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타인만이 말을 가능하게 한다”
33인의 칠레 광부가 땅속에서 구출되어 나오는 그 주에 월요일 독서 클럽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우석균 역, 열린책들)을 읽고 있었다. 이 극적인 사건에 감격한 사람들이 와인 바에서 ‘오늘은 무조건 칠레산!’을 외쳤다는 풍문도 있지만, 우리가 하필 이때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물론 순전한 우연이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칠레라는 나라는 난생처음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광부, 그리고 문학가란 두 가지 모습으로.
『칠레의 밤』은 신부이자 시인이며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이기도 한 이바카체가 임종을 앞두고 늘어놓는 넋두리, 혹은 고백이다.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평온하게 흘러갔던 그의 인생이 갑자기 누룩처럼 부풀어 죽어가는 그의 눈앞에 불안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바카체는 이게 다 그놈의 ‘늙다리 청년’ 탓이라고 원망한다. 그의 일생동안 마치 그를 엿보는 사람처럼 언뜻언뜻 출몰하곤 하는 이 늙다리 청년의 정체는 그의 고백이 다 끝나도록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어쨌든 이 청년은, 평생 모든 일에 책임을 져왔으며 심지어 침묵조차 티 하나 없는 이바카체를 흠집 내기 위해 불과 하룻밤 사이에 무슨 말을 퍼뜨렸고, 이바카체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억을 낱낱이 더듬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바카체는 항변한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언제나 평화를 구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철권통치와 침묵의 시대에도 끈질기게 글을 발표해 왔을 뿐이라고. 네루다와 같은 문인을 존경했으며 가끔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했을 뿐이라고. 다만 학자로서 피노체트 장군에게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해주었을 뿐이라고.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고.
아옌데의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70년 이전부터 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독재와 어둠의 시기를 거쳐 공포정치가 끝난 이후까지 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옮긴이의 말>에 상세히 나온 대로 칠레의 실제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 역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역사와 정치, 문학이 마치 샴 세쌍둥이처럼 딱 붙어 다니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가령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힐만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처럼 말이다.
나는 데모스테네스와 메난드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다시 읽고, 파업이 발생하고, 어느 기갑 부대 대령이 쿠데타를 기도하고, 한 카메라맨이 죽어가면서 자신의 죽음을 촬영하고 아옌데의 해군 보좌관이 암살되고, 소요가 일어나고, 험악한 말이 난무하고, 온 칠레 국민이 저주를 퍼붓고 벽에 이념적 그림을 그리고,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아옌데를 지지하는 대행진을 벌였다. 그 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모네다를 폭격하고, 폭격이 그친 후 대통령이 자살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 그때 나는 읽고 있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대고 평온한 상태로 생각했다. 참 평화롭군. 나는 일어나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말 조용하군. 하늘은 파랬다. (99쪽)
그렇지만 『칠레의 밤』을 특정한 한 나라의 어두운 정치사를 다룬 정치 소설로, 혹은 한 시절을 묘사한 역사 소설로 읽고 만다면, 그거야말로 행복한 오독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던지는 보편적인, 그리고 아직도 진행형인 질문들은 외면한 채, 이제는 다행스럽게도 지나간 일이 되어버린 소름 끼치는 사건 앞에서 마음 편히 몸서리치며 개탄할 수 있을 테니까. 지나친 일반화와 보편적 해석에서부터 벗어나 역사적 구체성을 되살려야 할 소설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역사의 한 지점에 단단히 박혀버린 못을 뽑고 시공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회복시켜야 할 소설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칠레의 밤』은 분명 역사 속의 한 풍경으로 박제되는 것을, 그리하여 불멸성을 획득하는 대신 뽀얀 망각의 먼지를 뒤집어쓰기를 거부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문학적 공동체와 그 바깥의 관계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참으로 오지랖 넓게도) 타자에게로 열릴 수밖에 없는 문학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아옌데의 자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운데 두고 두 가지 동일한 장면이 반복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문인들의 모임이고 또 하나는 문인의 죽음이다. 전반부에서 문인들의 모임은 페어웰이라는 비평가의 농장에서 문인들의 우상인 시인 네루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아옌데 정권의 붕괴와 동시에 네루다가 죽고 장례식이 거행된다. 후반부에서 문인들의 모임은 미국인 남편을 둔 외모가 수려하고 젊은 여자 소설가의 교외 저택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페어웰이 죽고 장례식이 거행된다. 어쩌면 첫 번째 모임은 아직까지 ‘문학이 진정 장미꽃길이고 독서가 대단한 일이고 취향이 현실적인 의무나 필요보다 존중되는 그런’ 문학 공동체처럼 보인다. 반면 두 번째 모임은 통금이라는 시대적 제약 하에서 ‘가능하면 쾌적한 장소에서 똑똑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는’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유일한(완벽하지는 않지만) 공동체였다.
그러나 두 모임 모두에서 우연한 ‘길 잃음’ 혹은 ‘벗어남’이 일어나고, 그 일탈은 문인들끼리 모여 자위하는 공동체에 낯선 타자를, 불편한 외부를 불러들인다. 첫 번째 모임에서는 바로 주인공 이바카체 신부가 페어웰의 농장에서 길을 잃고 칠레의 가난한 농노들과 맞닥뜨리는 사건이다. 그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겁도 나고 구역질도 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농장 저택으로 돌아와 문인들만의 연회를 즐긴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남자 극작가인지 배우인지 하는 사람이 파티가 벌어지는 저택 안을 헤매다가 지하방 침대에 고문을 당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묶여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이 사람 역시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침묵을 지킨다.
물론 이 장면을 두고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채, 자기들만의 세계를 추구한 문인들에 대한 비판, 혹은 풍자로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쩌면 『칠레의 밤』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지 모르는데, 문학은 언제나 매번 길을 잃게 되어 있다는 것,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닫힌 공동체를 벗어나 이질적인 존재와 마주치게 되어 있으며 그 존재에 대한 책임(침묵의 형태로라도)을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신념이나 심지어 윤리적 선택과도 상관없는 필연적 속성이다. 몇 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두 번의 동일한 ‘길 잃음’은 문학 공동체의 운명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문학의 필연임을 믿지 못하겠다고? 지나친 오지랖이거나 과대망상이 아니냐고? 그렇다면 블랑쇼의 짧은 한 구절이 혹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오직 ‘타인만이 말을 가능하게 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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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최인자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영미권 소설 번역 일을 주로 하고 있다. 문학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문학으로 밥벌이까지 하고 있으니 평생 문학으로부터 넘치게 받아온 셈이다. 그러나 정작 문학에 되돌려 준 바는 하나도 없어서 요즘은 좋은 사람들과 모여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