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 늘푸른어린이도서관 관장
한 해가 다 지나고 있습니다. 눈 뜨면 시간이 후딱후딱 지나더니 어느새 연말입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분노해야 할 일도, 기억해야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뚜벅뚜벅 묵묵히 제 갈 길을 갑니다.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다른 어느 해보다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결코 녹록지 않았던 올 한 해, 그래도 책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중에서도 함께 읽는다는 건 우리를 살리는 힘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엄마 때문에’ 책을 읽지 않겠다는 초등학생들도 많다는데 신간평가단을 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준 46명의 늘푸른어린이신간평가단 친구들의 즐거운 웃음, 아가랑 좋은 책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을 찾은 북스타트 엄마들과의 따뜻한 시간, 독서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며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 와서 이야기와 바느질과 그림자극과 나눔으로 독서문화를 만들어가는 도서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어떤 책들이 우리를 변화시킨 것일까요? 작고 작은 도서관 ─ 늘푸른어린이도서관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한 책 중에서 마음에 남은 책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550권의 책이 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북스타트 도서 1차 선정기관으로서 늘푸른이 선정되면서 벌어진 진풍경입니다. 도서관 자원활동가들은 낮이고 밤이고 그림책을 읽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중 최고점을 받은 책이 바로 『감기 걸린 물고기』입니다. 박정섭 작가의 『감기 걸린 물고기』는 강렬한 색감이 눈에 확 띄는 그림책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아귀는 똘똘 뭉쳐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잡아먹기 위해 꼼수를 씁니다. ‘물고기가 감기에 걸렸다더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거죠. 의심을 하면서도 ‘우리도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라는 염려로 물고기들은 분열하고 맙니다. 속수무책으로 아귀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그 순간 검은색 물고기 한 마리가 이야기합니다. “잠깐! 소문은 누가 내는거지?”
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의 반응이 다양합니다. 유아들은 “싸우는 건 나빠요.”라고 말합니다. 초등·중등을 지나 청소년부터는 심각해집니다. “소름끼쳐요. 우리 교실에서도 이래요.” “우리 사회도 이러지 않나요?” “악성댓글, 미디어… 그런 게 소문이죠. 이 작가, 장난 아닌데?” “대한민국이네.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에 휘둘리며 사는 걸까요? 가볍게 읽기 시작한 그림책이 주는 울림은 컸습니다.
이 시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했던 걸까요? 작금의 상황에 맞물려 씁쓸했지만, 모두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동물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이 살 수 없는 세상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을 테니까요. 동물에 대한 존중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시작이기에 동물에 관한 책이 많이 출판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2015년 후반에 출판된 『네모돼지』는 초등학교 고학년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마을에 오염 물질이 퍼지면서 홀로 남아 “기다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주인을 기다리는 개의 이야기,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풍을 가는 할아버지와 소 ─ 그들의 목적지가 도축장이었다는 가슴 아린 이야기 「소풍」, 유기묘에 관한 이야기, 풍선처럼 하늘을 날고 싶었던 개가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지만 거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는 이야기…….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이들은 말합니다. “동물들에게 미안해요. 사람은 나쁜 걸까요?”
인간의 욕심, 탐욕, 무책임을 담담히 서술해가는 동화를 읽다보면 이 사회에서 생명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듯하여 씁쓸합니다.
『후쿠시마의 고양이』는 사진집입니다. 원전 누출 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에 자발적으로 남아 동물들과 함께 살고 있는 마츠무라 씨와 그가 돌보는 고양이 시로와 사비를 사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마츠쿠마 씨와 고양이 시로와 사비는 모두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생명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곳일지라도 생명이 있기에 버릴 수 없다는 사람들… 원전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노란 색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대한민국의 아픔을 상징하는 상징색이 된 노랑. 2016년 함께 읽었던 그림책들 중에는 유독 노란 톤의 그림책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두 권의 책이 마음에 남습니다.
『알』은 함께 읽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책입니다. 『양철곰』 『빅피쉬』를 탄생시킨 이기훈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인 『알』은 글 없는 그림책입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 한계를 뛰어넘는 스토리 진행으로 읽는 사람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합니다. 엄마 몰래 알에서 온갖 생물을 부화시킨 아이는 동물들과 함께 오리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래의 숨구멍으로 빠져나온 아이와 동물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음날 텅 빈 아이 방에서 울고 있는 엄마에게 새 한 마리가 와서 알 하나를 놓고 갑니다.
열린 결말을 놓고 모두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각자 다른 결말을 이야기했지만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 죽음,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우리는 세월호를 떠올립니다. 맨 앞 면지에 그려진 수많은 눈, 그리고 마지막 면지에 그려진 두 개의 눈동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억하고 똑똑히 지켜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노란 달이 뜰거야』는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기다리며 나비를 그립니다. 나비를 따라 아빠와 함께 걷던 골목길을 걷고, 아빠와 함께 걷던 계단을 오르고, 아빠와 함께 담에 낙서도 합니다. 아빠는 말합니다. “걱정마라. 곧 달이 뜰 거란다.”
아이의 방에 걸린 달력은 4월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진실은 밝혀질 것입니다. 그림책을 읽는 동안 슬픔이 밀려옵니다. 함께 슬퍼할 수 있기에 응원하는 마음도 커집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기를, 진실은 침몰하지 않기를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한 해였습니다. 수많은 생각의 확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서록과 인증제에 질린 아이들도, 아이에게 읽힐 도서 목록과 기술을 찾던 엄마들도, 지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만 책을 찾던 누군가도 함께 읽다보니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뭐가 옳고 그른지 헷갈리기만 하는 이 시대에 비로소 선악과 정의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뜨이기 시작한 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2016년 우리는 이러한 마음들이 모여 만드는 기적 같은 순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광장을 가득 채우는 촛불을 바라보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확신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왜 함께해야 하는지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이야기하고, 공존을 이야기하고,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신 모든 작가님과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7년에도 우리는 계속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