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한겨레>와 함께 '이 시대에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새 고전 26권'을 선정하였습니다. 고전은 지식인들이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고통스럽게 사유한 결과로서 탄생한 책입니다.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며, 어제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들을 통해 오늘을 다시 한번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지난 세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우리와 주변 모두의 공존과 평화를 보장할 21세기 동아시아 백년대계의 전략은 무엇인가?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는 이에 대한 가장 폭넓고 깊이있는 모색 가운데 하나요, 통찰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탁월한 연구서다. 예컨대, 거대 중국의 대두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에게 위기인가 기회인가? 이에 대한 이삼성의 치밀하고도 도발적인 사유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의 하나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2천년과 19세기 근대까지를 통시적으로 훑는, 1·2권 합쳐 1500쪽에 이르는 이 책(20~21세기를 다룰 제3권도 근간 예정)에서 그는 ‘중국’을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북방민족들과 중원간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표출로 파악한다.
그는 7세기 신라의 통일 이후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는 건 중화제국 팽창기가 아니라 중화제국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힘의 공백기였음을 간파한다. 중화제국과 한반도, 그리고 북방 노마드세력이라는 삼각구조에서 중국 중원이 약해지고 혼란에 빠질 때마다 북중국 또는 만주에서 제3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한반도는 위기에 빠졌다. 10~11세기 거란의 침략, 13세기 몽골의 침략, 17세기 중엽 후금 및 청의 침략이 그랬다.
명대 말의 임진왜란, 청대 말의 일제 침략과 조선 식민화 또한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사유할 수 있다. 그 연장선 위에 미국도 올려놓을 수 있다.
이삼성은 중화질서의 조공·책봉체제를 일방적인 식민·착취가 관철된 서구 패권주의적 국제관계와는 다른, 내적 자율성을 전제로 전쟁과 평화를 조율한 국제적 규범·제도, 제3의 질서로 파악한다.
물론 그렇다고 중화질서가 평화를 자동 보장한 건 결코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주체적 대처다. 지나친 중화 사대주의는 주변의 변화에 눈감고 그들을 타자화하면서 또다른 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새로 등장하는 청을 의식하면서 균형외교를 펼쳤던 광해를 몰아내고 망해가던 명에 대한 사대를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인조 세력이었다. 그 결과가 정묘·병자호란의 참극이었다.
오늘의 존명사대주의자는 누구인가? 격동기 대전략 수립에는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데올로기화한 미국,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돼버린 한-미 동맹이 그걸 가로막고 있다. 미국 비판을 반미·종북으로 몰아가는 오늘의 ‘존미’ 사대주의는 주변국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책은 그런 자세가 왜 위험한지 역사적 사례 연구들을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