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국에서는 지금부터 4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흔히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전쟁에 대한 관심이 잠깐 생겨났다. 전쟁에 대한 관심은 얕았으나 전쟁의 주인공으로 간주된 인물에 대한 흥미는 높았다. 흥미에 맞추어 몇몇 책들도 거론되었다. 2014년이 끝나가는 무렵에는 이 모든 것이 사그라들었다. 그 사태와 관련된 책들에 관한 논의는, 12권은 고사하고 한두 권에 대한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1592년의 그 전쟁이 왜 일어났을까? 이 물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야욕’이라는 말로 손쉽게 정리되곤 한다. 이런 정리가 있으니 ‘히데요시 나쁜 놈’에 이어 ‘일본 놈들은 하여간…’으로 처리되는 순서가 가능하다.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전쟁에 얽혀든 각 나라의 내부 사정, 그 나라들을 둘러싼 국제정세(또는 적어도 일본을 포함하는 동남아시아 정세와 명·조선의 관계)까지 좀 살펴보면 그 전쟁에서 300년쯤 후인 1900년 무렵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터인데 거기까지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나중의 사태도 ‘이토 히로부미 나쁜 놈’으로 끝나는 게 상례이다.
쓸데없는 서설이 길었다. 원제(Power in the 21st Century: Conversations with John Hall)의 의미가 ‘21세기의 권력’쯤일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 즉 21세기의 세계(한반도 포함)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범주(와 그것의 형성사)를 간명하게 잘 정리한 것이다 — 이런 식으로 한 권의 책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거친 일반화일 수도 있으나 책을 한 번 읽으면 일단은 이러한 규정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읽어서 자신의 이전 규정을 바꾸어 나가려 하면 더 세심한 독서가 필요할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독서의 힘이 강해질 것이다.
독서의 시작은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표지와 차례를 촘촘하게 살펴보는 것부터이다. 이 책을 가지고 그것을 한번 해보자.
책의 저자가 두 명인데, 정확하게는 존 홀이 묻고 마이클 만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책표지에 “세계적 석학 마이클 만과의 권력대담”이라 쓰여 있다. 책의 어떤 부분이 누구의 견해인지를 딱 잘라내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은 다음에는 마이클 만과 존 홀의 다른 책들을 읽어서 보완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이클 만이 “세계적 석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표지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런 말은 지칭이 불분명하다. ‘석학’은 범위가 너무 넓은 말이어서 오히려 뭔가를 적극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괜찮은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표지에 담긴 것들을 좀 더 살펴보자. 책에 관한 정보를 처음 전해주는 것이니 표지는 중요하다. 맨 위에 원제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한국어 판 제목이 적혀있다. 한국어판 제목이 책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사라진 권력 살아날 권력’이라는 제목은 ‘권력’을 강조하고 있으니 권력의 흥망성쇠를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내 생각에는 원제에 들어 있는 “21세기”가 더 중요한 듯도 싶다. 우리가 이미 들어선 21세기에는 세계정세의 변화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지가 이 책에서의 중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표지 한가운데 왕이나 종교계의 고급 성직자가 앉을만한 의자가 놓여 있다. 이것은 ‘사라진 권력’의 상징으로 이해되기 쉽다. 원제의 표지는 파란 하늘 왼쪽에 ‘무인 비행기’로 짐작되는 것이 날아가고 있다. 이는 ‘21세기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차례를 살펴보자. 책을 읽을 때 차례를 무심히 넘기지 않고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어디부터 읽을 것인지 등을 따져보면 책읽기가 훨씬 수월하다. 책을 쓰는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를 또렷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대담이므로 저자들의 대화를 편집한 것이고 그에 따라 차례가 구성된 방식이 좀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저자는 책을 쓸 때 가목차를 적어두고 그에 따라 본문을 쓴 다음에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작성한 차례를 다시 다듬는다. 차례는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결점이다. 따라서 차례가 확정되는 것은 맨 나중이다. 서문도 마찬가지다. 차례의 제목들과 서문만 가지고도 책 전체 내용을 집약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서문과 결론을 제외하면 모두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원저와 비교해보면 한국어판에는 빠진 게 있다. 원저는 “Part One: Powers in Motions” 아래에 1장부터 5장이, “Part Two: The Nature of Social Change” 아래에 6장부터 10장이 배치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1부는 ‘(넓은 의미의) 권력의 변동’을 다루고 있고, 2부는 권력의 변동에 따른 사회변화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1부가 사회변화의 원인이 되는 권력 요소들, 즉 “경제권력”(1장), “군사력”(2장), “정치권력”(3장), “이데올로기”(4장) 등과 같은 여러 형태의 권력들의 변동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방식의 권력”(5장)을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면,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2부는 “강대국과 약소국”(6장), ‘집단 행위자’(7장), 변화의 귀결(8장), 비상사태(9장), 분명히 보이지는 않으나 뚜렷하게 예감되는 위기(10장)를 논의하고 있다 하겠다.
차례 분석을 끝낸 다음 어디부터 읽어나갈지는 독자가 결정하면 된다. 다만 읽어나가는 동안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좌절하여 책을 팽개치지 말고, 독서를 중단하고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끝도 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일단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자. 도대체 모르겠으면 권력에 관한 기본서라 할 러셀의 《권력》(열린책들, 2003)을 먼저 읽고 다시 도전해보자. 이 책의 제10장 원제목이 “On Looming Crisis”인데 여기서 허먼 멜빌의 《모비딕》(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3) 제1장인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Loomings”을 떠올린 사람은 이 책을 덮어놓고 멜빌로 가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