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3일 화요일 오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공동주최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화권력의 현재' 긴급토론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명원 경희대 교수와 오창은 중앙대 교수가 발제하고, 뒤이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조영선 변호사,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원옥, 심보선 시인, 정은경 원광대 교수가 토론을 나눴습니다.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화권력의 현재' 자료집에 실린 발제문 전문을 아래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1. ‘신경숙 표절’이라는 문학적 사건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새로운 국면이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까지의 방식이 더 이상 지속 될 수 없게 되었고, 순간적 단절에 의해 새로운 방식의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2015년 6월 16일에 이응준의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이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게재되면서 ‘신경숙 표절 사건’을 발생시켰다.
이응준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김후란 옮김, 『금각사, 우국, 연회는 끝나고』, 세계문학 20, 주식회사 주우, 1983)과 신경숙의 「전설」(『오래전 집을 떠날 때』, 창작과비평사, 1996)에 한 단락을 그대로 비교했다. 그리고 “명백한 절도행위-표절”이라고 했다.
신경숙이 누구인가? 1990년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였고, 지금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 작가이다. 그는 영문판 『엄마를 부탁해 PLEASE LOOK AFTER MOM』에서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고 가장 널리 호평 받는 작가 중 한 사람One of South Korea’s most widely read and acclaimed novelist”라고 소개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국내 문학상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리나페르쉬 상Prix de l’inapercu’과 ‘2011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 부커상을 후원하는 맨 그룹이 아시아 작가들에게 수상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신경숙의 최근작인 『엄마를 부탁해』는 세계 36개국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신경숙의 ‘「전설」 표절 사건’으로 인해 한국문학계가 뒤흔들리고 있다. 우선, 신경숙에게는 그의 문학적 권위가 2015년 6월 16일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신경숙 문학의 최대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문학출판계의 작가 중심의 대응관행도 큰 실험대에 올랐다. 신경숙의 책을 출간했던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도 이전처럼 범상하게 독자를 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렇다할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지만,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도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문학의 대표 상징인 신경숙과 대표출판사들의 상징적 권위가 유리창의 균열처럼 이지러지자, 한국문학계 전체에도 그 책임 공방이 확산되고 있다. 그간 신경숙 표절에 대해 침묵해 왔던 문학계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고 있고, 한국문학 시스템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한국문학계 전체에도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는 ‘새로운 문학적 사건’과 대면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 개인에서 기인한 문학적 사건이 이토록 뜨거운 ‘들불의 불길’로 화해 한국사회 전체를 덥혔던 적이 근래에 없었던 것 같다.
‘신경숙 표절’은 ‘묻혀진 것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숙 문학이 1990년 문학에 국한되지 않고 2000년대 문학으로 평가되던 즈음 표절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미 이뤄졌다. 한국문학계에서 제기되었고, 뜨거운 공방이 이뤄졌었지만 무시되었다. 이미 알려져 있지만, 그 중심에 박철화, 정문순, 김명인, 이명원 등이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에 기반해 이응준이 작심하고 새로운 성찰을 제기한 것이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이응준의 용기 있는 발언이 있었다.
2. 문학적 상징권력은 어떻게 ‘신경숙 표절’을 옹호했나
1990년대 문학은 ‘내성의 문학’ 혹은 ‘여성문학’의 시대로 불리며 대표작가로 공선옥·공지영·신경숙·은희경이 거론되었다. 1980년대 거대 변혁 담론의 퇴조와 개인의 내밀성에 대한 관심이 이들 작품의 가치를 돋보이게 했다. 특히 신경숙은 1990년대 문학담론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고, 그 후견인 그룹에 <문학동네> 동인들이 있었다. 신경숙과 <문학동네> 동인 그룹의 만남은 1990년대 문학의 내밀성이 ‘자유’와 ‘개인’과 연결되는 지배담론이었다. 이 1990년대 담론의 문학적 실체였던 신경숙이 2000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문학적 전투가 펼쳐졌다. 1990년대 문학적 성과를 2000년대로 이으려는 진영과 새로운 문제제기를 통해 기존 질서의 문제점을 제기하려는 진영과의 전투였다. 현재의 결과가 증거하듯이 <문학동네> 동인의 승리가 이어졌고, 문제제기를 했던 박철화·정문순·김명인·이명원의 목소리는 묻혔다.
박철화가 <작가세계> 1999년 가을호에 게재한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 –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의 경우」는 신경숙에 비판적인 글이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는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둘 사이에 별다른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예민한 문제”라고 했다. 최윤의 「회색 그림자」와 윤대녕의 「3월의 전설」이 연상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불문학을 전공한 박철화의 문제제기이니 신경숙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경숙의 「작별인사」가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의 표절이라는 문제제기를 했다.1) 한겨레신문사 최재봉 기자는 『딸기밭』이 91년 숨진 재미유학생 안승준의 유고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를 표절했음을 밝혔었다.
정문순은 <문예중앙> 2000년 가을호에 실은 「통념의 내면화, 자기 위안의 글쓰기」에서 그간 발생한 신경숙 표절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여 공박했다. 그리고 “1995년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 실린 「전설」이 일본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학원사, 김후란 옮김, 1984)의 표절작”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정문순은 당시 다음과 같은 언급을 구체적으로 한 바 있다.
일제 파시즘기 때 동료들의 친위쿠데타 모의에 빠진 한 장교가 대의를 위해 자결한다는 「우국」의 내용과, 한국전쟁 때 한 사내가 전쟁터에 자원입대하여 실종되는 「전설」은, 남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남은 아내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점에서 주요 모티브부터 유사하다. 「우국」의 아내는 남편 따라 죽는 데 일호의 주저도 없으며, 「전설」의 여자는 남편의 실종 통보를 받고도 평생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보낸다. 또 10여 개의 비슷하거나 거의 동일한 문구는 물론이고 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 역순적 사건 구성, 서두에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전개 방식 등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나 영향 관계로 해석될 여지를 봉쇄해버린다.2)
「우국」과 「전설」의 단락간 유사성과 문장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이미 구체적 실물로 제시되었다. 내용적으로 상관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정문순의 글이 적절한 증거로서 유효하다. 정문순은 상황설정과 신혼부부 관계, 모티프 등의 틀이 “우연의 일치나 영향관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적절하고 유효한 문제제기가 박철화·정문순 문학평론가에 의해 이뤄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명인은 정문순의 글을 언급하며 “「전설」과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의 유사성”은 “‘신경숙 신화’의 어두운 이면”이라고 다시 한번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3) 이명원도 이미 2001년에 마치 지금의 사태를 예견한 듯 “신경숙은 일급의 작가에서 표절작가로 하향이동하는 ‘변신’을 몸소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했다.4) 신경숙은 자신의 문학을 ‘필사筆寫’라는 훈련 과정을 거쳐 도달한 성취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5) 하지만, 필사의 훈련 작업이 문학적 알리바이로서 동원될 수는 없다. 육화되지 않은 문학언어는 영향관계가 아닌 명백한 표절이기 때문이다. 이명원도 "표절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정신의 식민화’인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이명원의 지적은 이미 2001년에 이뤄졌다.
박철화, 정문순, 김명인, 이명원의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숙의 문학은 19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으로 상찬되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국문학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신경숙의 표절 사건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학 제도에 대한 성찰의 문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신경숙 작가 표절 사태와 문학권력을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1990년대 출판상업주의와 동인과 에콜 중심으로 작동하는 문학권력의 폐쇄성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한국문학은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사회>, 그리고 <세계의문학>의 질서 속에 <문학동네>가 새롭게 문학의 상징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었다. <문학동네>는 ‘신경숙 신화’의 주역이었다. 중요 문학출판사는 문예지를 중심으로 문학생산의 토대를 장악했다. 신인문학상 제도를 통해 ‘등단제도’를 장악하고, 자기 매체 출신의 작가를 양성한다. 이들 신인작가들은 중요 문학출판사들이 운영하는 계간지들을 통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세계의문학> 등이 판매부수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발간되어야 하는 매커니즘이 여기에 있다. 또한, 문학상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문학적 권위의 상징을 독점하고 있기도 하다. 문학상을 수여한 작품을 단행본으로 발간하고, 또는 자기 매체 출신의 작가의 문학단행본을 간행함으로써 문단의 질서가 고착화된 것이다.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민낯을 드러낸 것은 한국문학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출판상업주의가 문단의 작동 매커니즘이 되면서, 문학권력의 안과 밖이 사라졌다. 건강한 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부상하는 전복적 흐름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문학적 신념에 따라 작가들의 이합집산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문학 질서는 창비냐, 문학동네냐, 문학과지성사냐와 같은 출판사 소속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다보니, 지금의 문학권력 질서 바깥의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신춘문예냐 문예지 신인상 수상이라는 등단 질서만 통과하면, 그 이후에는 한국문학 내부자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온당한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등단 질서를 통해 진입하는 절차는 가혹하고, 일단 진입이 이뤄지면 표절과 같은 보편적 상식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마저도 용서되는 상황은 심각한 문제를 파생한다.
3. 한국문학 제도의 폐쇄성 비판
문제는 문학장의 폐쇄성이다.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새물결, 2005)에서 이야기했듯이 문화권력은 ‘포함과 배제’, 그리고 전복과의 경합과정에서 자신의 상징권력을 구축한다. 문학권력 내부에서 작가양성과 매체발간, 문학상 수여와 단행본 발간까지 이뤄지다보니, 독자와의 관계 보다는 내부적 질서가 우위에 놓이게 된다. 이 질서의 ‘신화적 상징’이 바로 신경숙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권력의 폐쇄성은 이번 ‘신경숙 표절 사건’에 ‘창비’가 대응했던 방식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6월 17일 <창비 문학출판부의 입장>이라고 발표된 글에는 ‘전문가적 언어’로 포장된 권위주의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말하면서, “성애에 눈뜨는 장면 묘사는 일상적인 소재인데다가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표절시비에서 다투게 되는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도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이 글 작성자의 곤혹스러운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며, 문단의 전문가주의를 앞세워 독자의 상식적 판단을 억압하고 있는 언술이다. 이 글에서 “비교하기가 아주 어렵다”라는 표현을 정상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유사성이 (거의) 없다”가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확신을 담을 수 없기에 ‘언어적 굴절’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이라는 표현도 ‘표절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먼저 앞세운 상태에서 근거를 제시하려는 상황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창비가 신경숙의 표절을 명백히 옹호하려는 의도에서 발표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날인 18일에 창비 대표이사 강일우의 명의로 발표한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도 “내부조율 없이 적절치 못한 보도자료를 내보낸 점을 사과드립니다”라고 하면서도 “지적된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했다. '표절 판단을 유보하겠지만, 문제제기의 타당성은 있어보인다'는 의미로 해설될 수 있는 어구이다.
이는 명료한 단락 비교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기대치에도 못 미치는 창비의 유보적 태도로 볼 수 있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부인이 더 큰 문제였음은 물론이다. 신경숙은 차라리 ‘자신의 필사훈련 관행으로 인해 빚어진 20여년 전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문학을 처음 시작했던 때의 감격적인 감정을 토로하던 신경숙 초기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의 어조에 비춰 볼 때, 지금의 신경숙은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은 위치에 서 있는 듯하다. 초심을 잃은 신경숙의 두려움이 자신의 상황을 더 큰 나락으로 내몰고 있기에 작가 자신의 용기가 문제해결의 정점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문학은 시민사회와 함께 존재하는 공동의 자산이다. 문학이 폐쇄적 형태로 자기 세계를 고집할 때, 전문직업주의의 폐해가 문학을 더욱 고립적인 상태로 내몰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전문직업주의가 현대사회의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와 비서구 세계를 막론하고, 오늘날 지성인에 대한 특별한 위협은 학문기관도 아니며, 도시교외도 아니며, 저널리즘과 출판사들의 전율스러운 상업주의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로 부르고자 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다.”6)고 했다. 오로지 전문가로서 자기영역의 작동만 우선시 하는 태도가 오히려 시민 민주주의의 문제와 같은 보편적 문제도 외부의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다. 전문직업주의는 '문학의 문제는 오로지 문학인들이', '문학 자체의 존중을 위하여' 같은 태도의 근거가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러한 태도가 "비논쟁적이고, 비정치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강조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문학의 현재 상황도 혹시 작가라는 보편적 지성의 열림이 아니라, 문단 질서에 안존하는 전문직업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4. 문학권력의 외부를 상상하자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 문학의 작동 매카니즘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위해 무엇을 다시 점검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렇듯 폐쇄적이고 자기 아집적인 문학권력의 작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한국문학의 장場에서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
자기 합리화는 자기 바깥은 상상하지 못했을 때 그 굴절 현상이 더욱 극심하다. 문학권력의 작동이 내부의 시선을 중시하고, 시민적 합리성을 도외시하는 사태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식이 갖고 있는 지성적 열림마저도, 작가적 전문직업주의에 갇혀 ‘문학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있다.
지금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제기되는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는 한국 문학의 질서가 특정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착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출판상업주의가 만들어내는 신화에 대해서보편적 상식에 입각해 이뤄지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특별한 자본권력을 형성하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문학은 중요한 상징이다. 상징적 의미가 문학권력의 자기 질서화나, 시민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문학상품 생산으로 고착화될 때 대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시점에서 다음 몇가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문학상업주에 대한 준엄한 자기성찰과 극복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문학출판에서 문학적 권위를 점유하고 있는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는 실제로 출판상업주의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각 출판사들이 자신만의 문학적 색채를 가지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면, 지금은 출판자본의 이익이 우선하는 양상이다. 신경숙 작가는 이 세 출판사를 번갈아가며 소설을 간행했다. 처음 신경숙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소설을 출간했다. 초기작인 『풍금이 있던 자리』 가 그렇고, 이후 『딸기밭』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이후 신경숙은 『외딴방』 『리진』 『깊은 슬픔』 『바이올렛』 『종소리』 등 대부분의 작품을 문학동네에서 출판했다. 이번에 표절문제가 된 『감자먹는 사람들』과 『엄마를 부탁해』는 창비에서 간행했다. 한 작가가 문학적 경향이나 지향과 상관없이 출판사를 번갈아가며 출간하는 관행은 한국 출판상업주의의 현재를 가늠하게 하는 슬픈 풍경이다.
출판상업주의가 문제인 이유는 현재의 대중성만을 중시하는 시장중심의 질서 때문이다. 앨런 S. 케이헌은 출판상업주의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훌륭한’ 욕망을 배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써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는 언급을 한 바 있다. 즉, “이미 표현된 욕구를 만족시킬 뿐, 필요한 욕구가 어떤 것인지, 또는 어떤 욕구가 더 값어치 있는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7) 출판상업주의에 경도된 문학은 오로지 현재의 욕망만 요동치는 문학이다. 신경숙 문학이 『외딴방』 이후 『엄마를 부탁해』에 이르러 더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는 주장에는 결단코 반대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더 가치있는 문학’으로 진전된 성취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훨씬 유려한 형태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을 뿐이다. 이러한 관행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문학권력의 폭력이다. 이러한 문학권력의 작동 아래에서 도전적이고, 전복적인 젊은 문학정신의 탄생은 점점 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둘째, 문학의 역할에 대한 자기 성찰이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심각하게 제기될 필요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자리에 스스로를 놓는 것과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무거운 것일 수밖에 없다.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인해 한국문학의 문단 질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는 신경숙이라는 ‘한국문학의 대표적 권위’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의 표출일 것이다. 한국의 대형출판사들이 연합해 ‘한국 대표작가’를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경숙 신화’의 실체이다. 그 근본에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있으며, 문학작품을 국가의 대표상품으로 간주하려는 굴절된 관념이 자리한다. 또는 한국문학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와야 한다는 욕망이 ‘신경숙 신화’를 가능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는 항상 동시대적으로 토론되고 논쟁되어야 할 의제이다. 서효인 시인은 최고의 작가를 만들어 한국문학의 대표적 상징을 만드는 것보다는 ‘1만명의 독자를 가진 50명’의 작가가 있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문학은 대표적 상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학적 상징이 향유되는 감성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해야 온당하다고 본다.
셋째, 신경숙 표절 사건의 이면에는 비평의 무기력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비평의 위기와 무능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위기가 바로 비평의 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학비평이 특정 출판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황에서 한국문학의 자율적 검증작업은 공백지대로 방치되어 있다시피 하고 있다. 문학비평이 표절에 대한 검증을 하고, 문학권력에 대한 적극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비평은 문학의 역할에 대한 온당한 담론도 적극적으로 제기해 힘있는 물리력으로 변화하게 할 수 있는 역량을 못 갖추고 있어 위기와 무능 상태에 처해있다. 이는 나를 포함한 비평가들의 책임이 크다. 한국문학에서 상징권력은 담론과 자본, 그리고 공고화된 문학적 권위가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담론을 담당하는 비평가들의 진지한 성찰이 더 크게 요구된다.
넷째, 한국문학에는 표절과 같은 문학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한 사건에 대한 징계 시스템이 부재하다. 표절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문학 내부의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적 합의에 입각한 표절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징계를 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문인단체를 중심으로 한 논의도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경숙 표절 사건은 한국문학의 존재조건을 바꿔 놓은 문학사적 사건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한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학에 작동하는 문학권력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의 촉발점이 돼야 한다. 문학권력의 지배질서는 항상 외부의 문제제기를 포섭하거나 자기화함으로써 자기권력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문제는 기존 문학권력의 갱신이 아니라 기존 문학권력을 낙후시킬 수 있는 외부의 전복이 가능하냐이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에 대한 이응준 작가의 문제제기도 특정 작가 개인에 대한 공격이라기 보다, 문학권력의 작동 방식과 한국문학의 갱신을 위해 온몸을 부딪쳐 종을 울린 것이라고 본다. 경직된 질서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조성은 좀처럼 활력을 획득하기 힘들다. 등단시스템, 문학매체 발간 시스템, 문학상 수여 시스템, 문학출판 관행 등과 같은 일련의 문학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문학권력의 외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 가능성을 문학권력의 외부에 있는 아웃사이더들, 젊은 작가들, 문학의 존재 근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건강한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가능할 수 있기를 열망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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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철화,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 – 공지영, 은희경, 신경숙의 경우」, <작가세계> 1999년 가을호, 작가세계사, 116쪽.
2) 정문순, 「통념의 내면화, 자기 위안의 글쓰기」, <문예중앙> 2000년 가을호, 중앙일보사.
3) 김명인,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신경숙 소설 비평의 현황과 문제」, 『주례사비평을 넘어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 46쪽.
4) 이명원, 「표절보다는 정신의 식민화가 문제다」, 『해독』, 새움, 2001.
5) “江을 시작으로 나는 그 여름을 온통 내 노트에 선배들의 소설을 옮겨적는 일을 하며 지냈다. 최인훈의 웃음소리,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제하의 태평양, 오정희의 중국인거리, 이청준의 눈길, 윤흥길의 장마, 최창학의 滄, 강호무의 화류항사……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자 한자 노트에 옮겨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 방학이 끝났을 때 필사를 한 노트는 몇 권이 되었고, 그 노트들을 마치 내가 쓴 작품인 양 가방에 넣고 서울에 돌아왔다. 나는 내 삶을 소설가로서 살아가리라 다짐했고, 습작 시절에 얼마나 내가 그 여름방학 동안 내 노트에 옮겨적어본 작품들이 세상에 퍼뜨려놓고 있는 의미망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할일을 찾았으므로 거기에만 매달린 덕에 나는 이른 나에 등단을 했고 누가 뭐라건 꾸벅꾸벅 십년을 걸어왔다.” (신경숙, 「筆寫로 보냈던 여름방학」,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1995, 150∼161쪽.)
6) 에드워드 W. 사이드, 전신욱·서봉섭 옮김, 『권력과 지성인』, 도서출판 창, 2006, 129쪽.
7) 앨런 S. 케이헌, 정면진 옮김, 『지식인과 자본주의』, 부글, 2010, 4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