은 얼마나 무미하고 또 건조할 것인지.
그러나 이것만이 경험은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 책과의 마주침에서 겪는 경험은 무엇보다 그 폭과 깊이가 단연 일상의 경험을 넘어선다. 일별을 넘어 숙고와 성찰을 강제한다. 장하성 교수가 쓴 《한국 자본주의》는 724쪽으로 되어 있다. 스티븐 핑커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1,408쪽이다. 이 책들을 읽으며 한국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 경제는 성장을 넘어 어떻게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인가?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들을 쉼 없이 뱉어내고 또 나름의 해답을 안겨준다. 나는 일상에서는 결코 겪을 수 없는 경험을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넓게 또 깊게 경험한다.
물론 이 경험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나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를 더 알게 되었다고 해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어떤 정책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잣대 하나를 얻은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미심쩍지만 세계사가 폭력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진보했다는 확신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진보라는 앙칼진 녀석을 한 번만 더 믿기로 하고, 내가 쓰는 이 허접한 글이 조금이나마 진보의 동력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할 것이다. 그것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인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유가 아닐까? 한 번뿐인 삶에 대한 그나마 내놓을 수 있는 분명한 대답이 아닐까? ‘그래 봤자 한 번뿐인 바둑판인데’, ‘그래도 그 바둑판이 내 바둑이니까’, 내 삶이니까 한 번뿐인 내 삶이니까 좀 더 뚜렷하고 좀 더 올바르고 좀 더 진실에 근접해 가야 하지 않을까. 조금씩, 조금씩. 그러자면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책 없이 나는 혼자서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책이 내게는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책이 필요하다.
우리네 삶이 한 번뿐이듯 아이들 삶도 한 번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숙고하고 성찰하는 일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자연 책을 읽는 일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어릴 적엔 ‘책 좀 읽어’라고 하다 어느 사이엔가 ‘공부 좀 해라’로 바뀐다. 그 시기가 점차 앞당겨지고 있음도 목도한다. 책과 공부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이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삶을 준비하는 삶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노인들의 삶을 여생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곧잘 은퇴를 앞둔 노인들을 향해 ‘여생을 즐기라’는 표현을 쓴다. 여생餘生, 사전적인 의미로는 남은 인생을 뜻하나, 그 속내는 ‘덤으로 주어진, 우수리로 얻은’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어떤 생이든 덤으로 주어진 생은 없다. 모든 생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뜨거운 생의 한복판이다. 여가를 즐기듯 한가하고 여유를 부리고만 있는 생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이는 지극히 자본의 욕구에 바탕을 둔 발상이기도 하다. 노동력이 없으면 제대로 된 삶이 아닌 듯이 여기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이를 우리 아이들의 삶으로 견주어 본다면 아이들의 생도 다르지 않다. 아직 노동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네 아이들의 생은 그저 생을 준비하는 기간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네 아이들 또한 뜨거운 생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는 중이다. 결코 다시는 오지 않을 한 생애의 귀하디귀한 한순간들을 보내고 있는 즈음이다.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가 결코 아니다. 물론 아직은 경험도 부족하고, 성찰도 부족하기에 미래를 위한 시간 또한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사람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라는 제도를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교실 문을 나서서까지 삶의 시간 모두를 미래를 위해 저당 잡힐 수만은 없다.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미래의 삶과 나란히 현재의 삶을 살며, 현재를 있는 힘껏 살아내며 미래를 그 속에 앞질러 건사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내는 것 그 자체이다. 삶 속에서야만 우리는 삶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 경험이야말로 삶이 무엇인지,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나침반이다. 그리고 경험은 사람과의 마주침과 자연과의 마주침 속에서 영글어간다. 아이들은 또래들과의 놀이 속에서 관계를 배우고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또 아이들은 자연과의 마주침을 통해 사람을 넘어 존재 전체의 온전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배워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겐 놀 시간이 없으며, 자연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짐짓 부모의 손을 잡고 체험학습을 떠나지만 결코 자연스러운 자연도 아니며, 등을 떠밀려 놀이터로 나가봐야 같이 놀 아이들이 모두 종종걸음치며 학원을 다니느라고 없다. 경험할 수 있는 사람과 시간과 공간 모두를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그 대안은 오직 책을 읽는 것뿐이다. 책 속에서 또래의 아이들도 만나고 자연도 만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가능성이다. 특히 문학작품이 중요하다. 문학은 여타의 예술과 다를 바 없이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문학을 통한 경험은 한층 더 정돈되어 있고 고양된 경험이다. 텔레비전의 오락프로그램에도 웃음과 눈물은 있다. 그러나 깊이와 넓이란 점에서 문학작품과 비교할 수가 없다. 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웃고 울며, 마음 아파하고 또 마음을 쓸어내린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공감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사회학자들은 앞으로 사람들이 두 개의 머리를 지니고 산다고 한다. 지금껏 우리가 지니고 다녔던 목 위에 달린 머리와 함께 손에도 머리 하나를 따로 가지고 다닐 것이라고 한다. 물론 손에 들고 다니는 머리는 인공지능으로 지칭되는 컴퓨터다. 이 머리로는 온갖 정보를 재빨리 검색하여 확인한다. 지식의 세계가 온전히 담겨 있는 정보를 처리하는 머리이다. 또 다른 머리는 이 정보를 판단하는 이른바 지성이다. 그리고 지성과 나란히 공감을 바탕에 둔 감성이 목 위에 달린 머리가 하는 일이다. 물론 지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가장 뚜렷한 촉매가 곧 문학작품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더욱이 어린 시절 읽는 모든 문학작품들은 한결같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른바 희망의 담론이 어린이문학의 본질이다. 나는 단언컨대 삶에서 가장 소중한 덕목이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어린이문학 속에 담긴 희망의 전언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예술이며 문학인 한 어린이문학은 사람이 삶에서 저버려서는 안 될 가장 소박하고 가장 단단한 진실을 어린이들의 손에 쥐여주고자 한다. 조약돌처럼 반짝이는 이 단단한 진실은 삶이 어떠하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마음 깊이 새겨 줄 것이다.
눈물과 웃음 속에서 그 진실을 움켜쥔 어린이들은 세상이란 험한 강을 강건하게 건널 수 있는 바탕을 얻게 될 것이다. 마치 옛이야기의 결핍된 주인공이 선한 마음과 굳센 의지로 마침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되듯,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그 작은 진실을 품에 안고 고단한 여행길을 타박타박 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더욱이 어린이문학은 그 길을 홀로 걷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작품을 읽으며 어린이들은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절로 경험하게 된다. 절름거리며 아이를 들쳐업은 몽실이, 무녀리 새끼 돼지 윌버와 마당을 나서는 암탉 잎싹, 얼음 어는 강물을 헤엄치는 물오리, 심지어 길모퉁이 강아지똥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동화가, 동시가 지닌 상상의 힘으로 함께 사는 다른 이의 기쁨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깊이 받아 안게 될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0.05.02)
누가 책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책 읽는 문화가 등한시되는 까닭은 휴대전화 탓이라고 한다. 이른바 손에 들고 다니는 머리와 목에 붙이고 다니는 머리의 장점들을 유연하게 결합하는 대신 서로 명확하게 분리시키고, 손에 들고 다니는 머리에 원래의 머리가 온전히 매몰되고 만 형국이다. 이는 삶의 방식 전반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으나, 조만간 균형을 되찾을 것이다. 한계가 점차 자명하게 부각되기에 이를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계기들을 활성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가두는 교육 체제의 문제일 것이다. 한정된 재화로 말미암아 분배의 불균등이 피할 수 없다는 논리 아래, 획일적인 서열화에 우리 교육은 전력을 투구하고 있다. 분배의 불균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물론이거니와 직업의 귀천을 명확하게 분할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대학의 서열화를 공고화한다. 대학입시가 삶의 흔들림 없는 기반으로 작동하고, 대학과 전공에 따른 서열화를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맞추어 중등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초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수미일관 입시에 목을 매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획일적인 서열화는 분명 허구적인 신화일 따름이다. 우리 사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세습의 체제로 질주하고 있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05%를 차지하며 하위 40%는 2.05%의 점유를 보이는 극심한 양극화는 지금도 빠르게 진행 중이다. 상층부는 적극적으로 교육에 재투자하며 획득한 문화자본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와중에 자수성가나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심지어 자칫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려고 든다. 수능을 교육방송의 교재에서 7, 80% 출제한다는 것은 풍부하고 깊이 있는 독서 대신, 공부를 암기로 전락시킨다. 사교육을 줄인다는 미명 아래 나온 발상이지만, 이는 전 국민을 우민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문제풀이에 매달리는 것만으로 7, 80%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주술은 그 정도의 점수가 최대치인 아이들을 오직 문제풀이에만 매달려도 충분한 것으로 몰아간다. 가두리 속에 갇혀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니면 동굴 속에서 동굴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내면화한다.
사유하고 공감하고, 연결하고 끊어내는 그 모든 지적, 정서적 노력들을 줄기차게 감행하지 않는 한 우리네 대다수의 삶은 그저 모니터 앞에 앉아 ‘무한도전’을 무한히 반복하여 보고 들으며, 허락된 웃음과 연출된 생의 편린에 감동하며, 일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테두리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 채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독한 경쟁 사회 속에서는 경쟁의 하부나 상부, 그 어디에 있든 하루도 평온한 날 없이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되며, 한 단계라도 더 올라서기 위해, 혹은 아래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 심리적 억압 속에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적으로 다른 철학, 다른 삶의 방식들을 마련하지 않으면 이 사회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셈이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줄무늬애벌레가 그다지 힘겹게 꼭대기까지 올랐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이었음은 뼈아픈 대목이다. 캄캄한 고치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나비를 향한 꿈을 꾸어야 하지 않을까? 책은 그런 점에서 꿈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슬로건이다. 분명 책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옛날 어른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고 했다. 이 또한 책이, 나아가 이야기가 사람을 만드는 것에 대한 예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의 이면에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세계관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만 그 주인공이 오늘의 현실을 산다면?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그 가난은 남을 짓밟지 않고, 불의에 맞서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낸 가난이기에 복되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는 누구나 경험한 바일 것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흑인의 노예해방을 앞당긴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변화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누구나 책을 통해 마음이 따뜻해지고 생각이 환해진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필자 역시 다르지 않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 나는 심하게 울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읽은 많은 책들은 그가 터무니없는 독재자였으며, 공보다 과가 더 많은 억압자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바른 방향으로 저절로 옮겨가지는 않는 듯하다. 머리로 읽고 지식을 쌓았을지는 몰라도, 마음으로 읽고 삶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 사람을 바꾼다면,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있는 나는 지금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욕망에 출렁거리며, 남을 밟지는 않을지라도 그 의도야 어떠하든 간에 더 많이 갖기 위해 고심하기도 하는 바에야.
그럼에도 나는 책이 사람을 환골탈태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쉼 없이 조금씩 우리를 바꾸어 나간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깨어있기만 한다면, 짐짓 잘난 척하고 자신의 앎이 전부임을 자임하지 않는다면,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조금씩은 더 나아질 것이다. 나는 꼭 그만큼 남들과 다를 뿐이다. 물론 부박한 나는 언제 그 책을 읽었느냐 싶게 다시 원래의 나로 되돌아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책은 삶의 진실에 나를 세울 것이며, 그러면 여느 때처럼 나는 적어도 부끄러움 속에서 그 길에서 조금 비켜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비껴나는 일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 그 부끄러움이 세상을 건사하리라 믿는다.
얼마 전 한 편의 동시를 읽었다.
금 붕 어이 안돌멩이 하나만 넣어주면 안 될까요?나도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어요.돌멩이 뒤에 숨어,아무에게도 나를보여 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김상욱 엮음, 《나도 모르는 내가》, 상상의힘, 2011
이 동시를 읽으면 금붕어의 마음이 환히 떠오른다. 이제 나는 금붕어를 볼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이 녀석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겠구나. 이 어항엔 돌멩이가 있나? 그리고 이 금붕어는 꼭 우리 애들 같네. 우리 애들 또한 아무에게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가만히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겠지. 금붕어와 아이들의 마음 한 켠을 잘 그려냈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시를 읽는다. 이제 이 시를 읽은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금붕어라는 작고 사소한 물고기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물고기가 되었다. 그럼 다음 시는?
개구리 울음소리정승혜객객 객객개구리가 운다누나, 개구리가 왜 객객 울어?- 개구리니까책에서는 개굴개굴 운단 말이야- 그렇게 우는 개구리는 학교 다녀서 그래객객 우는 개구리는 학교 안 다녀서 그래?- 응그럼, 저 개구리도 학교 다니면 개굴개굴 울까?-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할 걸맞아, 그냥 객객 운다고 할 거야─ 김상욱 엮음, 《나도 모르는 내가》, 상상의힘,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