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태학과 식민주의: 일국주의적 오류
좋은 삶 개념이 근대 이후에 실종된다면, 논의방향은 당연히 과거에 존재했던 좋은 삶 개념들을 복원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저자들은 현 국면에서 목적을 상실한 성장 제일주의에 반기를 든 두 가지 당대적 시도, 즉 행복경제학과 심층생태학에 대한 검토를 거친다. 내 의견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행복경제학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은 타당한 면이 더 많지만, ‘조금’ 편파적으로 보인다. 저자들의 좋은 삶 개념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기초를 둔 것으로, 좋은 삶이란 욕망의 크기뿐만 아니라 질적 내용까지 고려한 ‘객관적’ 상태로 파악한다. 그러니만큼 ‘행복 = 쾌락의 극대화’처럼 수식으로 표현하는 제르미 벤쌈Jeremy Bentham 유형의 공리주의적 접근이나, 설문조사 방식의 ‘자기보고’self-report 기법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심리적 주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행복경제학은 행복지수를 수치화할 때 주관적 만족도뿐만 아니라 주거, 환경, 교육 등 객관적 여건까지 따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수량화’에 따라붙는 물신화의 위험을 잊지 않는다면, 행복경제학에도 사줄 점이 좀 더 있지 않을까?
행복경제학과 비교할 때 저자들의 심층생태학 비판은 심각한 검토가 필요하다. 저자들 주장에 따르면 환경주의자들은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낭만적 신념을 표출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그들의 예측은 불확실한 가정에 근거하고 있고, 그조차도 여러 가능한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유형을 들고 나와서 공포를 이용해 사람들을 동원하려고 한다. 저자들은 지구온난화의 위험 정도는 우리가 “모든 노력과 자원을 집중해야 할 정도의 재앙”이 아니며, 탄소방출 규제도 지금부터 “점진적으로” 하자고 주장한다. 저자들 주장처럼 환경적 재앙은 예측하기 어렵다. 물론, 현재 환경주의자 쪽의 주장은 저자들과 정반대이다. 현재의 ‘과학’ 또는 ‘과학자 집단’은 결코 생태주의자에 우호적이지 않으며, 지구온난화의 원인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재의 과학계는 성장주의에 침윤된 정치가들의 ‘앉아서 기다리자’는 태도를 은근히 지원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문외한으로서는 어느 쪽 주장이 사실에 가까운지 판단이 불가능하다. 다만 나로서는 저자들의 주장이 두 가지 점에서 불안하다. 하나는 저자들이 환경주의자들은 고귀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솔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점이다. 알게 모르게 저자들 또한 과학적 비판보다 윤리성에 기대 비판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또 하나는 저자들이 성장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성장주의에 대해 연연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저자들은 아담 스미스가 활동했던 시대와 달리 지금의 문제는 희소성이 아니라 풍요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그는 현재의 영국이 ‘좋은 삶’을 달성할 수 있는 물적 풍요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삶을 구성하는 여건을 달성하려면 ‘단기적 차원’에서는 아직 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이 부분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번역본에 따르면, 마지막 문장은 [성장보다 좋은 삶으로 정책이 변화해야 하며] “이러한 변화를 위한 시간은 무르익었다”라고 말한다. 원문을 대조하니, ‘무리익었다’보다 ‘이미 지났다’overdue라고 더욱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영국의 상황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성장이 더 필요하다는 인식도 분명 가지고 있다.
내가 이 지점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우선, 저자들이 심층생태학을 윤리적 차원에서 비판하는데, 그 이유가 영국의 현 상황이 다소의 성장을 필요로 한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 바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들에게 ‘일국주의적’ 사고의 혐의가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자신들 이론이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조건이 충족된 국가”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하며, 저작의 말미에서 “세계의 최빈국들이 우리가 이미 달성한 충분함의 수준까지 따라올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까놓고 말하자. 순진하다 못해 나로서는 저자들 의도의 진정성까지 의심할 뻔 했다.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세계체제론으로 일국주의 사고를 넘어선 때가 언젠데 아직 영국의 풍요와 빈국의 가난을 분리시켜 생각한단 말인가? 선진국 발전이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력 향상 못지않게 후진국 가용자원을 헐값에 남용한 점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저자들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성장에 기초한 철학’에서 ‘시장에 기초한 성장철학’─그러니까, 신자유주의─로 넘어갔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저자들 역시 신자유주의 대두를 설명하면서 ‘석유위기’를 주요한 원인으로 들고 있다. 이는 1950, 60년대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가능했던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랍국가의 지하자원이었다는 말에 다름 아닌가? 영국은 1932년에 이라크에서 철수하면서도 이라크 석유의 독점적 소유와 군사시설 사용권한은 계속 붙들고 있었고, 1956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전쟁에서 패하고 2년이 지난 1958년에야 비로소 이라크에서 철수하지만 이때도 석유회사 소유권은 놓지 않았다. 1972년 싸담 후세인이 이라크 석유회사를 국유화함으로써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런 후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서 심층생태주의를 비판하면서 저자들은 현재의 환경운동이 ‘진보적’ 운동으로 수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빈민을 현재의 빈곤상태에 그대로 두고 싶어하는 의도”을 숨기고 있다고 다른 곳에서 슬쩍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단기적 이윤을 목표로 한 선진 자본의 무절제한 개발로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사례가 제3세계의 산하와 토착주민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저자의 비판에 마냥 찬성하기 어렵다.
저자들의 일국주의적 순진성은 영국경제의 발전과정에 대한 논의에서 식민주의의 역사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약점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제 현실의 분석과정에서도 상당한 오류를 낳는다. 또한, 저자들은 개념과 담론에 지나친 역능을 부여하는 관념론적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저자들은 20세기에 복지국가 수립이 가능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좋은 삶’의 이념이 편린으로나마 남아있었던 여러 사상들─카톨릭의 가르침, 뉴 리버럴리즘, 사회민주주의. 후생경제학 등─의 결합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좋은 삶’에 대한 언어 상실, 즉 개념 상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50년부터 1975년 사이의 25년 동안 이루어진 주된 업적으로는 지속적인 완전고용의 유지, 누진소득세 부과를 통한 불평등의 감소, 사회보장의 대폭적인 확대, 평화의 보존을 들 수 있다. (중략) 이 기간 내내 경제성장은 다른 무엇보다 최우선시 되는 독자적인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 여러 정책들이 전체적으로 혼합되어 발생하는 부산물로 여겨졌다. 이 속에는 모든 계급의 실질적인 생활수준 개선을 기초로 한 강력한 사회적 결속이 있었다.
이 기간의 정치경제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기본재를 실현하는데 감탄할 만큼 잘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그것이 이러한 측면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언어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1970년대에 서구 사회가 직면한 경제적 사회적 난국을 견뎌내지 못한 주된 이유이다.(310)
과연 그럴까? 오히려 이는 담론에 지나친 능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산업혁명으로 낭만주의가 대두하지, 낭만주의가 산업혁명을 추동했는가? 일반적으로 1970년대의 위기는 일반적으로 전후자본주의의 성장이 한계에 봉착한 결과로 설명한다. 완전고용에 가져온 노동기율의 이완과 생산성 저하, 거기에 석유위기가 겹쳐 2차대전 후부터 지속되던 경제성장이 지체되면서 성장의 파이는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된다. 이로 인해 오래 동안 자본과 노동 간에 유지되던 계급적 담합이 깨지고, 광산, 철도 노동자들의 분규 폭발과 대처의 강경진압으로 이어진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70년대 이후의 난국의 주된 원인을 언어상실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여기에 대해서는 Phlip McMichael, Development and Social Change : A Global Perspective 를 참조할 것. 조효제가 『거대한 역설: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로 번역하였다.
더구나, 언어는 거기 있었고, 그것도 스키델스키 부자가 위에서 언급한 전통보다 더욱 강력한 언어적 전통이 거기 있었다. 당시 E. P. 톰슨E. P. Thompson,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 에릭 홉스봄Eric Hobsbaum이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내내 워즈워스, 콜리지, 카알라일, 러스킨, 아놀드, 모리스, 그린, 20세기의 엘리어트, 리비스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와 사회의 전통’이 있었다. 나 자신 이 전통에 대해서 “영국 사회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미증유의 급격한 변화와 분열에 봉착했을 때 일단의 지식인들이 이전에 경작耕作을 의미했던 ‘CULTURE’를 ‘삶의 내면적 과정’을 지시하는 용어(그러니까, 문화 혹은 교양)로 추상화시켰고 이런 추상화를 통해 외면적, 사회적 삶(그러니까, 산업화 및 산업화와 조응하는 공리주의적 태도와 행동)을 비판하면서 당대의 역사적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예를 들면 이 전통의 중심에 위치한 매슈 아놀드는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화는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완벽함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된 것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즉, 문화는 완벽함에 대한 연구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순수한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적 열정의 힘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함께 선행을 하려는 도덕적 사회적 열정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의 완벽함에 대한 갈구”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사심 없는 객관성‘을 성취한 것이며, 아놀드는 이 사심 없는 객관성을 정치적 전망으로 발전시킨다. 그런데, 인간의 완벽함이나 사심 없는 객관성은 아놀드가 (좋은 삶의 개념이 살아 있는) 그리스 문명에서 직접 받아온 개념이다.
요약하자. 저자의 의도는 말할 바도 없이 윤리를 상실한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지배가 야기한 고통을 목도하고, ‘좋은 삶’의 개념을 되살려 성장의 목적을 상기시킴으로써 사회발전의 방향을 되돌리려는 것이다. 나 자신 저자들의 의도에 십분 공감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등장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에는 학적 엄밀성을 결여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 환경론에 대한 윤리적─그러니까 비본질적─비판, 전지구적 전망의 결여로 인한 정치적 순진성은 적잖이 아쉬웠다. 저자들의 언어적 역능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적잖이 역사적 해석의 실패와 연관이 된다는 점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