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삶을 완성시키는 산문시 같은 소설”
삶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면, 역으로 죽음이 삶을 완결한다는 말도 성립될 것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민음사, 2003)는 죽음으로 삶을 완성시키는 산문시 같은 소설이다.
블라디미르 프롭 식의 민담형태소로 말하자면, 이 소설의 골격은 1)어머니 애디가 죽는다 2)가족은 장지로 향한다 3)죽은 자는 묻히고 산 자들은 삶으로 돌아온다, 로 구성되어 있다. 어머니 애디는 죽기를 기다리면서 누워 있다. 첫 장면부터 소설적이라기보다는 연극적이다. 묵묵히 일만 하는 목수인 장남, 캐시가 관을 짜면서 못 박는 소리가 관객의 귀에도 들린다.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던 어머니는 자기 관 짜는 소리를 들으며 평온하게 눈을 감는다.
애디가 죽자 남편인 앤스와 다섯 명의 자녀들(캐시, 주얼, 달, 듀이 델, 바더만)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무려 40마일이나 떨어진 제퍼슨까지 관을 운구한다. 비는 억장이 무너질 듯 쏟아져 내리고, 다리는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고 없다. 설상가상으로 관을 운구하던 주얼의 말이 세찬 물살에 휩쓸린다. 막내아들인 바더만은 엄마가 숨쉬기 힘들까 봐 관에다 구멍을 뚫어놓는다. 관에 물이 차고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 바더만은 엄마가 물고기가 되었다고 믿는다. 애디의 관을 안전하게 운구하는 과업은 중세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서 길 떠나는 여정만큼이나 고행의 연속이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제퍼슨에 당도한다. 제퍼슨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모습은 패잔병 무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관을 구하려다 다리가 부러진 장남 캐시,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감추고 있는 딸 듀이 델, 이빨 빠진 아버지 앤스, 정신 나간 아들 달, 분노로 사색이 된 주얼, 거지꼴인 바더만 등. 굵은 빗줄기 속에서 묵묵히 관을 나르고 있는 이 기괴한 오합지졸의 무리는 남루하지만 그럼에도 돈키호테처럼 위풍당당해 보인다.
애디는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로지 죽어가기 위해서’라고 했던 아버지의 저주를 삶으로 완성시키려고 한다. 학교교사였던 그녀가 백인 하층 노동자 중에서도 쓰레기였던 앤스와 결혼한 이유는 이 텍스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양갓집 딸로서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방법이 아버지가 분노할만한 남자를 데려오는 것이어서? 혹은 저속하지만 빤질빤질한 앤스의 외모에 반해서? 그녀는 앤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결혼한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남편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는데도 계속해서 아이는 생긴다.
애디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휫포드 목사를 유혹한다. 휫포드 목사와 관계하면서 애디는 그 순간 앤스를 죽인다. 그 이후부터 애디에게 앤스는 이름처럼 무無인, 아무것도 아닌 비존재의 존재가 된다. ‘그는 죽었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채. 원하지 않았던 셋째 아들 달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 자기가 죽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제퍼슨에 묻어줄 것을 약속하라고 강요한다.
죄를 지어본 적도, 사랑해 본 적도, 두려워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말들인 죄, 사랑, 공포. 애디에게 죄악은 신중하라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다. 죄를 창조한 다음 그 죄를 정당화한 하느님이 임명한 도구가 목사였다면, 눈부신 죄악의 옷을 걸친 휫포드 목사는 그래서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그가 걸친 옷은 하느님이 거룩하게 입혀주신 것이므로.
휫포드 목사는 애디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인도를 구한다. 그때 불어난 강물로 다리가 떠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과 위험의 증거로 보건대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될 것이므로 내심 기뻐한다. 그는 앤디가 죽기 전 자신의 죄를 남편에게 고백할까 봐 두렵다. 홍수의 위험이 하느님 사랑의 표시라고 우기면서, 그는 애디의 임종자리로 향한다. 그녀가 남편에게 고백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그녀의 남편에게 용서를 구걸하려고. 그녀의 집에 들어섰을 때 듀이 델로부터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 순간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하느님의 은총이 이 가정에 충만하도록 마음껏 축복한다. 애디가 죽은 마당에 그녀를 위해서라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소설에서 앤스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애디의 죽음과 더불어 무엇인가를 잃는다. 달은 엄마의 관이 놓여 있었던 헛간에 불을 지르고, 듀이 델은 오빠인 달을 고발한다. 달은 미쳤다는 이유로 잭슨 감옥으로 끌려간다. 달은 제정신도 잃고 자유도 잃는다. 주얼은 애지중지하던 자기 말을 잃는다. 캐시는 다리를 잃고, 목숨처럼 여기던 연장통도 잃는다. 바더만은 원했던 장난감 기차를 얻지 못한다. 듀이 델은 없애고 싶은 태아를 없애지 못하고 오히려 강간을 당한다. 그녀는 이제 ‘땅속에 뿌려진 씨앗처럼’ 불러오는 배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앤스를 제외하고 애디의 자녀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각자 잃는다.
그런데도 비열하고 뻔뻔한 아버지 앤스는 원하는 것들을 전부 손에 넣는다. 그 이유는 뭘까? 만약 처벌을 받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아무리 따져 봐도 앤스다. 그런데 정작 앤스는 까치도 아닌 주제에 헌 마누라를 묻으러 갔다 돌아오면서 새 마누라도 얻고 덤으로 의치까지 얻는다. 딸이 낙태하려고 모은 돈 10달러를 빼앗아서 해 넣은 의치 덕분에 그는 한결 젊어진다. 그는 가족을 위해 한 번도 땀을 흘려본 적이 없다. 듀이 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셔츠가 땀에 밴 적은 없다. 그의 셔츠에는 땀자국이 없다. 본 적도 없다.’ 듀이 델이 볼 때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하층계급의 가장이 땀을 흘리지 않으면, 그 가족의 삶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하다. 남의 노동에 기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족속이 귀족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집안에서 유일한 귀족은 아버지 앤스다.
그런 앤스가 동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애디의 유언을 들어주는 이유는 뭘까? 제퍼슨에 가서 헌 마누라 묻고 새 마누라 얻으려고? 아니면 살아생전 고생만 시킨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려고? 텍스트에서 그의 변명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앤스만 유독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이유는 뭘까? 오쟁이 진 줄도 모르는 남편이라는 점이 불쌍해서? 그 점에 관해서도 텍스트는 침묵한다.
고독과 저주의 말씀을 벗 삼아 죽어가던 애디는 죽어서 오히려 이 소설의 서사를 완전히 장악하는 공백이 된다. 그녀의 죽음으로 목사 휫포트의 위선, 달의 근친상간적 욕망, 듀이 델의 절망, 엄마에 대한 아들들의 제각각의 사랑의 방식이 드러난다. 요즘 늙은 부모가 자기 집에서 자식들을 전부 불러 모아놓고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임종은커녕 삶과 죽음은 집에서 추방당했다. 집이 ‘자아의 한 표현’이라고 본다면, 우리들 대다수는 집을 잃어버린 홈리스다. 삶과 죽음의 장소 모두를 병원에 넘긴 지도 오래다. 이렇게 보자면 온 가족의 희생 덕분에 장지로 갈 수 있었던 애디는 죽음으로써 자기 삶을 충분히 완성시켰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비열하게 늙은 아버지는 시원적인 아버지처럼 당당해진다. 평생 가난과 죄악의 옷을 스스로 입었던 어머니는 성모로 격상된다. 소중한 것들을 잃은 아들들은 성배를 찾아가는 기사가 된다. 이렇게 하여 포크너의 이 소설은 현실적으로는 더없이 궁핍한 남부 하층백인가족들에게 신화적인 위상을 부여해주는 세속적인 가족 로망스로 마무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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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지 <여/성이론>의 편집위원, 월요일독서클럽 회원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여/성이론>은 페미니즘 이론을 알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이론을 생산하기 위한 본격적인 페미니즘 이론지이다. 한국어의 '성(性)'이란 단어에서는 젠더(gender)와 성(sexuality)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이 둘을 모두 표현하기 위해 '여/성'에 빗금을 넣었다. 여성이라는 현재의 정체성을 만든 역사에 균열과 틈새를 내겠다는 의미다. 저서로 『페미니즘과 정신분석』(공저), 『식민지근대 여성 공간』(공저),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공저), 『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 등이 있고, 역서로 『고독의 우물』, 『노생거 수도원』,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보이는 어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