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글쓰기”
“오늘날 길을 잃고 헤매는 여자들은 이제 없는가”
고백하자면 번역자에게 책은 한 권의 실패한 경험이다. 번역자는 자신의 경험과는 낯선 곳에서 출현하는 언어에 자신을 내던져야 하며, 그것의 통합 불가능한 이질성 속에서 고통스러운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번역자가 생산할 수 있는 책이란 고작해야 절반의 위로와 절반의 방황 속에 탄생한 하나의 미완성일 뿐이다. 번역자와 책의 관계를 하나의 마침표가 아닌 영원한 쉼표로 만드는 것 역시 이러한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다. 책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에 번역자는 끊임없이 저자에게 자신의 한 부분을 저당 잡힐 수밖에 없으며, 그가 쏟아내는 무언의 비난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도리스 레싱의 『황금 노트북』이라는 이 무거운 짐을 내가 회피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62년에 발표된 『황금 노트북』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으로 ‘여성 해방문학의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녀 자신은 책의 서문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의 나팔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던졌던 질문, 왜 이전까지의 역사에서 위대한 여성문학은 없었는가라는 물음과 관련해 여성문학의 중요한 한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울프의 고백에 의하면 18세기까지만 해도 여성은 남성에 의해 창조된 상상의 산물이며 그들의 욕망을 반영해내는 하나의 거울 이미지였다. 그래서 만일 한 여성이 남성의 언어 안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녀가 쓸 수 있는 글이란 “팽팽히 긴장된 병적인 상상력,” “불구처럼 비틀거리는” 작품들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성적인 환상과 자신의 유일성을 구분 지어 줄, 보편적인 익명성에서 자신을 구출시켜 줄 자신만의 언어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싱의 『황금 노트북』이 여성문학의 한 정점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울프의 이와 같은 고민을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울프 자신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언어의 비틀거림과 병적인 긴장감을 폭로하고 극대화한다는 점에 있다. 『황금 노트북』의 전체 구성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마지막의 「황금 노트」를 제외하면 줄거리의 골격을 이루는 「자유로운 여자들」과 이 「자유로운 여자들」의 주인공인 안나 울프가 적어 나가는 일기들인 「검은 노트」, 「빨간 노트」, 「노란 노트」, 「파란 노트」가 순서대로 반복되고 교차되는 형식이다.
주인공 안나 울프는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한 편 쓴 여류작가이자 딸과 함께 살아가는 이혼녀로, 그 책의 상업적인 성공 덕분에 안정적인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출판사를 비롯한 각종 영화 관계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 유일한 소설이 타인들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질서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창조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지적 혹은 도덕적 열정의 힘을 지닌 한 권의 책”을 써내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더 이상 어떤 소설도 써낼 수 없는 실어증의 상태에 처해 했다. 내면의 끊임없는 불안과 무능력함 속에서 그녀는 심리상담가를 찾아가기도 하고 현실적인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 공산당에 가입해 자원봉사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집안의 가장이자 어머니로서 또한 자신과 같은 이혼녀이면서 자식과 갈등을 겪고 있는 한 친구의 절친한 친구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억누르면서 이들의 고민에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나가 자신의 삶을 네 종류의 일기로 구분해 작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처해있는 이런 복잡한 상황들을 정리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안나는 「검은 노트」에 소설의 바탕이 되었던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회고해 나간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으며 식민지에서 담배 농장을 하고 있던 남편을 따라 아프리카로 건너갔고, 식민지에서 일상화된 지배/피지배 관계에 적응할 수 없어 짧은 결혼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 후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의 도시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자신처럼 식민지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안나의 삶에서 가장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묻혀 있는 곳이 바로 이 노트이다.
다음으로 「빨간 노트」에서 안나는 이제 막 가입한 공산당의 활동과 그곳에서 당원들과 나눈 대화들을 기록한다. 그녀는 당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당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가고 그들의 소련에 대한 맹목적 신뢰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노란 노트」에서 안나는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엘라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새로이 소설을 쓰고자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파란 노트」는 일기라는 성격에 가장 부합되는 것으로 그녀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고 있는 모든 관계들, 특히 유부남인 마이클과의 불안정한 연애관계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꿈들을 기록한다.
처음에 이 네 권의 노트들은 모두 명확한 자신들만의 영역과 독자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일기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노트들이 서로에게 침입해 뒤섞이기 시작하고 닮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프리카에서의 기억은 기록을 해 나갈수록 점차 불명확해지고 공산당원으로서의 활동은 작가-예술가라는 정체성과 갈등을 빚게 되며, 소설 속의 엘라와 폴은 불안정한 자신의 현재 삶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내밀한 고백이어야 할 「파란 노트」는 마이클의 이별 통보와 함께 점차 더 현실감을 잃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기억할 수 있는 것들과 기록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한 때 사랑했던 것들과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의 어긋남 속에서 그녀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위선인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든다.
친구의 아들 토미는 안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줌마 속을 끝까지 파헤쳐 들어가면 그건 모두 거짓이에요. 아줌마는 여기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또 쓰시죠. 아무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건 오만이에요. 아줌마는 진정한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일 만큼 정직하지 않으신 거예요.” 지금까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떠났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폴은 그녀와의 사랑을 확인한 다음 날 아프리카의 비행장에서 사고로 죽었으며, 윌리는 자신과의 딸만을 그녀에게 남겨둔 채 이념을 쫓아 소련으로 망명을 했고, 마이클은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주며 집안을 단장하면서 그를 기다리는 아내에게로 돌아갔다. 그들 모두는 그녀에게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으며, 사랑받고자 하는 가장 내밀한 욕망을 짓밟아 버렸다. 때문에 그녀가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갖가지 주제의 남녀 주인공들은 서로의 깊숙한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고독과 단절 앞에서 멈추고 만다. 소설 속의 여자는 “이 세상 어떤 여자도 사랑 없이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항변한다.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재려 한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을 바라고, 남자는 부인과 정부(情婦)의 역할 중 그녀가 선택한 한쪽에 충실할 것을 바란다. 현실의 관계든 소설 속의 관계든 결국 모든 관계는 씁쓸한 냉소와 비참함으로 귀착될 뿐이다.
레싱은 어떤 평론가들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자신이 주목한 이 책의 주제가 ‘붕괴’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안나는 자신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왜 매번 좌절될 수밖에 없는지, 왜 누구도 이런 불합리와 모순들에 저항하지 않는지, 왜 세계가 끊임없이 편을 가르면서 갈등하고 전쟁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왜 젊은 예술가들이 실어증에 걸리고 자아 분열로 치닫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처럼 분열되고 모든 것에 혼란스러워하는 미국인 솔을 만나면서 그의 붕괴된 내면에 들어 있는 폭력성과 이기심에 매료되고 자신 역시 그에게 상처를 주고 교리를 설파하며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질투심과 소유욕을 터뜨린다. 안나와 솔은 서로의 가장 아픈 곳들에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밀면서 비난하고 때리고 위협하고 통곡을 한다.
“오, 흑흑 - 울어대면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당신은 사랑하지 않아. 남자들은 여자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오, 흑흑흑, 그리고 분홍빛의 가냘픈 검지 끝으로 나의 하얀, 배반당한 젖가슴의 분홍빛 젖꼭지를 가리시면서, 나는 나약하게 울기 시작했고 여자라는 종족을 대신해 술에 전, 위스키로 희석된 눈물들을 떨어뜨렸다.”
광기와 울부짖음, 총체적 파국과 분열 속에서 이제 네 권의 노트들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지막 「황금 노트」 안에서 폭발하고 융해되며 종결된다. 레싱의 설명처럼 자기 파괴는 자기 치유를 위한 하나의 방식이며, 안나와 솔은 서로를 분간할 수 없는 광기의 끄트머리에서 추락의 막다른 지점에 도달함으로써 새로이 비상할 수 있는 출발점만을 남겨 놓는다. 이들은 서로가 생채기를 입히는 연인이 아닌 붕괴를 공유했던 형제라는 것을, “서로로부터 얼마나 빗겨 나가든, 서로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든, 언제나 한 몸의 육체이고 서로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형제”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공유한다. 그들의 작별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들의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서로가 염려하는 멀면서 가까운 우정을 예고한다.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울프의 고민 이후 많은 여성작가들은 남성적인 말하기의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실험들을 시도해왔다. 40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레싱의 『황금 노트북』이 ‘여성 해방문학의 고전’이라고 평가를 받는 이유는 울프가 지적했던 ‘불구처럼 비틀거리고’ ‘병적이며’ ‘히스테릭한’ 글쓰기를 한 시대의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성적 글쓰기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안나는 자신의 삶이 세계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고 있는 작은 난파선이라는 것을, 자신 역시 제1세계의 지배자이며 동시에 기만적인 좌파주의자이고, 오만한 여류작가라는 것을, 다른 여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상처받는 여자라는 것을 통찰할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 통찰한다는 것은 현실에 통합될 수 있는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자신을 지탱해왔던 모든 가치 관념과 환상을 제거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레싱에게 있어 그 시대의 여성이 벌거벗은 자신을 마주하면서 쓸 수 있는 글이란 광기와 슬픔 속에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것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은 어떠한가? 안나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을 광기와 분열로 몰고 간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여성작가들은? 세계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족쇄 같은 기억들을 이끌고”* “진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없어 길을 잃고 헤매는 여자들은 이제 없는가?
* 최승자 시집 『즐거운 日記』 중에서 인용.
-------------------------------------
필자 소개
이은정
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나, 각종 사조와 이론들을 뒤쫓는 것에 바빠 정작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인연이 운명이라고 월요일 독서클럽의 한 지인에게 포섭되어 문학도의 길로 이제 막 들어섰으며, 갈지자의 인생행로에 문학이 뜨거운 구원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역서로 『황금 노트북』(공역), 『아버지란 무엇인가』,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