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감수성의 극한 단계, ‘고향은 없다’는 마음”
모든 책에 ‘W. G. 제발트’라고 소개되는 그의 풀네임은 ‘빈프리드 게오르그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이다. 그의 작품은 『아우스터리츠』(2009, 을유문화사), 『이민자들』(2009, 창비) 이 두 권이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세 번째 책이 될 『토성의 고리』는 현재 창비에서 번역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일부에게는 제발트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 이상의 어떤 비언어적 메시지까지 연상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자신이 데이비드 일라이어스라고 생각하고 있던 한 (영국의) 소년은 1949년 어느 날, 우연히 자기의 진짜 이름이 자크 아우스터리츠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복잡한 형태의 구조와 여러 층위의 진술들, 장소와 시간에 대한 독특한 구조의 기억과 서술이 거미줄에 휘감겨 있기는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면 ― 바로 지금의 나처럼 ― 이렇게 시작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입양아인 소년은 그 이름에서 아무런 것도 연상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불안해진다. 아마도 자신의 원래 이름이 모건 혹은 존스였다면 소년은 자신을,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현실과 연관지을 수 있었으리라. 심지어 소년은 생전 처음 듣는 그 이름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조차 상상할 수 없다. 그날 이후 오십 년도 더 지나서 그 ― 아우스터리츠 ― 는 규명할 수 없는 모종의 충동에 이끌려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게 되는데, 그 어디에서도 “아우스터리츠”란 기묘한 성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국 이외의 유럽 다른 도시의 전화번호부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자신의 출처일 가능성이 있는, 자신의 극히 일부이거나 머나먼 연관성일지도 모르는, 현실에 존재하는 아주 희미한 흔적들은 너무나 보잘것없는데, 예를 들자면 카프카의 일기에 등장했다는 한 인물, 카프카의 조카에게 할례를 해주었다는 한 미지의 인물의 이름이 아우스터리츠라고 한다는, 그런 식이었다.
독자여, 위의 것은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의 시작이 되는, 이른바 흔히 말하는 줄거리라는 것의 아주 미세한, 어린 시절의 혼돈스러운 기억의 내용 가운데 거의 숨겨지다시피 진술되는 내용의 일부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책 아우스터리츠의 전부,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우스터리츠는 유럽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성이다. 실제로 내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도, “아우스터리츠”를 1805년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승리한 유명한 “삼왕전투”의 격전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이르게 은퇴한 아우스터리츠는 런던 시내를 관통하는 산책을 하던 도중에 현재는 폐쇄된 리버풀 스트리트 정류장의 오래된 대합실로 들어서게 된다. 앞으로 몇 주 뒤면 개축공사로 헐려 영원히 사라지게 될 그 역사에서 아우스터리츠는 어떤 환각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30년 풍으로 차려입은 여인과 성직자의 복장을 한 남자가 기차를 타고 막 도착한 한 어린 사내아이를 맞이하는 광경이었다. 사내아이는 초록색 가방을 가슴에 안고 있었고, 그 덕분에 아우스터리츠는 사내아이가 바로 영국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양부모를 만나는 자기 자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생애 최초로, 자신의 출처와 관련된 어떤 영상이 지하의 심연에서 홀연히 솟아나는 것을 마주한 것이다.
그 이후 한 고서점에서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두 여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여인들은 1939년 그들이 어떤 연유로 특별 수송차를 타고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거쳐 마침내 프라그 호라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우스터리츠는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네 살 난 자신이 나치점령지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호송작전에 의해 영국으로 오게 된 경유임을 비로소 기억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 『아우스터리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에 관한 내용이 중점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어린 아우스터리츠가 부모를 떠나 영국으로 피난을 와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고, 아우스터리츠의 아버지가 파리로 달아나야만 했으며 프라하에 남아 있던 어머니가 게토로 이주한 다음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다시 끌려가 버리고, 이 책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그곳이 어디인지, 아우스터리츠가 그녀의 흔적을 쫓아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공동의 기억과 부합하는 구체적인 접점, 보편적인 명분에 걸맞은 테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그의 어머니의 삶의 마지막 종착점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등의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주인공은 이차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점령했던 요새의 지도에서 “고문실” “가스실” 등의 글자가 확대된 지도를 들여다보는 행위를 하며, 과거 유대인 게토가 있던 체코의 테레진거리에서, 주인 없는 낡은 물건을 파는 골동품 상점의 진열장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그리고 길게 묘사하는 식이다. 그것은 뛰어난 침묵의 효과를 야기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아우스터리츠』는 고향 또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대적이고 서정적인 꿈의 오디세이아로 읽힐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민감한 언어와 비언어 ― 그의 책들에는 해설 없는 흑백 사진들이 내용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하므로 ― 의 무늬들로 이루어진 정처 없는 여정의 기록이다. 이러한 특징은 제발트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인 것은 영국 서포크 지방을 여행하면서 쓴 『토성의 고리』 와 4개의 각각 다른 여행을 산문 형식으로 서술한 『현기증. 감정들.』 이다. 특히 『현기증. 감정들.』의 마지막 산문인 「고국으로의 귀향」(“Il ritorno in patria”)은 수십 년 동안 찾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고향을 문득 방문하게 된 이야기이다.
“‘고향은 없다’는 마음, 그것은 문학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그는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간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버려지고 쇠락한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즐거움이나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다니고, 옛 문헌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외진 호텔의 접수계 여인, 기차에서 만난,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어느 책 읽는 여인을 기억하고, 서태후가 통치하는 중국의 풍경과 보르헤스의 환상의 나라, 그리고 17세기의 의사 토머스 브라운과 당시 실시된 인체해부수업을 상세히 묘사한 렘브란트의 회화까지, 제발트의 여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독특한 회상의 템포와 소용돌이치는 문학에의 여정으로 우리를 단숨에 이끌어 버린다. 우리 중의 그 누구도 예전에는 이러한 여행기를 읽은 적이 없었으리라. 그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거나 느낀 것을 서술하는 기록방식은 독자의 마음을 움켜잡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떠한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대개의 독자에게 익숙한 차원의 진술이 아니며, 그의 세계는 수많은 층과 겹으로 이루어진 “제발트식 리얼리티”라고 이름 붙일 만한 비가시적인 현실과 계시적인 울림마저 불러일으키는 풍경화이다.
한편 어떤 사람에게 『아우스터리츠』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둡고 억눌린 감정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즉 어디에서나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는 심리적 이민자의 상태에 관한 글 말이다. 제발트 자신도 성인이 된 후 영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이민자였다. 이방인 감수성의 가장 극한의 단계는 세상 그 어느 구체적인 장소도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 즉 ‘고향은 없다’는 ― 마음일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문학의 강력한 동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오는 어떤 부분에서 『아우스터리츠』의 화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우스터리츠는… 한편으로는 잘못된 영국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에는 그 낯선 도시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 밖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어두운 느낌에 짓눌린 채 살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곧 파리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우스터리츠』는 제발트의 유작이다. 그는 2001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책을 읽은 나에게 이 독서는 어느 정도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었다. 내가 그의 산문시집 『자연을 따라, 기초시』를 통해서 최초로 제발트를 알게 된 이후 그는 줄곧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일생동안 기억하게 될 한 권의 책, 한 명의 작가를 만나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어떻게 해서 자신이 앞으로 글로 쓰게 될 어떤 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일까. 나는 아우스터리츠가 공사 중인 리버풀 스트리트의 역사를 홀로 산책하다가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터번을 쓴 한 인부를 따라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하던 역사의 폐쇄된 구역으로 우연히 들어서게 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리버풀 스트리트 역은 「고국으로의 귀향」의 마지막 부분에도 등장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소이다. 작가 제발트에게 공간, 특히 건축물과 관련된 공간이란 글쓰기의 강력한 모티브를 제공하는 시점으로 작용한다) 그곳의 흐릿한 불빛 아래서 그는 반세기 전의 자기 자신과 조우하는 것이다. 그때 아우스터리츠는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표현하는데 나에게는 이 문장이 제발트식 오디세이아의 서사를 구축하는 정체불명의 힘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확실치 않은 내적인 움직임에 따라 생애의 거의 모든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게 되지요.”
마치 어떤 사람들이, 바로 그런 “제발트 식”으로, 제발트의 책과 만나게 되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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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배수아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잡지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서 "신인작가 작품공모"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공무원과 소설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오가면서 글을 썼던 그녀는 간섭받지 않고 글에 몰두해 보기 위해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떠나 3~4개월씩 체류하면서 작품을 써 왔으며, 그 곳에서 발견한 작가 야콥 하인의 첫 번째 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를 번역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그 사람의 첫사랑』, 『붉은 손 클럽』, 『철수』, 『이바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에세이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 등을 펴냈다.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단편 「무종」으로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