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한겨레>와 함께 '이 시대에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새 고전 26권'을 선정하였습니다. 고전은 지식인들이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고통스럽게 사유한 결과로서 탄생한 책입니다.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며, 어제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들을 통해 오늘을 다시 한번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위험사회>는 계급정체성이 약해지고 가족 유대가 불안정해지는 ‘개인화’ 시대에 어떻게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고 그것은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라는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벡이 내리는 결론은, 새로운 정치는 급진적으로 개인화된 ‘정치적 시민citoyen’들이 기존의 제도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치적 이슈와 연대 형태를 발견해나간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시민사회가 발현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정치는 더 이상 생활과 분리되는 제도정치에 갇히지 않고 생활과 융합한다. 그것은 제도정치의 외부에서 발현하는 ‘하위정치’이고 계급적 이념대립 너머에서 작동하는 ‘생활정치’이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하위정치의 주체는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이고 영웅적인 개인이 아니라 근대성의 제도들이 생산해낸 ‘위험’들이다. 이것을 벡은 ‘부작용의 정치’라고 표현한다. 개인들은 제도들이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위험을 ‘위험’으로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동시에 제도 밖에 존재하는 하위주체들이다. 정작 위험을 생산하는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은 단지 부작용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는 위험이 전혀 인지되지 못한다. 근대성의 제도들은 위험과 위험 생산을 부정하며 무책임을 제도화한다. 벡은 이것을 ‘조직화된 무책임’이라고 표현한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위험을 인지하는 개인들은 ‘부작용의 정치’를 ‘(세계)시민의 정치’로 변화시키는 사회적 매체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발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개인들은 재화 또는 위험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위치가 아니라 그것들을 소비하고 처리해야 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정치적 주체가 된다. 계급정체성이 와해되는 지점에서 기업과 기성정치에 의해 위협받는 ‘불안한 소비자’라는 새로운 시민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위험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의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 정치지형에서 어떤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과 그에 공감하는 일반 시민들은 계급 이해나 좌우 이념을 초월하여 기업과 기성정치, 제도의 조직화된 무책임으로 인해 생명과 생활을 위협받는 (또는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는) 일반적인 소비자들이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시민이라는 지위의 현주소가 무엇인지를 통렬하게 드러내주었다. 시민들은 모두 피해자들과 한마음이 되어 있고, 같은 마음으로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이제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세대나 계급, 사회적 지위와 직업을 뛰어넘어 하나의 정치적 주체가 되고 있다.
한국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오랫동안 좌우의 진영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세월호 참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대형재난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고스란히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을 마주하며 한국에서는 좌우의 진영논리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회, 하나의 연대, 하나의 정치적 시민의식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체르노빌 사건 당시에 출판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이제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변화하고 있는 한국 시민정치의 지형을 설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