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강의실에서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독서토론이 열렸습니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부자의 저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부키)를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송승철 한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발제로 시작하여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와의 대담, 시민 토론에 이르기까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래에 송승철 교수의 발제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1. 경제학과 철학의 결합: 인문학이 사는 길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를 논할 때 맨 먼저 눈길을 끄는 대목은 경제학자 아버지(로버트 스키델스키)와 철학자 아들(에드워드 스키델스키)의 공동저술이라는 점일 것이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아담 스미스 이후 ‘정통’ 경제학은 윤리적 문제를 괄호 속에 넣었고, 이 경향은 과학과 중립성의 이념 아래 강화된다. 이제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나 맬더스는 물론이고, 폴라니나 케인즈조차 한물 간 이론으로 간주하고 텍스트로는 읽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떤가? (탈)구조주의의 부상 이후 철학저서의 지독한 난해성은 일단 논외로 치차. 하지만 내용도 한결같이 급진적이다. 과격한 것도 정도 나름인데, 푸꼬, 라캉, 들뢰즈, 아감벤 등 철학의 대가들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자본주의 억압체제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니, (사회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식의 제스처를 넘어) 우리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얼마 전 노엄 촘스키가 지젝에 대해 "난 여러 음절을 조합한 화려한 용어를 쓰면서 마치 무슨 이론이 있는 척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중략) 지젝은 그 극단적 사례이다. 그가 하는 말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라고 말한 적 있다. 이 발언은 지젝이 어려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실 차원의 발언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당신의 이론이 현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비판적 의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저작의 큰 장점이라면 당연히 경제적 현실과 윤리적 의제의 만남이고, 게다가 (이질적 학문간 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당연히 요구되는 미덕으로) 일반 독자도 이해할 수 있는 가독성까지 주어졌다는 점이다.
저작의 논지에 대해서는 이제 거칠게 요약하며 검토하겠지만, 그전에 인문학 전공자로서 나는 우리 학계가 이런 유형의 저작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사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최근 나 자신, ‘위기’에 처한 인문학의 부흥을 위해서는 현재의 폐쇄적 ‘전공인문학’을 일반독자와 소통하는 ‘교양인문학’으로 전화할 필요성을 발표한 적 있다(인문대를 해체하라!: ‘전공인문학’에서 ‘교양인문학’으로?). 그러니까, “인문학이 진정으로 교양인문학이 되려면, 그러니까 근본적 차원에서 융합을 지향한 간학문적 체계를 구축하려면, 인문학 교수자를 채용할 때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등 다른 전공자에게 강의할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선발해야” 한다. 커트 스펠마이어는 『즐거운 인문학』에서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물리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생태학자 래이철 카슨Rachel Carson, 페미니스트 수전 펄루디Susan Faludi 등이야말로 진짜 인문학자인데 정작 인문학자들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나로서는 지금 인문학이 위기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진짜 위기라면 인문학자들은 실용성 부족으로 퇴출 위기에 놓인 한계전공의 유지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일반독자를 포함한 인문학 비전공자를 공히 설득하려는 태도가 기사회생의 전략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교양교육의 강화도 그런 전략의 하나일 것이다. 현재 대학에서 교양교육이 부실해진 원인 가운데 하나는 신뢰할만한 교양서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이런 점에서도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인문학자들에게*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 인문학자들은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는 수장문서를 뒤져서라도 찾아 읽지만, 정작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한 ‘책’을 읽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2. 근대경제학의 꼼수: 탐욕에서 사익으로
1930년대는 경제공황,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위기,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두로 기록된 시대인데, 논의의 출발은 이 시기의 모두에 케인즈가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을 논한 소품 에세이이다. 이 에세이에서 케인즈는 100년 후 2030년이 되면, 생활수준은 4-8배 상승하고 노동시간은 하루 3시간으로 단축되면서, ‘예술가적인 자발적이고 즐거운 삶’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예견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유토피아적 꿈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담고 있는데, 현대 국면에서 보면, 케인즈 예견 가운데 생산성 부분의 예측만 타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에 반해 노동시간 감축은 불과 15%이고, 무엇보다 ‘좋은 삶’ 부분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가 되었다.
케인즈의 예측이 틀리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으로부터 저자들은 일반 경제학 개설서와 다른 답을 찾기 시작한다. 흔히, 오늘날 삶이 척박해진 이유로는 완전고용으로 인한 노동기강 해이, 세계화로 인한 경쟁심화, 전지구적 자원고갈 등이 거론된다. 그런데, 저자들은 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로 우선 노동 자체가 주는 만족감(뒤집으면 여가에 대한 두려움), 실질임금의 사실상 하락이라는 노동자의 상황을 말한다. 하지만, 이 두 요인은 부차적이고, 일차적 이유는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욕구의 무한성’과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구의 상대성’ 때문이다. 케인즈는 인간의 욕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물적 ‘충족“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여가를 선택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케인즈는 자본주의가 엄청난 욕구를 새롭게 창출한다는 사실을 깜박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는 욕구wants와 필요needs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일까? 정말 케인즈가 이걸 몰랐다고 믿어야 할까?)
그러므로, 문제는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우리 인간의 근원적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체제이다. 첫 번째 문제는 근대 이전 거의 모든 문명에서 고민했던 문제인데, 결국 좋은 삶을 위해서는 ‘욕구’ 자체를 제한하거나 순치해야 한다는 태도로 귀결된다. 축재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으므로, 욕구의 제한은 좋은 삶을 위한 필연적 전제이자 동시에 좋은 삶을 구현할 정신적 자원 혹은 덕목이 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괴테의 작품명을 빌어서 ‘파우스트적 협상’이라 명명한 근대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우리는 이 귀중한 덕목을 잊어버렸다. 하긴, 얼마나 있으면 만족할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영원히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생애 동안 자신이 번 돈의 1%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될 재벌들조차 만족하지 않는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성이 높아졌고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모두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로 인해 욕망의 무한궤도 속으로 포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도래 이전의 세계에서 재산은 단지 좋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노동은 그 조건을 현실화시키는 고단한 활동이었다. 당시에는 재산의 무한축적을 지시하는 개념은 ‘탐욕’이었고 탐욕은 그 자체로 죄악이었다. 저자들이 말하듯 ‘탐욕 = 악덕’은 지금 잊혀진 개념이다. 우리는 천문학적 재산을 가진 재벌들을 언급할 때 재산축적과정의 불법성을 비난하지 재산의 과다소유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에서는 한도를 넘는 축적 자체가 죄악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