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주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존재, 에리카”
“‘고문문학’의 특별한 경지를 맛보는 ‘기쁨’”
‘뉴프렌치 익스트리미티’라 불리는 프랑스 영화들이 있다. 2000년대 들어 프랑스 및 독일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극단적 호러 영화들이다. 노골적이고 집요한 폭력과 성적 표현으로 차마 눈뜨고 봐주기 힘든, <익스텐션(2003)>, <프론티어(2003)>, <인사이드(2007)>,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2009)>. 이 영화들은 사지 절단과 같은 고어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면서도, 희생양에 대한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고문에 집중한다. ‘견딜 만한’ 폭력이 집요하게 반복되면서 관객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어느새 관람 행위는 고문 체험으로 변한다. <씨네21>의 한 평론가는 지난해 국내 개봉했던 <마터스>를 본 뒤 ‘사흘을 앓았다’는 평을 쓸 정도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을 읽는 동안, 이와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된다. 어떻게 문자로 전달하는 소설이 시각에 기댄 즉자적인 영화만큼이나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옐리네크의 소설이 이 극단적인 뉴프렌치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옐리네크의 천재적인 독설 덕분이다. 옐리네크의 언어는 어떤 고문기계보다 월등하다. ‘뉴프렌치 익스트리미티’들이 피 튀기는 화면을 통해 수동적 희생양의 줄기찬 고통을 관람객의 눈앞에 들이민다면, 옐리네크는 월등한 언어 기술을 유일한 고문 수단으로 구사한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옐리네크의 독설을 피해 갈 수 없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인물 내면의 끔찍한 충동과 타인에 대한 혐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언어의 고문 세례가 독자의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옐리네크의 모든 소설은 차가운 독설을 담고 있다. 그 독설의 중심에는 성(性)과 폭력이 있다. 남녀의 성적 결핍과, 그 결핍을 강제적으로 메우려는 폐쇄적인 가족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이 동원된다.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 Die Klavierspielerin』에서 주인공 에리카의 성적 결핍감은 스스로를 ‘공격 기계’, ‘자해 기계’, ‘관음 기계’로 만든다. 『피아노 치는 여자』가 공포 영화의 화면보다 무시무시한 까닭은 옐리네크가 까발려 보여주는 진실 때문이다. 진실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진실만큼 서늘한 게 또 있을까. 옐리네크는 『피아노 치는 여자』를 통해 괴물로서의 여자의 진짜 내면을 피아노 연주를 하듯 들려준다. 주인공 에리카가 연주하는 슈만과 슈베르트의 정신적 음악 아래서 끔찍한 성(性)관계와 폭력의 선율이 흐른다.
독설과 조롱의 언어로 점철된 이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오스트리아 빈 시립음악원의 피아노 선생인 에리카는 서른여섯 살이다. 어릴 때부터 딸을 죄수처럼 구속하고 집착하는 엄마와 아파트에서 둘만 살아왔는데, 발터 클레머라는 젊은 남자 대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되면서, 에리카가 이 남자와 변태적 성관계를 맺게 되는 이야기다. 에리카는 주인공답게 누구보다 특별한 여자다.
‘그녀는 날 때부터 노래나 연주를 위해 예정된 존재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그것이 어머니의 이상일 것이다.’ (36쪽)
‘에리카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297쪽)
주인공 에리카는 ‘닫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잠겨있는’(65쪽) 동시에, ‘목수라면 누구나 여자에게 다 구멍을 만들어놓았을 바로 그 자리에 에리카는 커다란 나무토막이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74쪽)
에리카는 이처럼 진실로 완전한 존재일 뻔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에리카는 피아노 선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예술만이 도저한 시간의 흐름에 비껴 있다고 생각하는 에리카는 엄마가 짠 튼튼한 둥지 아래에서 감금되어 자랐지만 둥지 밖을 나가면, 초라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에리카는 면도날로 자해를 일삼을 수밖에 없다. 엄마와 한 침대에서 나란히 잠을 자고,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 노릇까지 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에리카. 엄마가 원하는 뭔가가 될 수 없었으므로, 죄책감에 가득 찬 채 나이 든 여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에리카를 프랑스 익스트림 호러들의 여주인공들처럼 불쌍하고 수동적인 희생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에리카는 (엄마와 클레머에게 각각) 고문을 당하는 대상이긴 하지만, 고문을 계획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에리카는 성적으로 지배받기를 원하지만, 강력하게 성을 지배하기를 원한다. 에리카는 핍쇼장에서 벗은 여자들의 몸을 몰래 들여다보는 동시에, 거리에서 남자들이 누구보다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괴물 같은 여자, 에리카의 모순된 모습이다.
이 소설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 La Pianiste>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화는 섬뜩한 정서를 깐 매끈한 화면 속에서 조용한 충격을 선사한다. 하지만 원작인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는 훨씬 더 강렬하고 에너지로 넘친다. 소설은 끝까지 읽기가 벅차고 고통스럽다. 독설 탓도 있지만 옐리네크의 독창적인 진술 스타일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조롱하는 듯 옐리네크는 상황 묘사를 일부러 부정확하게 하거나, 대부분 생략한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힘쓰는 상황묘사를 한 두 줄로 처리한다. 정확한 묘사와 인물 간의 대화가 차지해야 할 곳은 대신, 인물 관계에 대한 직접 설명, 에리카의 내면 심리에 대한 심층적 직접 진술, 사회구조에 대한 조롱과 논평, 같은 문장을 변형해 끝도 없이 반복하는 천재적 언어유희가 메운다.
그래서 독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움직이는 에리카의 행동을 핍쇼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보고 있는 듯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상황은 부분적으로만 유추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적 제한 위로, 옐리네크의 우레와 같은 설명이 쉼 없이 내리친다. 독자는 읽어갈수록 극단적인 감정의 극한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건 옐리네크의 목소리와 더불어 독자 각자의 머릿속에서 부분적 장면을 끌어모아 스스로 어떤 전체 화면을 완성하면서 각자의 공포와 대면하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에리카의 나쁜 행위들, 사랑에 대한 양가감정, 역겨울 정도로 적나라한 몸의 배설 반응들은, 원기 왕성한 남자 대학생 발터 클레머에게 두려운 여성주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많은 공포 영화에서 남성 감독들이 여성들을 가장 나약한 존재로 상정하고 아무런 이유 없이 참혹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죽여 나가는 동안,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성이라고 위로하는 동시에 나약한 존재로 전시하는 동안, 옐리네크는 무시무시한 에리카 내면의 극렬한 고통과 힘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남자 대학생 발터 클레머가 얼마나 그런 여성을 두려워하는지,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게 되는지, 커튼을 활짝 열어 보여준다. 『피아노 치는 여자』에는 결핍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으나 예정된 실패를 겪는 ‘여자’가 있다. 하지만 무력한 희생양이나, 자기 연민에 찬 여주인공은 없다.
피아노 소리 아래로 물줄기가 흐른다. 에리카의 베어진 살 틈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이 시냇물처럼 흐른다. 끔찍한 진실은 늘 멋진 소리와 글자 아래로 겹쳐 흐르는 것 같다. 격렬한 문자들을 끝까지 읽어내는 괴로움을 감수한다면 여성의 다른 내부뿐 아니라, ‘고문문학’의 특별한 경지를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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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채윤정
약대를 졸업하고, <헬스조선> 편집장을 지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든 잡지 <허스토리>의 기자로 일했고, <한겨레21> 객원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이며,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