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한겨레>와 함께 '이 시대에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새 고전 26권'을 선정하였습니다. 고전은 지식인들이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고통스럽게 사유한 결과로서 탄생한 책입니다.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며, 어제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들을 통해 오늘을 다시 한번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이 책은 세 사람을 다룬다. 1987년 전국체전이 열린 오키나와의 소프트볼 경기장에서 게양되어 있던 히노마루를 불태워버린 오키나와의 슈퍼마켓 주인 지바나 쇼이치. 1968년 공무 수행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위대원(남편)을 유족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사에 합사하는 것에 반대해 소송을 일으킨 부인 나카야 야스코. 천황 히로히토에게 전쟁책임이 있다는 발언 때문에 1990년 우익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인물과 사건이지만 이 책의 새로움은 지은이 노마 필드의 개인사와 기억이 이들 세 사람의 역사와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천황 히로히토가 병석에 누워 ‘죽어가는’ 시점에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로히토의 ‘죽음이 서서히 진행’되던 1980년대 후반, 자숙/엄숙이라는 체제 순응의 사회파시즘이 전쟁에 대한 의도적인 망각과 왜곡과 함께 일본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점에서, 노마 필드는 체제 순응과는 다른 삶을 선택했던 세 사람을 끄집어내어 저항의 가능성을 선동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차분하게 재구성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세 사람은 ‘기만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이고 히로히토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 세 사람의 삶에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기를 거부한다. 때로는 거리를 두다가도 세 사람의 삶 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개인사를 교차시키면서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뛰어다닌다. 이런 시점이 가능한 것은 그가 일본 사회의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일 미군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도쿄에서 ‘혼혈’로 태어나 미군기지 부근에서 살면서 기지 안에 있는 미국 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의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의 어머니와 외가는 ‘평범’한 일본의 일상이고 그의 아버지와 친가는 승전국 미국의 일상이다. 이 양자가 얽혀 있는 지점에 노마 필드가 서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이를 산술적인 균형으로 풀려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노마 필드의 고백이면서 문학,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논픽션이 만나는 그 어떤 지점에 서 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말한다. “우리들은 현실주의라는 명분 아래 여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내동댕이칠 수 없다. 그러한 현실주의는 파괴와 죽음의 근거가 될 뿐이다.” 히로히토는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1989년에 죽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을 보면, 지금도 그는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가 병석에 누운 이래 일본 사회를 휘몰아쳤던 사회파시즘이 요즘에 와서 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한층 더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