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한겨레>와 함께 '이 시대에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새 고전 26권'을 선정하였습니다. 고전은 지식인들이 당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고통스럽게 사유한 결과로서 탄생한 책입니다.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며, 어제의 문제가 오늘의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들을 통해 오늘을 다시 한번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인간사회의 폭력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경제학자인 아마르티아 센에 따르면 폭력이란 한 사람이 지닌 다양한 정체성을 사회의 정치·경제적 필요에 의해 오직 한 가지의 정체성으로만 환원시킬 때 발생하게 된다. 인간은 계급적, 인종적, 종교적, 또 성적으로도 다양한 관계망 속에 살기 때문에 복수의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센 자신도 벵골계 인도인이지만 미국과 영국의 영주권자이고, 경제학자이면서 산스크리트어 학자이기도 하고, 남자이지만 페미니스트이고, 이성애자이지만 게이와 레즈비언의 권리를 옹호하며, 힌두교 배경을 지녔지만 비종교적인 생활양식을 취한다.
개개인의 내면에 공존하는 이와 같은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인간을 축소시킬 때, 차이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폭력에 취약한 단일한 집단체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을 한 가지의 정체성 속에 가두는 것은 옛사람들이 하나하나를 소우주로 봤던 인간을 실물보다 훨씬 작은 미니어처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소인이 된 인간들은 결국 인간정신의 왜소화로 인해 손쉽게 폭력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이성적이고 점잖은 대인국 사람들과 달리 걸리버를 죽이려 하고 이웃나라와 서로 싸움질이나 해대던 것은 미니어처로 전락한 소인국 사람들이었다.
센이 인간의 정체성과 폭력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끔찍한 폭력 때문이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끝나갈 무렵 어린 센은 카데르 미아라는 가난한 무슬림 날품팔이가 이웃인 힌두교도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불과 어제까지 서로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슬람교와 힌두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이유를 열한 살 나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슬람교와 힌두교라는 차이 때문에 폭력에 휘말린 이웃들이 계급적으로는 서로 동일한 가난한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센은 어느 사회건 가장 약자들이 이런 획일화된 정체성으로 인한 폭력 앞에 제일 먼저 희생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한 가지 정체성으로 인간을 축소시킬 수 있다는 ‘환영’은 결국 대립을 조장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강자들의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며, 폭력이란 이런 학살의 명령자들에 의해 선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어린 학생도 바보처럼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증오는, 여보게, 예술일세”라는 시가 암시하듯이 어린 센은 증오를 배우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무릎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카데르 미아를 위하여,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의 자유를 사랑하는 다른 세상을 상상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센은 빈곤과 공정성을 논하며 현대경제학이 만든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단일한 정체성도 환영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많은 동기와 욕구 중에 오직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심을 마치 인간의 전부인 양 왜곡함으로써 오늘날 협력보다는 경쟁에, 포용보다는 배제에 입각한 매우 폭력적인 경제체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을 이렇게 축소함으로써 폭력으로서의 빈곤은 더 깊어지고 강자들은 더욱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옹호자였던 미국 시인 휘트먼은 이렇게 물었다. “동지여, 내 그대에게 돈이나 법률에 앞서 소중한 내 손을 내미나니, 그대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서로가 손을 내밀어 서로를 구해주는 것이 바로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