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우슈비츠로부터 아프칸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연을 쫓는 아이』(현대문학, 2010)가 국내에 재출간된 것을 계기로 이 책을 정독한 일은 마치 잊고 있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 소설은 미국에 망명한 아프칸 의사 할레드 호세이니가 2003년에 쓴 첫 소설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배치하지 않은 정교한 서사적 전개, 섬세한 복선의 배치,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 감정처리가 풍부하고 매혹적이어서 독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묘사와 서술 등, 이 책은 다양한 소설적 장치를 솜씨 있게 활용하면서 시종일관 독자를 흡입시킨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소설을 읽는 재미와 감동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연을 쫓는 아이』가 단지 잘 짜여진 재밌는 이야기에만 그쳤다면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 역시 그저 재능 있는 한 작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책이 출간 후 5년 동안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에 기록되고 세계 51개국에서 번역 출간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근저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연을 쫓는 아이』가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회자되는 것은 이 책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고, 그 감동의 원천은 바로 이 책이 끈질기게 묻고 추구하는 진실성에 있다.
화자인 ‘나(아미르)’와 하산은 유모의 젖을 먹고 함께 자란 사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다. ‘나’는 부유한 집의 외동아들이고 하산은 하자라족(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으로 천대받음) 출신의 하인이다. ‘나’는 하산을 친구로 여기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당당하게 그를 친구라고 밝힐 만큼 용기가 없다.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계급문화와 하산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나’의 태도가 어떠하든 간에 하산은 인간적인 신뢰와 충직한 섬김, 그리고 형제 같은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아버지 바바는 아들의 강단이 없는 유약한 성품과 기질을 우려할 뿐 아니라 거기 대해 냉정하다. 아버지의 신뢰와 애정을 갈구하던 ‘나’는 카불의 연중행사인 연싸움 대회가 열리게 되자 우승을 다짐한다. 연싸움 대회에서의 우승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관문일 뿐 아니라 ‘내가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98쪽)’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우승한다. 그러나 ‘열두 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사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순간이 된다. 승리의 증표인 연을 주우러 갔던 하산이 그동안 ‘나’와 하산을 괴롭혀 오던 동네 아이들에게 겁탈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도망쳐버린다.
내가 마음의 결정을 내릴 마지막 기회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결정할 마지막 기회였다. 하산이 과거에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골목으로 들어가 하산의 편을 들어주고 싸우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결과를 감수하거나, 혹은 달아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달아났다.
내가 달아난 것은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세프가 두려웠고 그가 나한테 할 짓이 두려웠다. 나는 다칠 게 두려웠다. 나는 골목에, 아니 하산에게 등을 돌리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믿게 만들었다. 나는 실제로 비겁하고자 했다. 내가 달아나는 진짜 이유는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아세프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하산은 내가 바바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고 죽여야 하는 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공정한 대가였을까? 내가 막을 새도 없이 그에 대한 답변이 떠올라버렸다. 그래, 그 놈은 하자라놈일 뿐이야. (117쪽)
그로부터 5년 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바바 부자는 바바의 친구인 라힘칸에게 집을 맡긴 채 미국으로 망명한다. 하산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나’는 과거를 잊고자 미국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바에게 미국은 난민용 식량카드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회, 더 이상 나뭇가지를 신용카드로 사용할 수 없는 사회, 2년 동안 과일을 사러 드나들어도 수표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사회이다. 미국 내의 아프칸들은 그들끼리 모여 사교적 모임을 만들고, 문화적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젠다지 미그자라(삶은 계속된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나’는 결혼을 하고 바바는 죽음을 맞는다.
2001년 서른여덟이 된 ‘나’에게 아프칸에 남았던 아버지의 친구 라힘칸이 연락해온다. 라힘칸은 하산의 죽음을 알려주면서 그동안 감춰왔던 사실을 폭로한다. (하산은 바로 ‘나’의 이복동생이다.) ‘나’는 아프칸에서의 유년에 저지른 죄를 ‘속죄’하고자 무차별적인 살상, 가난과 배고픔, 비이성과 혼돈이 난무하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들어간다. 고아가 된 하산의 아들이 그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중략)
“작가라고요?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글을 쓰십니까?”
“네, 전에는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그렇다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쓰셔야할 것 같네요. 탈레반이 우리나라에 어떤 짓을 하는지 세상 사람들한테 알려주세요.” (347쪽)
20세기 초반의 영국 식민지, 1979년 소련침공과 이후 14년간의 공산당 집권, 1994년 탈레반 정권의 쿠데타 그리고 이후 끊이지 않는 내전 등,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아마도 할레드 호세이니에게 작가로서의 남다른 사명감을 부여했을 것이다. 『연을 쫓는 아이』의 화자 아미르가 조국에 남아 있는 형제 하산과 그의 아들에게 구하는 속죄는 바로 작가 자신의 속죄, 즉 조국 아프가니스탄과 그의 동포에 대해 갖는 죄의식과 연민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동시에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죄의식과 연민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버젓이 자행된 비인간적 행위들, 대량학살, 아동과 여성 학대, 바미안 석불파괴 등의 만행 앞에서 우리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이 과거의 아우슈비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우슈비츠 이후 대두된 개념인 ‘제노사이드genocide’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통해 형성된 서구적 휴머니즘, 인간 중심의 보편성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 중심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고도의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던 20세기에 인간이 자행한 대량학살과 무차별적 파괴 뒤에도 우리가 혹은 문학이 인간의 선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여기서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중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인간은 과연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과거로부터 배울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위기에 대해 증언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들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단지 그 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위기는 바로 인류 전체의 위기이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인류 보편의 고통이며 난도질된 그들의 역사는 바로 인류 전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배울 수 없다면 아우슈비츠의 역사는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엄중한 결론이다. (*)
아프가니스탄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유년이 없다. (468쪽)
용서는 화려한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이 자기 물건들을 챙기고 짐을 꾸려 한밤중에 예고없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532쪽)
전쟁은 품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평화로울 때보다 더 필요한 법이라오. (171쪽)
아프칸 사람인 나는 무례한 것보다 비참한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337쪽)
아프칸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거리의 거지가 내 어머니를 알고 있다는 걸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특히 카불에서는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만난 적이 없는 두 명의 아프칸 사람을 한 방에 10분만 둬보렴. 그들은 자기들이 서로와 어떤 관계인지 금세 알아낼 거다.” 바바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369쪽)
아프간 사람들은 ‘젠다지 미그자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시작과 끝, 캄야브(행)와 나캄(불행), 위기 혹은 카타르시스에 상관없이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먼지가 자욱한 코치(유목민)의 마차처럼 인생은 앞으로 느릿느릿 나아간다는 것이다. (5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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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어희재
영문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일한다.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오정희와 은희경 소설론(「우리 시대의 거울 - 두 편의 유년소설」)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