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하염없는 산책의 외양을 취한 내면적 여정의 소설”
페터 한트케라는 이름은 나에게 특별하다. 청소년 시절에 만난 외국의 작가인데, 어떤 뚜렷한 형상 없이 오랫동안 의식에 남아 있으면서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내가 읽은 그의 책 제목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상태로, 한트케라는 이름만을 간직한 채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독일에서 온 소포 속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짧은 편지 긴 이별 Der kurze Brief zum langen Abschied』.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중학생 시절에 영문을 모르고 읽었으며, 다른 아이들이 너나없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품에 안고 있을 때 홀로 한트케를 좋아한다고 믿게 만들었던 그 전설적인 책을 다시 발견했음을 알았다.
매우 로맨틱한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이 소설은 약간은 추리적인 형식을 가졌지만 내용상으로는 한트케적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내면적 여정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충격과 슬픔, 그로 인한 방랑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마지막에 화해의 몸짓이 암시되는 성장소설적인 측면도 있다. 단지 여기서는 그 방랑의 장소가 유럽이 아닌 미국이며, 뉴욕에서 시작하여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할 뿐이다.
주인공인 화자가 미국 뉴욕 인근의 웨이랜드 메노르 호텔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호텔 접수계에서 그는 아내 유디스가 보내온 편지를 건네받는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뉴욕에 있어요. 나를 찾지 말아요, 날 다시 보게 되면 유쾌하지 않은 일이 생길 거예요.” 이 편지는 주인공을 갑작스럽게 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되돌려 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미군의 폭격을 피해 집안으로 들려가던 기억, 현관문 앞에서 번득이던, 토끼를 잡고 난 다음의 핏자국들, 그리고 그 폭격으로 인해 주인공이 사랑하던 어떤 인물―아마도 어머니―이 숲 속에서 영영 나오지 않게 되었던 충격과 공포의 기억으로. 그동안 주인공과 유디스는 서로 증오하면서 살아왔다. 편지의 경고를 무시한 채 주인공은 유디스가 닷새 전까지 머물렀던 뉴욕으로 찾아갈 결심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주인공의 여행은 미국 대륙을 완전히 가로질러 횡단하며, 도중에 주인공은 일종의 ‘대체-유디스’에 해당하는 예전의 애인 클레어를 만나 잠시 동행하기도 한다. 유디스는 주인공에게 감전장치가 되어 있는 소포를 보내기도 하고, 또한 유디스의 사주를 받은 어린이 갱단이 주인공을 습격하여 돈을 빼앗기도 한다. 주인공은 유디스를 추적하는 동시에 유디스에게 추적을 당하는 입장이며,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한 여인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그 여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평양 연안의 한적한 작은 마을 트윈 록스의 버스 정류장에서 주인공은 유디스를 만나게 된다. 유디스는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총을 겨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던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라타고 함께 캘리포니아로 간다. 그곳에서 영화감독인 존 포드를 만나 노감독으로부터 예술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평화로운 방식으로 서로 작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은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지만, 이 글은 사실 어느 두 젊은 남녀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집중하고 있다기보다는 글 쓰는 이 자신, 사고와 인식의 어떤 “주체”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므로 책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이들 남녀가 왜 이처럼 파국으로 가게 되었나, 이들이 과연 다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까”하는 객관적이고 표면적인 사실에 대한 의문과 해답 찾기가 아니다. 대신 주인공이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감각하는가, 그에게 언어란 세계와 소통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 매개인가, 자연이란, 기억이란, 그리고 인간이란 글 쓰는 사람―작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이 글에서 어떤 형태로 발현하는가 하는 점들이 이 소설의 진정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달아난 아내, 불화의 부부, 그리고 서로에게 적의와 폭력을 행사하는 한때의 연인이라는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외양을 갖춘듯하지만 사실 이 소설은 한트케 특유의 자전적이며 매우 내향적인 일인칭 글쓰기 소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트케의 독자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이 종종 “길고 하염없는 산책”의 외양을 취하고 있음을. 『짧은 편지 긴 이별』을 비롯하여 『페널티킥을 앞둔 골키퍼의 불안』, 『진실된 감정의 시간』, 『느린 귀향』, 『반복』 등의 작품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주인공들이 긴 여정에 오르며, 불안과 공포, 피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발되는 현실의 이질적인 낯섦과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 그러한 길 위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사물의 풍경은 주인공의 내면과 조우하고 반응하여 마침내 한트케식의 언어 자체가 만들어지고, 그 언어는 주인공 주변의 풍경과 현실을 새로이 구축해버린다. 예를 들자면, 『페널티킥을 앞둔 골키퍼의 불안』은 다음과 같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사실을 전달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한트케의 언어가 앞으로 책 속에서 만들어내게 될 불길한 현실의 신호음과도 같다.
“한때 이름이 알려진 골키퍼였으며 현재는 기계 조립공으로 일하는 요제프 블로흐는 어느 날 아침 일터에 나갔다가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더구나 인부들이 모여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공사장 가건물 안을 들여다보자 단지 작업반장 한 명만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으므로, 블로흐는 그것을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신호로 해석하고 공사장을 떠났다.”
한트케의 언어는 사물과 사건의 묘사에 헌신하고 있지 않다. 도리어 한트케의 글에 등장하는 사물이 그의 정신과 언어에 헌신하는 형식이라는 느낌이다. 『페널티킥을 앞둔 골키퍼의 불안』에서도, 사건의 묘사와 주인공의 행적은 매우 객관적인 효과를 자아내는듯한 문장으로 이루어졌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은 유일하다고 할 만큼 주관적인 정신으로 이루어진 어떤 세계가 창조되는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은―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신경증적이며 고독하고 불안한데, 그의 신경증과 고독과 불안은 대상이 되는 주변의 무의미한 사물들을 관찰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면서, 마치 인간이 어느 특정한 상태에 있을 때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책장을 넘길수록 더욱 고요하게 증폭된다. 전직 유명 골키퍼 블로흐는 직장을 잃었고, 공포와 불안으로 충동적 살인을 저지른 후 국경 지대 마을로 도피한다. 그 마을에서는 아이의 실종 사건이 있었다. 숲 속을 헤매고 다니던 블로흐는 아이의 시체를 발견한다. 낮게 드리워진 먹구름 같은 예감이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지만, 충동적이고 짧은 살인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특별한 격함이나 감정의 표출도 극히 자제되어 있다. 대신 한트케가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하는 자연이나 거리의 풍경 등이 대개 주인공 내면의 깊은 심리적 심연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항상 일정한 정신적 거리를 두고, 그래서 도리어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늪지의 풀숲 속에서 흰 나방들이 여기저기 흐느적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내 귀는 머리에 달라붙은 채 무겁게 늘어진 물체로 변해버렸다. 마치 오래전 그날, 내가 이른 아침의 희미한 햇빛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나, 내 곁에 누운 할머니가 막 숨이 끊어진 것을 발견했던 날처럼.” (『짧은 편지 긴 이별』 중)
금세기에 들어와서 페터 한트케를 말할 때, 언급할만한 새로운 사실이 있다. 현실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드러내는 문학적 경향에 줄곧 반대 입장을 취해왔고 그로 인해 소시민적 지식인 문학의 한계에 머문다는 비판을 받아온 한트케지만, 작가가 아닌 개인 한트케는 비정치적 소시민은 아니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그가 『관객모독』이라는 실험극으로 유명해졌다면, 90년대 코소보 전쟁 이후 한트케라는 이름은―독일에서 마르틴 발저가 그런 것처럼―매우 위험스러운 정치적인 의혹과 논쟁에 관련되어 미디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브레히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술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예술이 설사 그런 효력을 우연히 나타낼 수는 있을지라도 예술 자체는 그런 의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예술가가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리라.
한트케는 1996년 『겨울 여행기 - 도나우, 사베, 모라바, 드리나 강을 따라서, 혹은 세르비아를 위한 정의』를 발표한 후 세르비아의 전쟁범죄를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국 그들의 행위를 변호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휩싸였다. 2004년 한트케는 캐나다의 작가 로버트 딕슨이 주도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이었으며 민족말살 등을 이유로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위한 예술가들의 선처문에 서명했다. 이때 함께 서명한 작가 중에는 이듬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극작가 헤롤드 핀터도 있다. 2006년 밀로셰비치가 사망하자 한트케는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연설을 하기도 했다. “인종청소”라는 용어를 만든 비인간적 유고슬라비아 사태의 전범을 공개적으로 옹호한다는 이유로 한트케는 전 세계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파리의 코메디 프랑세즈는 계획되어 있는 그의 희곡 공연을 취소했고, 그해 6월 한트케는 정치적인 논쟁의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수여되는 독일의 하인리히 하이네 문학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지만 국제사회에서 세르비아의 입장에 대한 한트케의 지속적인 옹호는 오늘날까지도 유럽 지성계에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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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배수아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잡지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서 "신인작가 작품공모"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공무원과 소설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오가면서 글을 썼던 그녀는 간섭받지 않고 글에 몰두해 보기 위해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3~4개월씩 체류하면서 작품을 써 왔으며, 그 곳에서 발견한 작가 야콥 하인의 첫 번째 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번역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그 사람의 첫사랑』, 『붉은 손 클럽』, 『철수』, 『이바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에세이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 등을 펴냈다.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단편 「무종」으로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