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명저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라붙는다. 첫째, 자신의 독특한 시각이 있어야 할 것. 남의 견해를 가져다가 앵무새처럼 읊조린다거나 확성기인 양 남의 주장을 확대하는 데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 혹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 개성적인 시각은 있으나 그저 자기만족적인 수준에 갇혀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자산이 될 수 없으리라는 얘기다. 셋째,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의 해명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
이론이란 현실을 추상화시켜 어떤 논리로 묶어낸 결과일 텐데, 서구의 현실을 대상으로 삼아 구축된 이론은 우리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명저를 읽는 까닭은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세계를 일구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며, 더욱이 즐겁기까지 하여 나는 명저를 되풀이하여 읽는다.
아직 철이 덜 들었을 때 나는 준엄한 선생님으로부터 붓글씨를 배웠더랬다. 어느 정도 배움의 진도가 나가자 한자로 넘어갔는데, 그때부터는 매일매일 다음과 같은 문자로 흰 종이를 검게 채워야 했다. "仁義禮智(인의예지) 孝悌忠信(효제충신)" 혹은 "父爲子綱(부위자강) 君臣有義(군신유의) 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삼강(三綱), "父子有親(부자유친), 朋友有信(붕우유신), 長幼有序(장유유서), 君臣有義(군신유의), 夫婦有別(부부유별)"이라는 오륜五倫. 선생님께서 뭐라 설명을 해 주셨는데, 사실 당시 나는 그 설명이 요령부득이었다. 만화영화를 좋아하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일에 정신이 한창 팔렸던 나이였다면 변명이 되려나. 내가 그 선생님께 붓글씨를 배웠던 시기는 초등학교 4학년 가을에서 6학년 여름방학 즈음까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이 떠올랐던 것은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서였다. 이제 막 출간된 시어도어 드 배리의 『중국의 ‘자유’ 전통』(이산, 1998), 이광세의 『동양과 서양 두 지평선의 융합』(길, 1998)을 묶어서 독파하던 도중 문득 그 의미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무수히 써 내려갔던 그 문자들은 대체 어떤 세계관을 담고 있었으며, 이런 문자들을 반복해 쓰도록 함으로써 선생님께서 내게 심으려고 한 것은 어떤 정신이었을까. 내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고, 여러 서적을 뒤적거렸으나 명료하게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孟子』의 해당 구절 역시 그저 문자로만 다가섰을 뿐).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만나게 된 책이 최봉영의 『주체와 욕망』(사계절, 2000)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드디어, 내 유년 시절 한 풍경의 비밀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주체와 욕망』 388쪽에서의 인용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를 우주의 기본 구성으로 보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으로 보았다. 먼저 인간은 삼재에 기초하여 세 개의 기본이 되는 욕심, 즉 땅에 바탕한 물질욕, 인간에 바탕한 인륜욕, 하늘에 바탕한 초월욕을 형성하고 실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개의 욕심은 ‘마음’을 매개로 하나로 통합되어 존재하는 관계에 있다. 즉 '인간의 마음人心'이 '하늘과 땅의 마음天地之心'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물질욕과 초월욕은 인륜욕에 포섭되는 관계에 있다. 인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인륜욕의 완전한 실현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인륜욕은 자격과 역할에 따라 삼강과 오륜으로 구분된다. 그들은 삼강과 오륜이 생명으로서 갖고 있는 욕구 및 욕망의 체계를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을 인간의 완성으로 보았다.
생소하고 어렵기만 했던 그 문자들이 담지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을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었고, 선생님께선 거기에 수반하는 윤리를 통하여 내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다잡으라고 가르치셨던 거였다. 오랜 숙제를 풀었다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었으며, 여기서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세계 인식의 틀 또한 놀랍게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파악하고 있던 세계 인식의 틀이란 ‘근대적인 개인’의 틀에 입각한 ‘국가-시장-사회’ 체제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인간의 규정이랄까, 욕망의 접근 방식은 현저하게 다르지 않은가(統體-部分子 세계관).
기실 『주체와 욕망』은 동아시아의 사상 지평 위에서 주체 개념을 새롭게 구성해내기도 하며, 문화권에 따른 세계관의 유형을 분류ㆍ비교해 놓기도 하였다. 서구에서 논의되는 근대 이후 담론을 재빨리 수입하여 마치 제 것인 양 진지한 포즈로 뒤따라가는 데 급급한 국내 학계의 풍토 속에서 이러한 시도는 어찌나 흥미롭게 다가서던지.
가령 최봉영이 말하는 '주체'를 보자. 그가 말하는 '주체'는 생명적 관계 맺음의 '주체'로서 문장의 주어나 명제命題의 주어로 사용되어온 'subject'와는 성격을 달리한다.(40쪽) 이러한 관점 위에 선다면 뭇 생명은 모두 세상과 관계 맺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 터인데, 다만 그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뉠 것이다. 저자는 그 유형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① 대사의 주체subject of metabolism:결합combination - 분리separation → ② 감각의 주체subject of sensation:자극stimulation - 반응reaction → ③ 지각의 주체subject of perception:인지cognition - 대응respondence → ④ 생각의 주체subject of thinking:선택selection - 실천execution"(375쪽) 적용의 예시를 하나 들어보건대, 개라는 동물은 ‘나의 세계’를 형성하여 대상과 능동적인 관계를 맺으므로 “지각의 주체”가 될 수는 있겠으나, 언어라는 상징체계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생각의 주체"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이와 같은 차이가 인간과 개의 비교를 가능케 한다.
내 전공과 연관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가자면, 『주체와 욕망』에서 문화권에 따른 세계관의 유형을 분류ㆍ비교해 놓은 <제5장 문화와 욕망의 형성과 실현>은 찬찬히 되새길 만한 내용이라 하겠다. 현재 탈근대 논의가 분분하게 일고 있는데, 일제 식민지 말기에도 근대 이후에 관한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된 바 있다. 새로운 시대의 상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에 전제되는 인간의 개념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할 터, 사상의 모험을 떠난 이들은 이 지점에서 다양한 분기를 보여준다. 실상 친일로 기우느냐 항일을 견지하느냐라는 문제도 이와 연관된다. 그러니까 『주체와 욕망』의 <제5장>은 한국 문학사의 이러한 상황을 정신사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데 퍽이나 유효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착안하여 김동리, 정지용, 이광수의 세계를 분석해 논문으로 내놓은 바 있다.
이광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1934년 차남 '봉근'을 잃은 이광수는 불교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서, 근대의식이란 사회를 각각의 개별자個別子, individual들이 사회계약설에 근거하여 형성한 합체合體, assemblage라고 파악하는 경향을 가리킬 터인데(개별자-합체 세계관), 이광수는 죽은 아들과의 인연을 되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통체統體 - 연기자緣起子, destinater 세계관’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통체-연기자 세계관’이란 개체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한편(연기자), 이를 둘러싼 사회는 개체 이전에 이미 하나의 통일체(통체)로 전제하는 관점을 가리킨다. 최봉영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체와 욕망』 241쪽.
전체로서의 사회는 본질과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전체는 본질의 차원에서는 안정되어 있지만 현상의 차원에서는 극히 불안정하다. 개체가 윤회를 통해서 신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무상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는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불안정한 것을 안정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모두에게 각자의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시간이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기설을 이해하는 이광수의 인식 수준은 「육장기鬻庄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남이 입어서 더럽힌 옷을 빨아줌으로 내생의 공덕을 쌓고 있는 것이오. 아마 다음 생에는 더러는 지위가 바뀌어서 지금 빨래하고 있는 ‘행랑것’이 주인아씨나 서방님이 되어 되고, 지금 빨래시키고 앉었는 서방님이나 아씨가 무거운 빨래를 지고 자아 문턱을 넘게 되겠지요.”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이러한 세계관은 당대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과거 삼국시대에 조선이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준 것과 현재 일본이 조선에 근대문물을 유포하는 것은 인因이자 과果라는 것. 이것이 현실을 수리하는 논리로 작동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렇듯 『주체와 욕망』은 내가 스스로의 근거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며,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에서도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나에게 명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체와 욕망』에는 우선 ‘주체’와 ‘욕망’을 파악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적절한 계기를 제공한다. 여기에 더하여 여기, 이곳에 살고 있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정신구조를 흥미롭게 분석해 내었다. 그렇다면 앞서 제시하였던 명저의 세 가지 기준에도 부합하는 셈이 된다.
★ 본 기고글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