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한겨레>와 함께 '이 시대에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새 고전 26권'을 선정하였습니다. 고전은 지식인들이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고통스럽게 사유한 결과로서 탄생한 책입니다.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며, 어제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들을 통해 오늘을 다시 한번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위력적이지만 철학적으로는 내용이 빈곤해서 마르크스, 베버와 같은 대사상가를 배출해내지 못한 사상적 ‘공허함’을 그 본질로 한다고 갈파했다. 과연 그런가. 지난해 말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로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루카 파촐리 상(Luca Pacioli Prize)을 수상한 왕후이(汪暉)의 생각은 어떨까.
전통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른바 중국 신좌파의 기수로 불렸던 왕후이는 최근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중국의 국가 주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괄목할 만한 성과와 함께 국가주의로 경사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선을 일부 받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여러 갈래로 나뉜 중국 현대화 전략 논란 속에서 중국과 서양, 계획경제와 시장경제, 국가와 사회, 전통과 현대의 이항대립적 논의 틀의 속박 속에 중국 지식계는 새로운 사상적 출구를 모색해 왔으며 왕후이는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그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야 어떻든 왕후이와 그의 저작들은 현대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읽고, 미래 좌표를 가늠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텍스트다.
<죽은 불 다시 살아나>(死火重溫)는 왕후이가 천안문 사태 개입 이후 농촌하방 등의 사회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사상사 연구작업에 진력해온 증표와도 같은 책이다. 중국 근현대 사상의 의의를 총괄하려는 이 책은 현대성(modernity)의 모순과 역설에 대한 성찰에 주력한다. 유럽중심주의의 현대사상사 중심축을 아시아로 되돌리려는 후속작 <현대중국사상의 흥기> 4권은 이 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청말에서 마오쩌둥에 이르는 중국 근현대 사상이 ‘현대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지했음’을 간파해낸 데 있다. 반현대성적 현대성의 문화정치학. 그런데 이런 특수한 배경에서 탄생한 사상들은 자기모순을 필연화한다. 대약진, 문화대혁명과 같은 ‘반현대적인 사회적 실천과 유토피아에 대한 경도’에 빠진 것이다. 중국의 신계몽주의와 개혁적 사회주의 또한 현대화의 신화에 빠져 중국을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편입시키는 목표로 매진했다. 그 결과 중국의 사상계는 실어상태 혹은 사회의 지배관계를 재생산하는 패덕상태에 놓였다. 왕후이는 그걸 직시했다. 그리고 그 폐허상태의 주범, 중국의 모더니티를 둘러싼 안팎의 규정관념을 해체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과학, 자유주의 등 이른바 현대성의 명제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의 전도를 새로운 민족-국가의 경로와 아시아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제시했다. 이는 G2로 격상한 오늘의 중국, 그 ‘신자유주의의 패권적 지위’와의 혹독한 대면 속에서 또 한차례의 사상적 결전을 예고하고 있다.
루쉰을 사상의 거처로 삼은 왕후이는 사상사 연구작업과 함께 현실에 대한 개입을 멈춘 적이 없다. 최근 신전통주의를 기치로 중국의 당-국가 일원화체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정치민주화 동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그리고 아시아를 시야에 넣는 작업 등이 그 예증이다.
왕후이는 전지구적 지역화 추세를 주목하며 아시아는 하나라는 본질주의적 아시아주의가 아닌 새로운 아시아주의의 상상을 위해 트랜스 시스템 사회(trans system society, 跨體系社會)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중국을 하나의 완정한 사회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층차의 체계들의 관계가 구현되는 사회로 해명하기 위한 분석틀이다.
“아시아 국가는 오직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기초, 즉 평등한 주권의 존중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새로운 형태의 협력관계를 보장하는 제도적 틀과 공동통치의 사회적 틀을 형성할 수 있다.” 화이(華夷)의 전통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다원평등한 복수 문명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