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사실에서 출발한 훨씬 더 풍요롭고 감미로운 거짓”
“소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현실 역시 사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아니다”
소설의 중심에는 하나의 커다란 텅 빈 구멍이 자리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이 구멍은 다양한 이름들로 불려 왔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그것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은 ‘거짓’이다. (픽션이라는 명칭에는 그것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분명한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거짓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아주 단순한 명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은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 사이에, 현실과 이상 사이에, 세속의 시간과 영원의 시간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어려운 일이다.
가령, 며칠 전 나는 우연히 한 사람을 알게 되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가슴의 떨림을 경험했다. 그때 이후로 나의 모든 신경과 사고는 이 만남을 다시 음미하고 분석하는 것에 바쳐졌으며, 모든 우연과 필연의 논리적 추론을 동원해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모종의 연애관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자, 그렇다면 하나의 연애가 시작되기 위해 진실로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사실에서 출발한 훨씬 더 풍요롭고 감미로운 거짓이라는 것을 누가 과연 부인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실은 사실의 영역보다 거짓의 영역에서 더 많은 숨을 내쉬고, 절망하고 희망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반박할 수 있겠는가?
소설의 가장 안쪽, 내밀한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거짓’이 숨기고 있는 가장 큰 비밀은 그것이 실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모든 힘의 원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소설은 때로는 희망이나 절망으로, 때로는 공포나 환상으로, 또 때로는 ‘개연성 있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장하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침입해 들어오고, 사실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현실 역시 사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아니기 때문에 소설은 현실을 모방하고, 장악하기도 하며, 새로이 창조하기도 한다.
소설이 삶과 맺고 있는 이런 불가분의 관계, 또는 현실이 거짓과 맺고 있는 불가해의 관계는 그러나 소설이 처음으로 시작된 기원에서가 아니라 최근에서야 탐색되기 시작했다. 소설은 마티스가 과감하게 대상과 대상의 경계를 빨간 물감으로 지워내고 피카소가 인물의 완결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윤곽을 해체할 때,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가 현실과 몽환 사이를 이어주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니 아마 책 목록에 대한 목록을 찾아 방황을 했다.”(130-1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픽션들 Ficciones』이 보여주는 소설적인 방황을 한마디로 정리해야 한다면, 무엇보다 책을 말하는 책들 사이에서의 방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함께 할머니로부터 영어를 습득하면서 자라난 보르헤스는 청소년기에는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 그리고 라틴어를 배우면서 자랐다. 그에게 이런 다양한 언어들의 습득은 라틴아메리카라는 지역성을 벗어나 세계주의(cosmopolitan)를 획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많은 연구자들이 평하지만, 그보다는 하나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들이고 또 다른 책들을 찾아 나서게 만든 모험을 시작하게 해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픽션들』에 포함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나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바벨의 도서관」은 이런 책들 사이의 방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로, 그는 여기에서 다양한 판본의 백과사전에서부터 저명한 학자에 의해 씌어진 지리학 부도들과 어원학 사전들을 탐색하고, 중세의 전기와 말기에 성행했다 몰락한 다양한 비교(秘敎) 종파들의 신지학 이론들을 독파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이런 방대한 탐색이 하나의 소설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글자들의 행간 사이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바로 읽는 행위 안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자들은 모두 독자라고 불릴 수 있으며, 독자는 읽은 행위 속에서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책이 전달하려는 내용과 일종의 밀고 당기는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하나의 책이 다른 책을 끌어들이는 것은 싸움의 논의를 보충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 끝없는 논박의 길들 위에서 독자는 책들의 연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책과 독자의 이러한 싸움은 수학적인 운동으로 변환시켜보면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영원한 경주」와 같은 것으로, 거북이를 따라잡으려는 독자인 아킬레스는 자신보다 열 배가 느린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북이는 아킬레스의 보폭을 미리 규정하고 있는 일종의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책들이 그려내는 이런 영원한 궤적은 또한 시간의 횡단면이 아닌 공간으로 치환할 경우에는 육각형의 원통 모양으로 끝없이 위아래로 펼쳐져 있는 「바벨의 도서관」이 된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된 우주”(129족)라고 부르며, 독자를 이 끝이 없는 도서관에서 <신>이라 불릴 수 있는 한 권의 유일한 책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에 비유한다. 무한한 우주에서 그것들을 움직이는 하나의 질서, 다시 말해 모든 책 목록에 대한 목록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책을 찾아 나서는 순례자들은 다양한 방식의 방법론을 고안해냄으로써 비전을 전수받는 신비주의자나 흄과 같은 회의론자, 또는 언어를 분석하는 분석철학자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가정―한 권의 절대적 책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실제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형이상학자들은 <Als Ob>의 철학을 통해 끝없이 철학을 자기 증식시키는 자들이다. <Als Ob>란 가정법에 사용되는 독일어 전치사구로 ‘만일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면’과 같은 가정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사실적 상황, 다시 말해 사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아직은 사실이 아닌 이러한 상황 설정은 무한한 형태의 논리적 유추를 가능하게 하며, 그로 인해 무한한 방향의 결과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정수의 세계에 허수가 들어와 파생될 수 있는 효과를 생각해보라.)
사실에 근거한 결과가 아니라 허구에서 유추한 추론이 갖는 효과는 현실의 세계에서 비현실적인 소망들이 갖는 효과와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금은 아닌’ 것을 ‘아직 아닌’ 것으로 기대하게 만들고 ‘지금은 없는’ 것을 ‘아직은 없는’ 것으로 희망하게 만든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시간들에 의해 소멸될 운명을 띄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미래가 안겨주게 될 희망들이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자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그려내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형이상학은 “환상문학의 한 지류”(34쪽)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독자와 철학자, 그리고 작가 사이를 이어주는 하나의 알레고리를 만날 수 있다. 작가란, 그중에서도 소설가란 사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에서 말의 유희를 생산하는 자이다. 소설가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거짓이라는 것을 숨겨야만 진정한 소설가가 될 수 있으며,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논증과 변론, 증거와 사실들을 사용한다. 그런데 만일 독자가 책을 쫓는 와중에 자신에게 타당해 보이는 하나의 가정을 설정하게 되고, 그 지점에서 다시 책의 연쇄를 뒤쫓아 어떤 궤적을 그려내게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책에 대한 소설이 된다. 책은 독자를 항상 앞서 가지만, 독자는 이 뒤쫓는 추격 속에서 어느덧 책들에 대한 새로운 책을 생산해 내는 작가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 역전의 순간에 아킬레스는 거북이 한 마리를 따라잡고 (물론, 그의 앞에는 무한한 거북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빌론의 도서관은 그의 책 한 권이 추가됨으로써 보다 영원해지게 된다.
보르헤스는 『픽션들』의 서문에서 “보다 그럴듯하고, 보다 무능력하고, 보다 게으르게도 나는 상상의 책 위에 씌어진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를 선호했다”(16쪽)고 밝히고 있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보르헤스 문학에 대해 환상적 사실주의나 독자반응 이론,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이론들을 부여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들보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먼저 책을 탐독하는 독자였으며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하나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어가는 동안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책들에 대한 책들 사이의 방황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래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독자와 책의 관계가 소설가와 소설의 관계로 탈바꿈되는 이 이야기들은 보르헤스 소설들의 중심적인 내용이면서 보르헤스 자신의 소설이론이고 동시에 그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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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은정
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나, 각종 사조와 이론들을 뒤쫓는 것에 바빠 정작 문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인연이 운명이라고 월요일 독서클럽의 한 지인에게 포섭되어 문학도의 길로 이제 막 들어섰으며, 갈지자의 인생행로에 문학이 뜨거운 구원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역서로 『황금 노트북』(공역), 『아버지란 무엇인가』, 『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