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옥희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00년부터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정신분석 세미나 팀에서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가늘고 길게 지루하지만 소란스럽게 공부해오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주디스 버틀러 읽기』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타자로서의 서구』 『발레하는 남자, 권투하는 여자』 『젠더 감정 정치』 등이 있다.
여성혐오가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통탄이 터져 나왔던 시점이 2015년이었다. 페미니스트가 싫어서 IS로 떠난다는 메시지를 남긴 김 군 사건은 여성혐오가 터져 나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이후 여자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일베에 대한 메갈리안들의 미러링과 같은 사건을 통해 여성 대 남성의 적대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사적 아이러니는 남성 대 여성의 성전쟁을 수행했던 급진적 페미니즘의 귀환이다. 여성억압의 기원을 남성으로 보는 단순명쾌한 급진적 페미니즘은 바로 그 ‘단순명쾌’로 인해 오래 전에 사망선고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을 권총으로 쏘기도 했던 발레리 솔라리스는 1967년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다. 완전히 잊혀졌던 솔라리스‘들’Society for Cutting Up Men이 한국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여성해방이라는 꿈의 파국 뒤에 맞이하는 역사적 ‘마법’처럼 보인다.
솔라리스가 선언하듯 여성은 아마조네스가 되어 남성을 거세하고 싶어 하는가? 그와는 달리 여성의 욕망은 남성에게 보호받고 사랑받는데 있다고 오랜 세월 동안 가부장제는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감히 남자들의 보호와 사랑을 무시하고 거절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른 여자들의 ‘안돼요’는 ‘돼요’로 간주되었다. 그러다보니 원치 않는 사랑을 강제하면 성희롱, 성폭력에 해당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런 여성들은 불쾌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여자의 꿈이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다. 왕자 따위 필요 없다Girls don't need a prince는 선언에 격분하여 여성혐오발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상황이라면,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여전한 ‘헬’조선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경제적으로 좌절하고 정치적으로 비굴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에 경험하는 경제적 멸시, 정치적 혐오, 문화적 열등감 등을 표출하기에 가장 만만한 대상이 아직까지도 여성인 것처럼 보인다. 여성은 세상의 절반이고, 어디서나 언제나 접할 수 있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사회가 좌절한 남성들의 불만과 공포를 여성의 탓으로 전가하면서 성별 사이의 여혐/여혐혐의 젠더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혐오의 정동을 분석하고 있는 텍스트를 읽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텍스트의 선별기준은 일단 혐오라는 제목이 붙은 책으로 한정했다.
이 책은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혐오현상을 6명의 필자들이 분석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가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만들어왔던 착한 여자/나쁜 여자, 성녀/창녀의 이분법은 이제 개념녀/김치녀로 구별된다. 경기침체로 취업난·실업난이 깊어지면, 남성들이 무/의식적으로 누렸던 특권과 자원에 여성들이 무임승차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터져 나오게 된다. 여성이 감히 남성과 경쟁상대가 됨으로써 남성들이 역차별당한다는 불만은 여성혐오라는 키워드를 통해 남성들끼리 뭉치게 해준다. 모든 남성은 찌질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보는 일베적인 이데올로기는 잘난 척하는 자기주도적인 여자들을 혐오하는데 십분 활용된다.
이런 혐오현상은 정상성/비정상성이라는 이분법으로 확장된다. 나쁜 여자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장애인들은 비정상으로 차별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혐오발화자들은 혐오로 연대한다. 혐오발화의 순간 그들은 혐오의 남성연대에 동참할 자격이 생긴다. 그로 인해, 외로운 늑대들은 심리적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게 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J. L. 오스틴의 통찰을 빌려와서 혐오발언이 혐오발화자들을 주체로 만들어 주는 권력기제에 주목한다. 온갖 차별적인 혐오발언들인종차별, 여성차별, 동성애차별 등이 그런 호명의 대상에게 혐오감, 모멸감, 수치심을 어떻게 유발하는가? “김치녀” “보슬아치”와 같은 혐오발언이 여성들에게 어떻게 상처 입힐 수 있는가? 그런 혐오발언은 단지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상처 주는 행동과 마찬가지인가? 혐오발언자들을 법에 호소하고 처벌하면 혐오발언은 사라질 수 있는가? 여성혐오발언의 진원지가 일베 사이트라고 하여, 그와 같은 혐오생산 사이트를 폐쇄해달라고 법에 호소하는 것은 효과적일까? 이것은 오래된 표현의 자유 대 여성들의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의 논쟁으로 요약될 수도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 법 자체는 적혐오의 대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혐오발언을 생산하는 장치다. 혐오발언이 힘을 발휘하려면 오랜 세월 축적된 차별과 모욕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재인용하도록 해주는 집단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국가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의 검열과 규제에 호소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국가강제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버틀러라면 dj doc 「수취인분명」은 여혐이므로 금지해달라는 요청은 오히려 법의 구속력과 규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라면 원본의 의미를 비틀어서 혐오의 맥락을 탈취하여 재전유하자는 전략을 제시하지 않을까 한다.
마사 너스바움은 버틀러와는 달리 혐오발화에 대응하는 법적 규제가 사회적 정의와 어떻게 협상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당대의 공동체 기준을 지닌 평균적인 사람”들에게 촉발시키는 혐오감은 법적인 정의를 규정하는데 핵심적일 수 있다. 법이 언제나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법은 취약한 자들을 보호해줄 수 있고, 그마나 약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제도다. 법적 정의실현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너스바움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에 충실한 셈이다.
너스바움에 의하면 혐오감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아의 심리적 보호기제이자 면역체계다. 자아는 무엇보다 역겨운 오염원을 축출함으로써 외부세계와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단정한 면역주체가 되고 싶지만,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취약한 몸을 가진 주체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그럼에도 주체의 환상은 자신의 취약성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탓이라고 믿게 해준다. 그로 인해 자신이 단정한 면역 주체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혐오발화자들은 인종차별, 동성애, 트랜스젠더, 빨갱이, 성적 소수자들을 낯선 이물질이자 바이러스로 간주하고 두려워한다. 이처럼 혐오는 자신의 공포와 무지를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혐오발화자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비정상”이라고 혐오함으로써 자신의 정상성을 인정받고 확인하려고 든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지극히 취약한 존재들인 셈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이 책은 본인 스스로 밝히다시피, 고인이 된 이브 세지윅의 영향 아래 씌여진 것이다. 그녀는 세지윅의 분석틀을 가지고 와서 일본 황실에서부터 호색한 제비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전반에 걸친 여성혐오와 호모포피아를 분석하고 있다. 세지윅에 의하면 이성애 사회의 로맨스는 여성의 교환을 통해 남성 유대를 강화한다. 그런 남성동성사회는 교환되는 여성에게 혐오감을 투사한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교환하면서 어떻게 혐오한다는 것일까?
두 남자 사이에 교환되는 여성을 두고 ‘내 여자야’라는 발화에서 남성은 자기소유물을 확인하는 자부심을, 여성은 보호받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결코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라고 일컫는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혐오는 단지 감정적인 멸시, 경멸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과 다 같은 주체로 서지 못하는 성차별적 구조 자체에서 여성혐오의 기원을 찾고 있다.
크리스테바에게 비체는 질서/무질서, 순수/오염, 주체/타자의 경계를 교란하면서 고정되지 않는 어떤 것, 내 것/네 것, 안/팎의 경계 자체와 그런 분류체계를 허무는 것들이다. 비체는 체體를 가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체非體다. 이런 비체 개념을 가지고 와서 자기사회가 지정해준 여성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여성들을 비체로 개념화하고 연대하려는 것이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이 제시한 전략이다.
한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여성들은 혐오스러운 박테리아가 된다. 이현재는 제자리에서 벗어나는 메갈리아들, 트랜스들, 성노동자, 듣보잡, 잡년들은 그런 비체에 속한다고 말한다. 남성의 질서로 통제하기 힘든 경계이탈자들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남성다움의 경계를 침범하는 타자들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성의 남성다운 정체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젠더이분법 사회에서 남성이 경험하는 공포는 여성화되는 것이다. 여성들이 주도하여 남성을 거세하려는 것에 대한 남성의 불안과 공포는 혐오감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혐오현상을 두고서도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다양한 여성주의 목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종언을 고한 것처럼 보였던 급진적 페미니즘 또한 귀환하고 있다.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도 열띤 헤게모니 싸움이 또 다시 시작되고 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인류의 가장 장구하고 최종적인 혁명이 여성해방혁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지금 페미니즘은 또 다시 출발선상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