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남성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한가”
누가 동심을 순진무구하다고 했던가? 동심의 낭만화는 어린 시절 자신들의 잔혹했던 과거를 은폐하려고 어른들이 지어낸 발명품인지 모른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고양이 눈』(전 2권)은 어린 여자아이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세밀화다. 이 소설은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들이 보여주는 잔인성을 모호하고 포착하기 힘든 꿈처럼 전개한다. 처음에는 가혹한 가해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경계마저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여자친구들로부터 죽음과도 같은 통과의례를 경험한 일레인의 영혼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안하다.
머리카락이 희긋희긋해진 50대가 되었지만 일레인은 초조해지면 아홉 살 꼬마로 퇴행하여 손가락을 물어뜯는다. 외관상으로 볼 때 그녀는 인정받는 화가이고 부유하고 단순한 두 번째 남편과 이해심 많은 딸들과 더불어 잘 살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의 정신 상태는 위태로워 보인다. 대학시절 미술선생이었던 조세프 흐르비크와 동창인 존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것처럼, 지금 그녀는 첫 번째 남편 존과 두 번째 남편 벤과의 삼자관계에서 오히려 심리적 균형상태를 누린다. 사실 대학시절에는 그들 모두 삼각관계, 사각관계와 같은 다자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성적독점 자체를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는 부르주아적 관념의 잔해로 보았던 만큼 어느 누구도 성적으로 타인의 삶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들이 누린 자유와 행동에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기존제도가 주는 압박과 긴장을 견디지 못해 손목을 긋기도 하고, 상처주고 상처받기도 하고, 버리고 버림받기도 했다.
지금 현재 토론토에 온 일레인은 존의 스튜디오에 머문다. 그녀는 토론토 쇼핑몰을 지나가면서 어린 시절 사악했던 친구 코딜리어의 목소리를 듣고 분노에 몸서리치면서 “코딜리어, 나쁜 계집애”하고 외친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코딜리어는 무참히 살해당한다. 코딜리어는 그녀를 인터뷰하러 온 젊은 페미니스트로 바뀌기도 한다. 일레인은 ‘늙은’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당연히 가부장제의 폐해에 분노하는 투사 이미지에 따라 재단하려는 어린 여기자의 태도가 얄밉다. 그래서 속으로 나쁜 년들, 코딜리어처럼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마, 라고 혼자 부르르 떤다. 젊은 너네들이 명령하지 않아도 목살이 닭모가지처럼 늘어져 가는 나, 무대에서 퇴장할 날이 머지않았다면서 그녀는 씁쓸해한다. 늙어가는 그녀, 젊은 여자에게 독초처럼 독설을 풍긴다. 어느새 그녀는 코딜리어의 더블이 되어버린다.
『고양이 눈』에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어린 시절의 경험과 곤충학자였던 아버지의 세계관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신의 똥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들의 오만이 하늘 똥구멍을 찌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가축화된 자기들의 삶을 문명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 다른 짐승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도살한다. 곤충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들이 저지른 짓은 바퀴벌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인간은 자신들의 폭력성으로 인해 조만간 지구상에서 절멸할 것이다. 여성은 배려와 보살핌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성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페미니스트들은 주장해왔지만, 애트우드에 의하면 여성이라고 하여 남성보다 윤리적으로 나을 것이 전혀 없다. 여성의 탐욕과 악마적인 속성을 묘사하는 장면은 암컷 사마귀가 교미의 끝 무렵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 형상과 흡사하다. 애트우드의 소설세계에서 지니아, 코딜리어와 같은 팜므 파탈은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보여주듯 “공기처럼 남자들을 먹어치운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먹어치운다. 애트우드에게 삶은 정치적인 것을 넘어 “군사적인” 것이다. 일상의 전쟁은 언어의 실패에서 비롯되고 게걸스런 인간들은 스스로 ‘인간종말리포트’를 작성하는 도중에 있다.
“타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싶은 욕망이 곧 예술가의 로망”
그럼에도 일레인에게 제정신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시적 언어의 혁명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자율적이라는 말은 정치의 영역에서 퇴출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예술은 혁명적 힘을 상실했다. 그로 인한 죄의식의 뒤집힌 표현이 미학적 자율성이다. 미학적 자율성은 일상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존재의 잉여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아직 예술의 용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예술이 갖는 치유의 힘이다. 어린 시절 일레인에게 세 친구들 못지않게 상처를 주었던 인물이 스미스 부인이다. 그레이스의 어머니인 스미스 부인은 어린 일레인을 아무리 교화시켜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기 딸의 사악한 행동을 방조하고 그것을 신의 처벌이라면서 정당화했다. 나중에 화가가 된 일레인은 철제 생명연장 장치를 주렁주렁 매단 스미스 부인의 몸통을 통해 그녀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고 마음껏 복수한다. 신문에 실린 전시회 소식을 보고 혹시 코딜리어나 그레이스가 찾아온다면, 자신들이 추락하는 추한 인물로 친구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녀는 자기 그림을 통해 분노와 앙심을 승화시킴으로써 그나마 정신건강을 유지한다. 일레인에게 ‘복수는 나의 힘’이고 그것의 정당한 표현수단이 예술이었다.
애트우드에게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여성 예술가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다. 『도둑신부』에 등장하는 지니아는 메두사, 메디아, 맥베스 부인과 같이 위대한 악녀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만한(그들보다는 정치적 품격이 떨어지지만) 인물이다. 그녀는 대학동창이었던 여자친구(토니, 캐리스, 로즈)의 남자들을 전부 유혹했다가 모두 버린다. 버림받은 로즈의 남편은 자살한다. 나중에 그녀는 로즈의 어린 아들까지 유혹한다. 지니아는 자신의 과거를 마음대로 지어내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녀는 시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과거를 편리하게 꾸며낸다. 파리에서는 어린 창녀였고, 루마니아에서는 유랑하는 집시였다. 2차 전쟁이 끝난 뒤 그녀의 생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가 되어 베이루트로 간 것으로 각색된다. 죽어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던 그녀는 불사조처럼 멀쩡히 살아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녀는 ‘無’의 세계로부터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것들을 창조하는 당당한 예술가이자, 청중을 유혹하여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대담한 요술쟁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요술에 ‘속아서’ 봉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예술적 행위와 수단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싶은 욕망 말이다.
어린 시절 심한 괴롭힘의 대상이었던 일레인에게 유일한 위안은 파란 꽃잎 무늬가 들어 있었던 ‘고양이 눈’ 유리구슬이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유리구슬 중에서도 고양이 눈을 가장 좋아했다. 고양이 눈은 그녀에게 예술의 상징이자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것에 기댈 때 그녀의 고통은 견뎌볼 만한 것이 된다. 일레인의 예술이 독자에게 주는 위안도 바로 그 지점이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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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지 <여/성이론>의 편집위원, 월요일독서클럽 회원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여/성이론>은 페미니즘 이론을 알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이론을 생산하기 위한 본격적인 페미니즘 이론지이다. 한국어의 '성(性)'이란 단어에서는 젠더(gender)와 성(sexuality)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이 둘을 모두 표현하기 위해 '여/성'에 빗금을 넣었다. 여성이라는 현재의 정체성을 만든 역사에 균열과 틈새를 내겠다는 의미다. 저서로 『페미니즘과 정신분석』(공저), 『식민지근대 여성 공간』(공저),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공저), 『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 등이 있고, 역서로 『고독의 우물』, 『노생거 수도원』,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보이는 어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