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허다한 이야기들”
“비밀 한 가지쯤 덮어두고 살지 않는 혈연이 있을까?”
여기 한 가족농장이 있다. 장자상속의 관습을 지닌 네스호브 농장이다. 이 농장을 가동시키는 엔진은 큰아들 토르. 토르는 부모님이 노쇠하자 몇 년 전까지 계속하던 소 사육에서 업종을 바꾸어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다. 돼지야말로 네스호브 농장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돼지 새끼 판 돈으로 부모님과 토르 세 사람이 먹고 입고 자고, 다시 돼지 사육을 하기 위한 사료와 물품들을 사들인다. 돈은 한정적이고 쓰임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 전통적으로 노르웨이는 자급자족형 농가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아직까지도 이런 형태로 가족농장을 꾸리는 사람들은, 살을 깎는 절약으로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토르 역시 마찬가지여서, 옥수수를 재배하여 돼지사료와 맞바꾸기도 하며, 사료 배달료를 아끼기 위해 몸소 판매장까지 실으러 가거나, 포도주 한 병 사는 것도 손을 벌벌 떨 정도의 내핍생활을 한다.
다행스럽게도 토르에게는 철두철미한 절약과 몸에 밴 근면과 눈 떠서 자리에 누울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는, 몸으로 때우는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타고난 농군의 기질이 있다. 또한, 일중독에 가까울 만큼 열심히 일하며, 돼지와의 교류를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보기 드물게 성실한 농장경영자이다. 토르에게 돼지의 의미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그 ‘아이’(토르는 돼지를 이렇게 부른다)들은 친구이며, 연인이며, 자식이나 진배없다. 그가 좋아하는 돼지는 아이 쑥쑥 잘 낳고 영리한 시리, 처음으로 아이를 낳았지만 앞으로 농가수입을 올려줄 것이 분명한 사라 등등이다. 농군이자 사육사인 토르에게 가족적 사랑이나 친밀감은 노동 가치 혹은 환금성과 맞먹는 현실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능하고 빙충맞은 아버지는 경멸받아도 싼 존재이며,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은 존재이다. 반면 분뇨 향기 가득한 돼지는 껴안고, 쓰다듬고 볼 맞추며, 마음속에 있는 말을 토로할 수 있는 대상이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돼지들과 함께 하며 가장 아끼는 먹을거리를 기꺼이 나누어 준다. 그에게 돼지는 진정한 가족/축인 셈이다.
토르의 어머니 안나는 지금은 늙었지만, 할아버지 탈라크로부터 이 농장을 직접 물려받을 정도로 농장경영에 탁월하다. 야심 찬 촌부라고나 할까? 그녀는 부지런하고 근면하며, 매사에 빈틈이 없다. 토르가 농장의 엔진이라면 안나는 핸들인 셈이다. 안나는, 그 모든 것을 관장하면서 농장의 미래를 위해 한 몸 바쳤다. 병석에 계신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삼 년간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내 시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 부분은 전후관계가 바뀔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농장을 이어받을 든든한 사내아이를 셋씩이나 뽑아냈고 그중 대를 이어 농장을 경영할 큰아들 토르를 일등농군으로 훈련시켰다. 또한 어머니 안나는 아들의 연인을 단호하고 깔끔하게 뒤처리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 계기는 토르네 집을 처음 방문한 토르 애인이, 어머니가 만든 파이 조각을 너무 두껍게 썰어 먹은 데 있다.
“혹시라도 시씨가 이 집안에 들어오면 농장은 분명 거덜 날 거라고, 시씨를 보는 순간 첫눈에 그녀가 더운 여름날에 취해서 흥청망청 놀다가 다가올 겨울은 생각지도 못하는 산토끼 같은 여자임을 알아봤다. 농장 상속자인 토르에게 빌붙어 한평생을 살 것이다(263쪽).”
마치 암퇘지들이 영역 다툼하는 것처럼, 아들의 아이를 가진 시씨를 어머니는 증오하고 공격하면서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마도 본능이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절약하고 축적하고 종일토록 몸을 움직여야만 남는 것이 있는 농촌생활에 시씨처럼 활달하고 명랑하고 발랄하며, 아낌없이 시원시원하게 써대는 성향이 있는 여성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후 아들 토르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일만 하는 농업기계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사망 이후 농장의 실세는 어머니 안나였던 셈이다.
안나에게 진정한 가족은 누구였을까? 안타깝게도, 무능 그 자체인데다가 유령처럼 집 안팎을 서성이는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식들 가운데도 자신의 농장 파트너 토르 외에는 딱히 사랑하는 자식이 없다. 오히려 돌아가신 시아버지, 즉 토르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고, 할아버지 탈레트와의 협업이야말로 일생동안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안나의 진정한 가족은 할아버지, 그리고 큰아들 토르이며, 철저하게 농촌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끼리 유대하면서 강력한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까지, 안나를 중심으로 작품을 읽다 보면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은 우리나라 대중문화에 많이 쓰이는 구조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소설 부분 부분은 한국소설을 읽어 내려갈 때보다 더욱 편안하고도 쉽게 읽힌다. 실제로 이 작품은 노르웨이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어 전체국민의 1/4이 시청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니,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작가는 노르웨이 문화 아이콘인 동시에 국민작가 칭호를 받음 직하다. 특히 노르웨이 농촌 사람들의 고되고도 충일한 노동, 쇠락해가는 농가의 모습은 어찌나 꼼꼼하고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그리고 농부, 낙농업자 등등 농촌의 노동환경과 생활 그 자체를 얼마나 실감 있고도 섬세하게 다루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큰아들 토르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면서 농촌사람 특유의 과묵하고도 성실한, 그리고 구두쇠 소리를 들을 만큼 아끼고 또 아끼며 웬만한 것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여 돈 새는 것을 막는 정서를 세세히 기록해 냄으로써 노르웨이뿐 아니라 세계 농부들의 전형을 만들어 낸 듯한 느낌이 든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행동과 성격을 아주 세밀한 필치로 그려낸 것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강력하고 절대적인 힘의 상징인 안나가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토르는 돼지 사라의 첫 출산에 신경 쓰랴, 어머니를 보살피랴 정신이 없다. 자신이 할 일에다 어머니가 해야 할 가사까지 모두 떠맡은 토르는, 그 와중에도 거치적거리기만 하며 어디 한 군데 쓸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보살피기까지 해야 하는 빙충맞은 아버지에게 증오 가득한 독설 퍼붓기를 멈추지 않는다. 성실하고 과묵하며, 돼지에게조차 넘치는 사랑을 표시하고 어머니의 병환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잔정은 없더라도 착해 빠지기만 한 토르는 왜 유독 아버지에게만 못되게 구는 걸까? 이로써 아버지에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그 농장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동시에 그림자와도 같고 좀비와도 같이 아버지를 묘사함으로써 뒤에 닥쳐올 거대한 반전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토르는 어머니를 병원으로 옮겨 가고 식구들을 호출한다. 둘째아들 마르기도와 막내 에를렌, 그리고 딸 토룬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소설이 진행되는 현재시점 안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움직일 수조차 없는 식물인간에 불과한 존재로 그려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에서 거실 벽에 그림 한 장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은, 죽은 여주인 <레베카>의 강력한 아우라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듯, 이 소설은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얼굴 형태마저 비틀어져 버린 죽어가는 여자 안나가 작품 전체를 휘두르며 지배하고 있다.
둘째 마르기도는 장의사인데, 마침 한 소년의 자살로 인한 죽음을 처리하느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보기가 싫어서 병원 방문을 늦춘다. 마르기도가 솜씨 좋게 자살한 소년을 처리하는 과정을 소설의 한 장면으로 집어넣은 것은 가족사와 연관된, 뒤에 있을 반전을 위한 복선인 듯하다. 소년의 자살 이유를, 어른들은 한 소녀와의 실연으로 인한 실망감으로, 또래 아이들은 소년이 ‘남자의 남자’(‘동성애자’의 노르웨이식 표현)였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농업을 주업으로 삼는 노르웨이 사회의 보수성은 타자의 성적 정체성이나 성적 취향을 인정할 만큼 열려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농촌사회에서 농사일과 갖가지 육체노동은 성인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거나 기피한다면 농촌사회에서 그 사람은 무능하거나 이상한 사람취급 당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소년은 아버지의 농장을 돌보는 대신 망원경을 들고 새를 쫓아다녔다. 이것만으로도 폐쇄적인 농촌에서는 흉 거리가 된다. 하물며 남자의 남자라면?
이렇게 답답한 관습이 주는 폭력성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막내 에를렌의 대응방식은 ‘멀리 도망가기’였다. 에를렌이 패션공부를 하고 싶어 하자 어머니는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마구 퍼부었다. 비록 에를렌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건 인정하지만 여자아이들처럼 그런 곳에서 공부하는 꼴은 못 보겠다고 소리를 쳤다. 또한, 그건 가족 전체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이라고도 했다(217쪽). 어머니의 냉대와 경멸은 에를렌이 고향을 등지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후 그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도시, 코펜하겐에서 쇼윈도우 장식가로 일하며 동성의 남자 친구와 함께 활달하게 살아간다. 그러므로 에를렌에게 유일한 가족은 동성의 애인 클로베이다.
또 한 사람 있다. 장남 토르의 딸 토론이다. 토론 역시 아버지 토르의 부름을 받고 달려오지만, 토론에게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처음 보는’ 가족이다. 이 사람들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토론에게 진정한 가족은 데리고 있는 개와 고양이들, 그리고 아버지 농장의 돼지들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가족이라고 다 같은 가족이 아니며, 혈연이 아니라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가족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당신의 가족은 누구인가?
그런데 혈연만큼 끈질긴 관계가 또 있을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이후라도 서로 간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흔히 말하는 ‘물보다 진한’ 피 탓인지 성격도 운명도 비슷하다.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 함구와 묵언 속에서도 가족 내 비밀을 짐작하고, 그리고는 다시 덮어버리는 일에 기꺼이 동참한다. 혈연이라는 이름의 끈적끈적한 관계는 이러한 공모와 일시적인 합심과 봉합의 사료를 먹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다. 만일 이러한 봉합을, 공모하기를 거부하는 혈연이 있다면 그자는 곧바로 자격을 박탈당하고 외부로 축출된다. 그러나 혈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결국 한두 번은 고향 땅으로 돌아와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기도와 에를렌, 토르 이렇게 3형제와 조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계기로, 외면하였던 얼굴들을 대면해야만 한다. 어색한 분위기, 그리고 밝혀지는 집안의 비밀, 아버지가 왜 일생동안 함구하면서 유령처럼 살아왔는지,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무시하고 죽은 할아버지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은 생활을 해 왔는지, 큰아들과 어머니가 어떤 공모관계로 아버지를 무능 속에 빠뜨렸는지가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 충격적으로 밝혀진다.
작가는 할아버지의 입을 빌려 말한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허다하게 있지.” 특히나 혈족 간의, 피의 결속으로 가족로망스를 유지하려는 욕망을 지닌 수많은 가족마니아들이라면 할아버지의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들을 것이다.
쇠락해 가는 농가의 모습을 싱싱한 푸름과 장대함으로 가려 주는, 지평선 끝까지 심어져 있는 저 베를린 포플러 나무만 해도 그렇다.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배경을 선사한 이가 세계대전 시기 기획한, 히틀러의 무모한 도시계획의 일환에 의한 부산물이라 한들, ‘자라서 움직이는 건 무엇이든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며, 한번 뿌리 내린 것은, 잘못된 선택에 의한 뿌리내림이라 할지라도 결코 어쩔 수 없이 자라나야만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욕망과 집착이 경악할만한 협상과 공모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가족은 남았고 가족 농장은 대를 이어 유지되었다. 할아버지의 말 못할 자식 사랑이 왜곡된 채로, 이 가족은 엄청난 비밀을 지닌 불안정한 가족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세상에 비밀 한 가지쯤 덮어두고 살지 않는 혈연이 있을까? 정상처럼 보이는 모든 가족관계 속에는 끊임없는 배제와 축출과 비체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기만의 공모가 통해야 한다. 가족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은밀한 눈빛과 표정만으로 암묵적으로 이해하며, 함부로 발설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일. 서로 묵인하고 덮고 용인하며, 큰 소리로 따지고 문제 삼지 않는 공모와 협상의 게임 안에서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겨우겨우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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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문영희
한국문학을 전공하고 오랜 기간 문학수업을 진행해 왔다. 주로 국내의 소설만 열심히 읽다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이 되면서 번역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책읽기와 만들기를 좋아한다. 월간 북파크, 도서출판 여이연, 도서출판 밈에서 기획자로 활동했다. 요즘의 관심사는 사회적 소외계층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는 일이다. 현재 대학생과 여성노숙자를 상대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공저)로는 『소설구경 영화읽기』, 『불멸의 춘향전』, 『한국의 식민지근대와 여성공간』,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