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 동국대 국문·문창학부 교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학원 박사. 1990년 『동아일보』 문학평론 당선. 경향신문 기자, 순천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 국문·문창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장, 한국어문학연구학회 회장, 미 컬럼비아대 방문학자 등 역임. 저서로 『삶 속의 문학, 독자 속의 비평』『삶 속의 비평』『태백산맥 문학기행』『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를 냈으며, 검열에 관련한 공저로는 『식민지시기 검열과 한국문화』『식민지검열, 제도-텍스트, 실천』이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패닉상태에 놓였다. 문화예술계로 국한한다면 블랙리스트 사건이 그 핵심이다. 한국에서 블랙리스트의 기원은 식민지시기 ‘불령선인’ ‘불온분자’ 명단을 작성하고 집중 관리했던 데서 비롯된다. 박정희-박근혜 정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검열은 ‘87년 체제’ 이후 크게 완화되었다가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강시처럼 되살아났다.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특히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연극계였다. 21개 극단이 참여하여 시대착오적 검열을 비판하는 창작연극들을 무려 5개월2016.5~10월 동안 공연하는 전례 없는 싸움을 이어온 것이다. 이름하여 ‘권리장전’, 즉 시민과 예술가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한 오랜 싸움[長戰]이다.
그렇다. 긴 싸움이다. 인류의 역사는 표현, 양심,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는 시민 및 예술가들과 이들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권력자들의 오랜 싸움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소크라테스, 예수, 브루노, 마르틴 루터 킹 등등은 그 이름들의 아주 작은 보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검열은 흑과 백의 싸움 같은 것만은 아니다. 검열처럼 옳고 그름이 명백한 사안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인식 때문에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검열연구가 부진했었지만, 기실 그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회색지대들이 존재한다.
그 '회색지대'의 보기를 잠깐 들어보면, 검열의 생산적 효과를 먼저 손꼽을 수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서발턴subalter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은 감옥에서였다. 감옥 외부로 편지로 전했는데『옥중수고』, 교도소 검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를 쓸 수 없었으니 서발턴이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나중에 이 단어는, 계급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달리, 인종 나이 지위 성별 등 모든 권력의 주변부에 위치하는 ‘하위주체’라는 새로운 의미로 규정되었다. 검열이 아이러니하게도 학술발전에 기여하기도 한 것이다.
둘째, 검열에 대응하고 우회하는 과정들도 매우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작가들은 풍자 해학 상징 은유 등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을 동원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앞부분에 우스갯소리를 잔뜩 늘어놓아 검열관의 긴장을 풀게 했으며, 자신은 그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전할 뿐이라고 위장했다. 연암 박지원 역시 자신의 신랄한 풍자들을 ‘항간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미리 변명해두고 있으며 동물우화의 방식을 자주 동원했다. 한편 독자들은 자신이 읽는 텍스트가 검열을 거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 간접화된 서술을 해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즉 검열은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독자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수수께끼 풀기 같은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셋째,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은 무려 200여 개의 필명을 썼다. 필명을 모조리 정리하는 연구가 필요했을 정도였다. 루쉰이라는 이름으로 검열을 넣으면 무조건 불허가 나오게 되자, 이리저리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검열 당국 역시 대응했다. 이름은 달라도 루쉰의 필체로 된 원고는 무조건 불허. 루쉰은 이번엔 다른 사람에게 베껴 쓰도록 하여 대응했다.
이름과 필체까지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 함은 검열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루쉰은 그 효율성을 다시 악화시키도록 했으니, 작업량이 다시 늘어난 검열관들은 과로를 호소하고 인원증원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돈이 많이 드는 검열’을 강제한 것이다.
이처럼 검열은 많은 희생자들을 내기도 했지만, 무수한 발신자와 수신자들의 다양한 저항에 직면했고, 그 과정에서 인류는 사상과 표현의 풍요로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표현자유에 대한 인식은 보편화되고 거의 모든 국가에서 표현자유에 대한 법적 보장이 실현되었다.
이 짧은 지면에서 말할 수 있는 범위란 뻔하니, 더 읽을 책들을 대중서 중심으로 소개한다. 검열을 다룬 영화『웃음의 제국』와 소설『누가 우리 집에 불냈어』들도 있으니, 함께 보면 더욱 흥미진진하리라 생각한다.
한때 방통위원이라는 일종의 검열자 직책을 맡으면서 표현자유의 수호자로 맹활약했던 저자가, 이명박 정권 시기를 중심으로 표현자유가 얼마나 위축되고 있는가를 구체적 실례를 통해 보여준다. 법학자답게 서구와 한국의 검열 관련 법체계를 대조하는 데 강점이 있다. 특히 검열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들에 대한 소개가 눈에 띈다. 예컨대 ‘입 막기 소송 방지법’미국의 법 이름은 ‘공공 참여를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소송 봉쇄법: SLAPP 같은 것은 한국에도 시급히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야말로 노조나 공익제보자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고소 고발하여 괴롭히는 행위들이 다반사가 아닌가.
좀 멋쩍지만, 내 책도 소개하고 싶다. 한국의 근대적 검열의 기원인 식민지시기와 현재책을 펴낸 이명박 정권 시기를 교직하면서 서술했다. 검열이란 검열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피검열자의 대응과 마주치면서 공진화共進化되어 간다는 점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전한다. 아무리 엄혹한 검열상황이라도 저항하고 우회하려는 저자와 독자의 ‘의사소통의 공동체’는 유지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 밖에 책의 판권지에서 인쇄일과 발행일을 구분하는 매우 독특한 한국적 관례도 검열 때문에 시작된 흔적기관 같은 것이라는 점 등 흥미로운 사례들이 적지 않다.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글을 다듬고 새로 보충한 것이니, 연재물을 찾아 읽어도 되겠다.
정치, 종교, 성적 표현, 사회적 억압 등에 의해 검열의 희생자가 된 책 100권을 골랐다. 다룬 책 제목만 몇 개 보자. 『톰아저씨의 오두막』 『서부전선 이상 없다』 『동물농장』 『닥터 지바고』 『성서』 『탈무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적과 흑』,『올리버 트위스트』, 『종의 기원』 『데카메론』 『보바리부인』 『율리시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허클베리 핀의 모험』 『멋진 신세계』『호밀밭의 파수꾼』 『안네 프랑크의 일기』. 거의가 현재는 고전이지만 한때 ‘불온서적’이었던 것들이었다. 검열당한 사유와 함께 그 책의 주요 주장까지 요약하였으므로, 교양서로서도 의미 있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물론 주로 서구에 중심을 두지만)의 정보기관·군대·자본·종교 기관 등이, 언론은 물론 학문 연구·영화·광고·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어떻게 시민들의 눈을 가리고 재갈을 물리면서 지배를 강화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살핀다. 서구에서도 표현 자유 역시, 한국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긴 하지만,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위협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투쟁에 대해서도 소홀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표현자유가 역사적으로 진전해온 과정을 소크라테스부터 갈릴레오, 밀턴, 존 로크, 토마스 페인 등을 거쳐, 사이버공간의 검열에 이르기까지 상징적 인물과 사건 17건을 골라 제법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시대 상황과 시대정신을 요약적으로 정리했으며, 흥미진진한 사례들도 풍부하여 읽는 재미가 짭짤하다.
구사하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최근의 블랙리스트 사건만 해도 모든 자금 등을 차단하는 방식이었다. 이제 표현자유는 권력과 자본의 이중적 포위망과 맞서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결코 비관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예컨대 인터넷은 ‘세계시민’의 정보교환을 원활하게 해주었으며, 자본에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과 빅데이터 등 최근의 기술적 발전이 감시 및 검열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살핀 책을 한 권 더 소개한다.
검열과 간접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연관된다. 포괄적인 까닭은, 첫째 학자 예술가 등 조금은 특별한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거의 모든 대중의 삶에 관련된다는 점, 둘째 오늘날 거의 모든 대중이 나날의 삶 속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빅데이터 등 당대적 테크놀로지를 집중적으로 살핀다는 점이다. 특히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철저한 감시사회를 고발하고 그 대응책을 모색한다는 점이 강점이다. 한국에는 과학에 밝은 인문학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임태훈이 SNS 커뮤니케이션 ‘하루’를 소개하는 것으로 책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장’과 ‘친구’로 SNS 공간을 분할하고, ‘광장’에 쓴 글은 특별히 연장하지 않으면 24시간 안에 사라지도록 설계했다. 자본과 국가가 장악한 빅데이터 속으로 자신의 사적 정보를 무차별 ‘흡입’ 당하는 현상을 막을 수 있으며, 정보의 홍수도 완화시킬 수 있다. 잠깐 잘못 생각해서 올린 글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일이 방지된다는 점만으로도 참신하다. '하루'는 한국 남자아이 둘이 고교 1학년 때1998년생 약 1년 만에 개발해낸 것이었다. 젊은 세대들은 요즘 촛불시위를 종횡무진함으로써 한때 회자된 ‘20대 ○새끼론’을 무색게 하고 있다. 루쉰의 말대로 ‘식인食人의 풍습’에 덜 익숙해진 그들에게,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