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신적 노작의 외적 성취와 성공을 위대함으로 치환시키는데 어떤 주저함을 갖지 않는다면 누구나 그녀를 위대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 나는 간혹 날개를 가진 사람, 혹은 불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분명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배수아, 『당나귀들』, 「존 쿳시J. M. Coetzee의 <동물의 생>으로 시작되는 리스트」 중에서)
이것은 존 쿳시가 2003년에 출간한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왕은철 역, 들녘)에 대한 글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늙은 여자,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대한 글이다. 이례적인 폭염과 폭우에 시달리는 이런 때, 근사한 휴양지를 대신할만한 흥미로운 한 권의 책도 아니고 산들바람처럼 산뜻하고 매력적인 아가씨도 아닌, ‘늙은(여기에는 물론 비합리적인 깐깐함, 단지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가지는 근거 없는 자만심,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데서 오는 뻔뻔함, 육체의 누추함 등등의 속성이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여자’를 소개하는 것을 부디 양해해 달라. 젊어서 죽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다 늙는다. 이것은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명제만큼이나 기분 나쁠 정도로 명백한 진실인데, 사실 죽음은 찰나의 경험인 반면(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도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늙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매 순간 겪어야 할 경험이란 점에서 더 잔인한 진실이다. 우리는 ‘죽은 자신’은 볼 수 없지만, ‘늙은 자신’은 반드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날마다 찬찬히. 심지어 늙음은 가장 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어야 할 죽음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무마시켜버리는 힘을 지녔다.
“나는 진지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이겠지. 스무 살에 자살하면 비극적인 일이 되겠지. 마흔 살에 자살하면 시대에 대해 진지하게 뭔가를 말하는 것이 되겠지. 그러나 일흔 살에 자살하면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일이네. 그 여자는 암에 걸렸음이 틀림없어’ 이렇게 말하겠지.” (쿳시, 「여자가 나이를 더 먹으면」(<현대문학> 2005년 1월호))
그 지독한 지루함 때문일까? 죽음과는 달리 ‘늙음에 대한 성찰’은 문학에서조차 썩 환영받는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령화 시대에 늙음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 탓인지, 최근 들어 ‘늙은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들이 꽤 종종 발표되는 추세이다. 한동안 월요일 독서클럽에서는 저명한 남자 소설가들의 작품 몇 편(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 살만 루시디의 『분노』,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존 쿳시의 『슬로우 맨』 등)을 연달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작가의 국적도 제각기 다르고 소재도 전혀 다른 그 책들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어느 정도 사회적 명성과 재력을 갖춘 늙은 남자들(평균 70세쯤 되는)이었다. 그런데 이 각각의 책들을 단순히 일반화하지 않고 독자적인 가치를 평가해주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발견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이 늙은 남자들이 점잖게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고상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젊은 여자에게 홀딱 빠져 어떻게든(비아그라의 힘을 빌려서라도) 마지막 욕정을 쏟아내고 싶어 절절 맨다(이 통속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용서하라. 하지만 작품을 읽어보면 이 표현이 결코 과언이 아님을 알 것이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늙음이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의 여정을 지나왔고 얼마나 높은 정신적 수준에 도달했는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하나의 동일한 욕망으로 수렴되는 퇴행 과정에 불과하단 말인가? 우리는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늙은 여자는 어떠한가? 늙은 남자와는 달리 성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은 늙은 여자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 이상 불태울 욕망도 없이, 인생 마지막의 애처로운 에피소드도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소멸해버리는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이 의문에 대한 어쩌면 유일한 대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늙은 여자’가 중요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을 만나기가, ‘늙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자신이 스스로에게 붙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수식어들에도 불구하고, ‘늙은 여자’를 자기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플턴 대학 강연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저는 늙은 여자입니다. 저한테는 의미하지 않은 것들을 말할 시간이 더 이상 없습니다.”(『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물론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그저 평범한 ‘늙은 여자’는 아니다. 1928년 멜버른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홉 권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 새에 관련된 저서 한 권과 상당한 분량의 논픽션을 저술한 주요 작가이며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가 쓴 전설적인 모더니즘 소설 『율리시즈』의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의 부인 메리언 블룸을 중심인물로 한, 그녀의 네 번째 소설 『에클즈 스트리트의 집』(1969)은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그녀의 이름을 딴 계간지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학회까지 생겨났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늙은 여자 작가인 것이다.
일곱 가지 주제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담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읽어보면, 여자가 오랫동안 글을 쓰며 사유하고 늙었을 때, 리얼리즘이나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동물들의 삶,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 악의 문제, 에로스, 믿음과 같은 미묘하고 선뜻 말하기 힘든 주제에 대해 얼마나 의연하면서 진지한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작가로서의 자아도취나 자기기만이라고는 전혀 없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끝까지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주의나 객관성 혹은 화려한 수사 따위를 방패 삼아 자신의 논지를 두루뭉술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녀한테는 의미하지 않은 것을 말할 시간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늙음이란 회피와 한없는 너그러움과 화해의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것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불평하는 시간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전에는 웃었지만 더 이상 웃지 않는 사람이다. 울고 있는 사람이다.” (「여자가 나이를 더 먹으면」)
이토록 진지하게 사유하는 늙은 여자와 절박하게 욕망하는 늙은 남자가 만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닌 작가 쿳시는 최근작 『슬로우 맨』(들녘)에서 이런 만남을 주선한다(아마 추리 소설 같은 시리즈물을 제외하고, 한 작가의 서로 다른 작품에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 인물은 그녀가 처음일 것이다). 자신의 다리를 사고로 잃고 나서 간병인 여자의 매끈한 다리에 반해서 그녀에게 모든 걸 다 주고 싶어 안달하는 늙은 남자 레이먼트 앞에 난데없이 ‘스토리를 교란시키며’ 나타나는 늙은 여자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양면을 구현하고 있는 이 두 인물이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하거나 최소한 마주 보게라도 만들기 위해 애를 쓰지만,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는 끝내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결국은 인정하고 마는 듯하다.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이 이 땅 전체를, 그러니까 이 넓은 갈색 땅 전체를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닐 수 있겠네요. 당신은 나한테 집요함을 가르쳐주고, 나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없이, 거의 아무것도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 거예요. (…) 대단한 생각이에요! 폴, 이것이 사랑인가요? 결국 우리는 사랑을 찾은 건가요?”
(…) 그는 다시 안경을 끼고 돌아서서 그녀를 자세히 바라본다. 그는 오후의 깨끗한 빛을 통해 머리 하나 힘줄 하나까지 모든 걸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는 그녀를 살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그가 마침내 말한다.
“아니,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뭔가 다른 것이에요. 그보다 덜한 것이라고요.”
이 대목에 이르면,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 우리가 사랑하는 늙은 여자 엘리자베스,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말아요. 그는 그대를 보지 못하는, 다리를 잃은 늙은 남자일 뿐이에요. 당신은 우리의 날개 달린 프로메테우스, 당신에게는 더 이상 인간의 생이 필요하지 않아요.’ (*)
-----------------------
필자 소개
최인자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영미권 소설 번역 일을 주로 하고 있다. 문학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문학으로 밥벌이까지 하고 있으니 평생 문학으로부터 넘치게 받아온 셈이다. 그러나 정작 문학에 되돌려 준 바는 하나도 없어서 요즘은 좋은 사람들과 모여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