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읽을까. 책을 읽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다면 우선 신문을 읽는 것도 좋다. 현대인들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에 허우적댄다. 하루에 두세 시간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만 본다. 실제도 대학생들조차도 대개는 스포츠와 연예 섹션만 클릭해서 보기 일쑤이다. 그런 경우 아무리 많은 시간 들여다봐도 결국 똑같은, 혹은 비슷한 얘기를 이리저리 서핑하면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에 반해 신문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유리하다. 첫째, 신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면목들을 보여준다. 물론 그걸 모두 다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목만 눈을 맞추고 지나가도 대략 지금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경제면이나 국제면은 건너뛰더라도 차츰 그 섹션도 읽게 된다. 신문 읽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둘째, 신문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균형 있는 시야를 마련해준다. 어떤 사안이나 사건에 대한 일정한 기간의 변화와 추이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의 개념을 갖추게 되고 공간의 시야도 넓어진다. 그것은 곧바로 가정에만 갇히지 않고 보다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마련해준다. 셋째, 신문은 활자에 대한 친숙도를 높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딱딱하거나 길지 않은 호흡의 일상어들이기 때문에 ‘읽는 일’에 대한 불편함이나 두려움을 감소시켜줄 수 있다.
어느 정도 활자와 친숙해지면 서점에 나가보자. 10% 할인 매력 때문에 인터넷으로 주문하지 말고 직접 서점에 나가서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훑어보면서 나의 지적 호기심을 끄는 분야와 책을 선택한다. 도서정가제 때문에 10% 더 부담한다거나, 교통비, 시간의 낭비가 있다고 꺼릴 게 아니다. 내 눈으로 책들을 훑어보면서 읽어보고 선택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자산이다. 그런 게 모두 무형의 자산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 일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골고루 읽을 것인지, 어느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모아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자. 두 가지 방법 모두 좋겠지만, 만약 내가 책을 통해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앎을 얻고 싶다면 한 분야의 책을 잘 골라 10권쯤 읽어보라.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 분야의 전문가의 시선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문에서 대개 주말에 배달되는 신문의 북섹션 지면도 유심히 읽어보라.
책을 고를 때 그냥 눈길 끈다고, 혹은 광고에서 눈 익었다고 불쑥 집지 말고 차분히 둘러보라. 그리고 제목을 보고 자신의 관심과 일치하면 잠깐 제목과 내용을 유추해보라. 그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상상력의 훈련이 되고, 논리적 책 읽기의 습관을 길러주는 토대가 된다.
독서력이 혁명이다!
미국 리터러시 운동 “일주일에 네 번은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도록 하라”
책을 읽어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는 대조 집단에 비해 두 배 정도 높은 것으로 나와 있다.
사실 책 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심리학적으로도 알 수 있다. 인간이 문자를 만들어낸 것은 길어야 5백 년에 불과하고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극소수 지배자들에 불과했다. 일반 대중들이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었다. 그러니 고작 길어야 4~500년에 불과하다. 책 읽는 유전자가 형성될 수 없다. 그래서 책 읽는 일은 의외로 괴롭고 부자연스럽다. 책을 읽는 데에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 시기를 놓치면 평생 책과 멀리하게 되고 책을 멀리하는 삶은 대개 성공이나 행복과 거리가 멀기 쉽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읽는 일에 힘써야 하고 특히 자녀들에게 그런 습관을 길러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운동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 삶이 어떻게 바뀌는가? 왜 책이 필요한가? 앞서 언급했지만 다시 한 번 요약해보자.
1. 책 읽고 쓰는 능력은 경제적 능력의 향상과 자립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모든 분야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수집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보다 나은 기회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다.2. 독서는 결국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증진시킨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판단하고 참여하는 능력의 시민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3. 책은 상상력, 비판력, 사고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창조력을 증진시킨다.
그러므로 책은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힘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혁명은 바로 독서력 혁명이다!
기적의 도서관이 낳은 기적
진짜 혁명은 섹시하게 전개된다!
2003년 11월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이 세워졌다. 시민단체인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이 MBC 문화방송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과 함께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최초로 설립한 어린이전용도서관이다. 어린이전용도서관은 아이들에게 마음껏 책을 읽고 생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기적을 낳았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기적의 도서관이 확대되고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도정일 교수가 2001년 한 잡지에 글을 올렸다. ‘시카고의 앵무새 열풍’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2001년 8월 25일부터 7주간 시카고 공공도서관이 시민 모두가 ‘함께 읽을 한 권의 책’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선정하고 리처드 델리 시장이 직접 나서서 시민 참여를 호소해서 시 전체가 ‘앵무새 열풍’에 휩싸였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했다.
시카고는 왜 그 책을 읽자고 했을까? 그것은 시카고가 심각한 인종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바로 이 소설을 모두 함께 읽자는 것이었다. ‘책 읽는 시카고’를 만드는 데에 들어간 비용은 고작 4만 달러였다.
이른바 ‘one book one city'라는 이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건 1997년 시애틀 공공도서관 직원 낸시 펄이었다. 그 발상이 미국 여러 도시로 파급되었고 시카고는 시장까지 나서서 대대적인 독서운동을 벌였다.
그 칼럼을 읽은 당시 MBC의 김영희 피디가 영감을 얻어 일종의 공익성 예능 프로그램이 바로 ‘느낌표’였고 ‘책, 책, 책, 책을 읽자’라는 캠페인이었다. 전국은 일시에 독서 열풍에 빠졌다. 선정된 도서의 출판사와 저자들도 큰 혜택을 보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좋은 일에 쓰자고 서로의 이익의 일부와 각자의 재능을 기부한 것이 바로 ‘기적의 도서관’이었다. 그 최초의 결실이 바로 ‘순천 기적의 도서관’이다.‘기적의 도서관’은 최초의 어린이전용도서관이다. 아이들은 새로운 도서관의 모습에 반했고, 거기에서 즐겁게 책 읽는 일에 행복했다. 또한 부모들도 아이들과 함께 그 도서관에 가면서 책과 가까이하게 되었다. ‘순천기적의 도서관’은 순천 시민의 자랑이 되었고, 순천의 문화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혁명이었고, 지금도 이 멋진 혁명은 현재진행중이다.‘ 기적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만들어낼 결실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기적의 도서관’은 처음 세워진 지 10여 년이 넘은 현재 최근 광역도시로는 처음으로 기공식을 연 도봉기적의도서관까지 포함해서 열 개 남짓, 아직 스무 개도 채우지 못했다. 처음에는 반짝 했지만 금세 그 기세가 수그러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을 되살리고 불을 지피는 건 바로 우리 부모들의 사명이다.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바로 엄마의 힘에서 비롯된다.
200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국공립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을 합치면 대략 440개쯤 되었다. 그 도서관들의 1년 도서구입비 전체가 약 250억 원이었다. 그러나 1999년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의 1년 도서구입비는 무려 279억 원이었다. 국가 전체의 공공도서관 도서구입비가 일개 대학의 그것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부끄러운 현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언제까지 이 부끄러움을 계속할 것인가?
기꺼이 고독하라!
현대인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계망을 만들고 싶어 한다. SNS는 그러한 방편에 크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렇다.
그러나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고독은 자율적 고립이고, 고립은 타율적 고독이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니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다. 스스로 고독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고독할 수 있는 방법도, 그 가치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이다.
우선 혼자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누구의 간섭도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을 만들자. 그리고 그 시간을 전적으로 나를 위해서만 쓰자. 그래야 비로소 독서가 가능해진다. 혼자 있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고독은 두려워할 게 아니라 즐기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육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고독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고 연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입시에만 내몰려서 진도 나가기 바쁘고, 인성 교육이나 감성 교육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걸 지원해주는 건 바로 학부모의 힘이다. 학부모들이 그런 교육을 요구하고 지원해야 한다. 대부분 학교에서 인성교육이나 감성교육을 소홀히 하는 건 부모들이 오로지 입시의 결과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러면서도 그 결과가 그리 신통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과감하게 학교가 제대로 교육의 근원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학교 당국도 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백약이 무효였는데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학교 폭력, 즉 집단 따돌림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스쿨 폴리스니 뭐니 하는 방편들을 써보지만 별 소득도 없고, 오늘도 아이들은 교실에서 죽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따돌림을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립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고립과 고독은 다르다. 그걸 가르쳐야 한다. 사실 눈여겨보면 누가 따돌림을 당하는지 대략 알 수 있다. 그 아이에게 조용히 다가가 ‘너는 고립되고 따돌려진 것이 아니라, 고독의 기회를, 독립의 기회를 얻은 거야’ 하며 따뜻하게 껴안아보자. 그러면서 고독할 때 비로소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함께 책을 읽어가면 아이들에게 힘이 될 것이고, 그렇게 책을 읽은 아이들은 이해력도 증진되어 학습 효과도 좋아질 것이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갖는 시선과 지식도 달라질 것이다. 아마 그렇게 1년을 보내면 그야말로 괄목상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기꺼이 고독할 수 있는 태도이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조용하고 의연한 삶이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에서도 가장 잘 나간다는 로펌에서 능력을 발휘하던 변호사 수전 케인은 어느 날 자신을 돌아봤다. 엄청난 보수와 높은 사회적 평판은 얻고 있지만 자신의 삶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변호사를 포기하고 사람들의 모습들을 추적했다. 그녀는 자신이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꼈던 이유를 발견했다. 그녀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강조했다. 수전 케인은 무작정 달려들기보다 차분히 고려하는 기질을 살려내야 개인이, 그리고 사회가 건강해질 뿐 아니라 창의적일 수 있으며 그래야만 진정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용하면서도 의연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인종차별 버스에 항의해서 경찰서에 끌려갔고 버스 보이콧을 이끌어냈으며 결국 인종차별 문제를 전 미국의 문제로 확산시킨 주인공 로자 파크스는 체구도 작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소리만 질러대는 사람들은 정작 타인에 대한 배려도,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려는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성찰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타인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는 태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정신이다. 우리가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조화롭게 실현하고, 성격의 문화에서 다시 인격의 문화를 회복할 때, 그래서 주체적 인격으로서의 나와 정의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 또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 성찰을 통해 연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인문학의 힘이다. 나의 생각이 바뀌고 앎이 바뀌어야 내 삶이 바뀌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찾아야 할 인문학의 힘은 바로 다양하게 생각하고, 여러 가지 앎들을 서로 엮어보고 따져보는 힘에서 시작하면 된다. 그냥 거죽만 보는 게 아니라 이치를 따지고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지금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짚어보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배우고 익히며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여러분들을 더 슬기롭게 해줄 뿐 아니라 참된 용기를 갖게 하며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창의력과 주체성, 그게 바로 인문학의 힘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문학의 힘은 바로 독서에서 계속해서 충전된다.
미국의 문화역사학자인 워런 서스먼은 현대를 인격의 시대에서 성격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진단한다. 성격은 금세 드러난다. 그러나 인격은 오랫동안 형성되고 그 가치를 발현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모두가 조급하게 구니 인격의 문화는 퇴화하고 성격의 문화가 득세한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만으로도 멋진 혁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성격의 문화에서 다시 인격의 문화로 회복해야 한다!
그 시작은 성찰이고, 그 성찰의 내공은 독서에서 길러진다. 사전적 의미에서 성찰은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을 뜻한다. 다른 이의 마음이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찰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주체적 인격의 회복이다. 주체적 인격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성찰을 위해서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찰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성찰은 내가 나 자신이 되는 중요한 과정이고 정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을 인격으로 대면하고 인격으로 대화하고 고민함으로써 부족한 삶을 반성하고 보다 참된 나를 지향하는 힘의 바탕이다. 조용히 물러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부모의 독서에서 혁명을 전파하자
프로이트의 조카이기도 한 버네이즈는 미국 PR계의 대부로 직설이 아닌 은유적 광고의 개념을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미국 공황기에 도서 판매 급감에 직면한 출판업계에서 버네이즈에게 PR을 의뢰하자 그는 영화, 드라마 제작자들을 불러 거실에 책장을 짜 넣도록 요청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서 진작에 기여했다.
책을 읽으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방법일 수 있다.
우리는 서재라고 하면 별도의 방을 책장으로 가득 채우고 거기에 수많은 책을 꽂아둔 공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재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굳이 따로 방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거창하게만 생각하니 주부는, 엄마는, 아내는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엄두를 내지 않는다.
부엌에서 거실 사이에 작은 책상 하나와 책장 하나 마련해서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식탁도 좋은 서재일 수 있다. 다만 음식을 치우면 곧바로 서재로 쓸 수 있도록 벽에 작은 책장을 달거나 작은 서가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손수 책상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이상의 선물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고전으로 삶의 강을 건너자!
시카고대학의 사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대학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카고대학교가 설립된 것은 1890년이다.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동부도 아닌 중북부의 시카고에 대학을 세웠을 때 주목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실제로 1929년까지만 해도 둔재들이나 가는 삼류 대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해부터 괄목상대할 변화를 겪더니 일약 미국의 유수한 대학으로 성장했다. 1929년부터 2000년까지 이 대학의 노벨상 수상자는 일흔 명 남짓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이 변화를 이끈 주역은 바로 ‘시카고 플랜’과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었다. 허친스는 고작 서른 살의 나이에 총장이 되었다. 그는 시카고대학을 통째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책, 특히 고전 읽기를 통해 학생들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인문고전 100권을 달달 욀 정도로 읽지 않으면 졸업시키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이 처음부터 열띤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허친스는 대학을 성장시킬 근원적 힘은 바로 인문고전에서 온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도대체 그따위 것들을 읽어서 무엇에 써먹느냐는 비판이 가장 많았다. 마치 지금 우리들의 풍토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허친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결국 학생들은 졸업하기 위해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인문고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어디 인문고전이라는 게 금세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냐 말이다. 게다가 1929년은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니 한가롭게 그런 책 읽는 게 내킬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전으로 고전 읽기뿐 아니라 수업출석 의무제, 종합시험에 의한 학업평가까지 몰아붙였다. 이 전략은 이후 시카고대학이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지적 자양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위대한 고전 저자들의 사고능력과 정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을 겨냥한 허친스 총장의 ‘시카고 플랜’은 당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그 열매를 거뒀다. 처음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머리에 인이 박히도록 읽어댄 고전의 수가 30권 50권을 넘어서자 점차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시카고대학의 힘은 바로 고전 읽기에서 나왔던 셈이다. 허친스의 교육철학은 그의 조력자이자 파트너였던 후임자인 몰트머 아들러에 의해 지속되었고 시카고대학의 힘이 완전히 구축되었다. 그게 고전의 힘과 매력이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시카고 플랜을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21세기 현실에 맞는 새로운 고전의 이해와 독서가 필요하다. 고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런데 나는 고전은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대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것은 텍스트로서의 답을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내는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진짜 공부의 힘이고 교육의 가치이다. 삶의 강을 건너는 건 바로 나 자신의 힘이어야 한다. 크고 멋진 배가 능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배만 선망한다. 힘들고 매운, 삶과 세상의 강을 건너는 섹시한 배가 바로 고전이다.
자기만의 배를 꿈꾸고 건조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똑같은 배를 누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른바 수월성 교육이라는 망령이 21세기에도 횡행한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의 꿈도, 인생관도, 세계관도 마련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게다가 고전은 너무 묵직하고 너무 다양해서 도대체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르거니와, 학교에서도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까닭에 대부분 외면하고 만다. 그런 교육은 효율 좋은 로봇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자아를 발아시키지는 못한다.
최근 들어 고등학생의 교과 과정에 고전 과목이 추가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그것조차 늘 그랬듯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거나 분석해서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다른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생들은 고전을 하나의 ‘통째로의 지식 덩어리’나 ‘근엄한 지식의 훈장’ 쯤으로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을 읽을 때 지식과 정보의 접근 방식이 아니라 대가의 눈으로 삶과 세상을 읽는 방식을 분유하고, 저자에게 질문하며 나름대로의 해법을 모색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처음에는 불편하고 더디겠지만, 정작 자신의 호흡과 눈으로 소화하지 못한 고전은 자칫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권위 의존적인 성향만 강화되기 쉽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제대로 고전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시대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적 상황을 짚어내며 읽어야 한다. 그것이 빠지고 그저 문서로서의 고전을 문자로만 읽으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해 비교해보면서 읽어야 고전이 나의 삶의 힘이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 대한 기본적 탐구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미 교과서의 여러 과목들을 통해 상당히 많은 지식과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걸 정작 활용하거나 시험 외에 사용하고 융합하는 방식을 훈련하지 않은 까닭에 따로 놀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고전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과 당대의 지식 체계 등을 고려해서 읽다 보면 그게 교과서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고 맥락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며 다른 분야들과 연계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고등학교 과정뿐 아니라 대학 생활과 사회에서의 활동에서도 매우 유익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은 또 하나의 다른 짐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거대한 창이며 동시에 학습의 능력까지 크게 성장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고전을 단순히 오래된 ‘묵직한 옛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한다.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어도 중요한 레퍼런스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고전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고전이 바로 최고의 부교재다! 청소년기에 고전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결코 같지 않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할 것인가!
왜 다시 고전인가?
우리는 그동안 산업화 시대의 그릇된 실용주의적 사고에 젖어 고전의 가치를 망각하거나 심지어 구박해왔다. 그 결과 남이 만들어놓은 건 잘 따라하고 주어진 명령과 매뉴얼은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방기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 세상을 주인으로 바라보는 눈, 내 삶을 내가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생명력을 상실했다. 진정한 실용은 당장 지갑을 두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굽이굽이마다 의연하게 헤쳐 나가는 의지와 지혜이다. 그걸 교과서에서 얻을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에서 얻는가? 물론 그것들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힘이 되겠지만 근원적 힘은 아니다. 그 근원적 힘은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와 지혜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고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난 산업화시대에 교육마저도 균질하고 수준 높은 노동 능력의 배양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결과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은 무시되거나 경시되었고, 사람의 가치도 함몰되었다. 이제라도 그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사람의 가치, 삶에 대한 진정성, 세상을 읽어내는 지혜 등을 갖춰야 비로소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내가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도덕감정론』 등을 제대로 읽어봤다면, 천박하고 탐욕적인 자본주의가 횡행하여 인간의 가치마저 망가뜨리는 지금의 현실을 간과하거나 묵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유주의자들이 걸핏하면 애덤 스미스의 ‘시장의 자율성’ 운운하며 온갖 규제들을 풀어야 한다는 따위의 논리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 고전은 결코 과거에 갇힌 것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 이론을 제대로 읽어보면, 그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당대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 지금 우리의 처지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그 실천의 방안과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읽으라 하면서도 정작 아무도 읽지 않는 게 고전’이라거나,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는 책이 고전’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해학은 그저 웃음으로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고전을 제대로 읽으면 지금, 그리고 미래의 우리 삶의 좌표가 보이고 강을 건널 방도와 힘이 마련된다. 그게 진짜 고전의 힘이고, 고전을 읽어야 하는 당위이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함께 고전을 읽으며 고민도 하고 성찰도 하며 때론 자녀들과 함께 토론하며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은 청소년용 따로 성인용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함께 읽고 생각하며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만 좋으니 보라고 할 게 아니다. 책 읽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 아이들의 학업 성취율이 훨씬 높다는 건 여러 실증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함께 읽는 고전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고전을 다루면서 그 점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할애할 생각이다.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의 책들, 그리고 소수의 국한된 분야가 아니라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고전을 함께 읽고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삶과 세상, 그리고 나와 너의 연대를 깊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저 단순한 교양이나 지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고전에 대한 태도는 금세 고전을 다시 외면하게 만들 뿐이다. 삶으로 투사되지 않는 고전을 만들 것인가, 내 삶을 거대하게 움직이게 할 고전을 만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달렸다.
미래의 독서
미래독서는 시대의 변화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독서방법과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사실 시대의 변화가 새로운 독서방법을 요청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시대가 요청하는 생존과 삶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그래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독서의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독서방식, 그것을 미래독서라고 부를 수 있다.
미래독서는 사회가 변화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 진리가 주는 교훈은 21세기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코드를 풀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의 무한경쟁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래독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대인의 눈을 열어, 다가오는 변화를 준비하고 그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이끌어주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기존의 독서와 미래독서의 본질적 차이점은 미래독서가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생존의 논리를 풀어준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삶의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강조하는 것은 양쪽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창의력이나 단순한 논리적 사고로는 부족하다. 미래사회는 창의력과 논리적 사고 둘 다 요구하기 때문이다.
독서는 분명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생존의 문제와 함께 같은 공간에 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실질적으로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독서다.
지금까지 짧게 살펴본 독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까, 무엇을 얻을까 하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근본적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독서의 방법론적 접근에 앞서 독서의 필요성과 당위, 그리고 기본적 태도와 목적성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독서 지도를 이끌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