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 반전(反戰) 시위가 벌어지던 2003년 2월 15일 토요일의 이야기”
“주인공 의사가 환자와 자신의 위치를 바꿨을 때 발생한 반전(反轉)”
토요일은 설레는 요일이다. 일요일이란 또 다른 휴일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어딘가로 떠난다. 방에서 쉬기보다 광장으로 몰려나가 논쟁과 축제를 벌인다. 하지만 요일의 기원에 따르면 토요일은 일하는 날 쪽에 가깝다. 고대 수메르 인들은 해와 달과 다섯 개의 행성인 화수목금토성에서 요일 이름을 붙였는데, 토요일(saturday)은 노동을 관장하는 행성 토성에서 따왔다. 근대에 와서야 토요일이 휴일로 포함되었다. 고대의 토요일은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을 많이 하는 날, 가장 고된 날로 여겼던 것 같다. 영국의 구전 민요 <마더 구스의 노래>처럼 ‘토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고생이 심하다’는 가사도 있다. 기독교의 신(神)에게도 토요일은 힘든 날이기는 마찬가지였다. 7일간의 천지창조 중 6일째인 토요일에야 신은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든다. 그러니 신에게는 가장 신경 써서 일해야 했던 마지막 창조의 요일이며, 인간에게는 어렵게 태어난 것을 기념하며 케이크에 불을 밝히는 요일이 토요일인 셈이다.
이언 매큐언이 2005년 발표한 두꺼운 장편소설 『토요일』은 한 남자의 어느 고생스러운 토요일 하루를 다룬다. 이날 이 남자는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그 토요일은 역사적으로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2003년 2월 15일, 영국 하이드파크에서, 또 세계 도시 곳곳의 광장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있던 주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에게는 반전 시위보다는 기다리던 홀리데이, 사랑하는 딸과 괴짜 장인이 집으로 돌아와 가족이 한데 모이는 파티 날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40대 후반의 저명한 신경외과전문의 헨리 퍼론. 시위가 벌어질 하이드파크 광장에 면한 고급 빌라에 산다. 지적인 남자 주인공이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아직은 고요한 광장을 바라보는 것을 시작으로, 토요일 하루 동안에 겪게 되는 미묘한 사건과 일상이 이 소설의 전부다. 소설은 극단적인 에피소드를 끌어오는 대신 남자의 일상을 극도로 자세하게 보여주는데 초점을 둔다. 남자의 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물밑으로 미세한 감정이 흐른다.
헨리 퍼론은 이른 새벽 그날의 첫 장면으로, 광장 상공을 날아가는 꼬리 부분이 불탄 비행기를 본다. 그리고 ‘저 비행기가 알카에다나 뭐 그런 테러 단체와 관련 있는 건 아냐’ 하는 식의 불안을 느낀다. 그는 이라크 전쟁이 혹시 이라크를 민주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낙관하지만 아직 입장정리를 하지 못한 중도 우파다. 매파(전쟁찬성)와 비둘기파(전쟁반대) 사이에 서 있는. 물론 그는 전쟁에 대한 입장정리에 관해서만 우유부단하며, 그 외 대부분에 대해서는 수술실에서처럼 매가 먹잇감을 낚듯, 두개골 안의 비정상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집어내듯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고 아름다운 아내, 곧 책을 출간할 시인인 딸, 블루스를 연주하는 기타 뮤지션인 아들을 둔 행복한 중산층 가족의 가장이다. 하지만 퍼론은 주인공이므로, 독자인 우리가 바라는 시련을 어쩔 수 없이 겪을 운명이다. 그의 하루는 이 주말의 겨울 아침, 반전 시위대를 피해 스쿼시 연습장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던 중 경미한 자동차 사고를 내고, 이상한 남자와 마주침으로써 일그러진다. 이 약간의 일그러짐이 토요일의 마지막에서 무섭고 황당한 얼굴로 돌아온다.
이언 매큐언은 ‘현존하는 영미 최고의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한 남자의 개인적인 토요일에서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감정문제, 불안의 실체를 이끌어낸다. 9·11 테러 이후,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안은 서방 세계 문학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이언 매큐언 역시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는지 테러 이후 전쟁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시위 날에 주인공을 밀어 넣어 불안의 실체를 드러내고, 일상적 실존에서 그 답을 찾아 나간다.
이 소설의 특징은 바흐의 음악처럼 우아하다는 점이다. 유일한 사건이라 할 만한 황당한 교통사고를 부각시키는 대신 일상의 해프닝 정도로 스치듯 그린다. 대신 신경외과의사이자 신경의학자인 퍼론의 의식 흐름을 따라 누군가의 강박적 꿈을 상연하듯 퍼론의 머릿속과 마음을 천천히 쫓는다. 이언 매큐언의 다른 소설처럼 에피소드에 강약을 주며 배치하는 식의 선명한 전개도 없다. 이 소설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글에는 ‘현미경적인 세밀함과 편집증적 집요함으로 묘사’라는 문구가 있다. 이런 식의 진술형태는 누구보다 뛰어난 신경외과전문의라는 캐릭터의 정체성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진술형태는 캐릭터 자체인 듯하다. 퍼론은 언제나 주변을 ‘보고’ 있다. 주중의 그는 두개골을 열어 뇌의 미세한 혈관들을 잇고 자르고, 종양을 째고, 고름을 짜내고, 함몰된 부위를 재건시키고, 잘린 신경을 복원한다. 그는 철저히 소독된 수술실에서 기술적으로 진보된 은색 장비를 손에 쥐고 이상 있는 사람들의 뇌를 열어, 세계가 구축되는 우연한 방식을 뇌 속에서 본다. 은밀한 기억들의 저장소인 뇌. 온갖 정보처리와 언어가 이뤄지는 그곳을 복원시킬 수 있는 퍼론은 신경외과 수술실에서의 신이다. 그런 퍼론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소소한 광경들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본 것이 다, 라는 식이다. 퍼론은 그러므로 마주하는 광경들, 광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퍼론의 잡생각, 번뇌, 마주치는 아들과 딸에게서 느끼는 세대 차와 사랑, 옛 기억들, 동료와의 스쿼시 시합에서의 불안한 감정, 아내와의 전화와 섹스에 대한 갈망, 어지러운 속도로 변해가는 세계에 대한 낙관과 실망, 미디어에 대한 공포가 지나친 세밀함으로 책을 채워나간다. 그래서 이 소설책을 다 읽고 덮으면 무수하게 갈라지는 뉴런들로 이뤄진 헨리 퍼론의 뇌를 열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학의 신에게 찾아오는 일상의 미묘한 균열, 자동차 사고는 그에게 무력과 불안감을 선사한다.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재미삼아 하는 스쿼시 시합에서 미국인 동료를 이기려고 안달을 한다. 그리고 퍼론은 엄마가 요양 중인 치매요양소를 찾아간다. 퍼론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날렵하게 수영을 잘했고, 먼지 하나 없이 그릇을 닦아두고, 이웃사람들에게 수술이나 질병과 같은 어두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의 뇌는 퍼론이 아들인지 모를 정도로 급속히 퇴화해가는 중이다. 어머니는 낯선 타인이 되었다. 알아주는 신경외과의사인 퍼론이지만 어머니의 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퍼론은 반전 시위대가 주는 불안, 자동차 사고의 불안, 기억을 잃고 죽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불안 속에서 새벽에 봤던 불타는 비행기에 대한 뉴스를 갈망한다. 비행기의 정체는 러시아 회사의 화물수송기로 엔진에 불이 붙어 히스로 공항에 불시착한 것일 뿐, 반전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뉴스를 보고 안심하지만 동시에 퍼론은 미디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신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강박, 그리고 다수 속에, 불안이라는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강박.’ (294쪽)
‘정신적 자유가 제한되는 것 방황할 권리가 줄어드는 것, 이것이 새로운 질서의 일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의 생각은 훨씬 분방했으며, 훨씬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그는 자기가 봉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뉴스거리며 여론, 억측에 안달 난, 당국이 흘리는 과자 부스러기에 넘어가는 소비자가 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301쪽)
‘그는 회의하는 습관을 잃었고, 반박 여론에 둔감해지고 있으며, 생각이 명료하지 못할뿐더러, 이제는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302쪽)
헨리 퍼론은 낯선 타자에 대한 위협을 떠드는 미디어에 대해 불안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곧 일어날 전쟁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미국의 말이 정말일 거라 믿고 싶어 한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의 퍼론은 자기가 본 것만을 믿기 때문이다. 이라크에서 친미주의자로 낙인 찍혀 지독하게 고문받은 이라크인 교수의 못쓰게 된 몸을 직접 눈으로 봤고, 치료한 경험이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퍼론에게 가장 사랑하는 딸, 진보적이며 촉망받는 시인인 딸은 아버지를 전쟁주의자라고 비판한다. 그는 딸과 논쟁한다.
이 소설은 파국을 불러올 뻔한 후반부의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헨리 퍼론이 어떻게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가까스로 다른 길을 찾는지를 집요한 일상 묘사 뒤에 보여준다. 이 소설의 세밀한 에피소드들은 강약이 별로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늘인 에피소드들이 불필요한 과잉처럼 느껴지는 순간, 강박증적인 신경외과의사의 모든 바깥을 장악하려 하는 열망과 그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남자의 번뇌와 불안이 생생하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의 묘사들은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는 실로 미묘하게 엮여 소설을 이룬다. 마치 복잡하게 구성된 현대인 삶에 대한 은유처럼.
퍼론이 가지고 태어난 우연한 유전형질, 가족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타인, 광장 시위대의 소리들, 광장에 대한 뉴스, 나이, 몸의 상태, 자라온 집,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 그리고 사건들이 모두 퍼론에게 영향을 미치며, 또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하여, 현대 사회 속의 한 남자의 진짜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미풍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부스러기 생각조차 기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데 주요한 원인이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으므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먼지 같은 것들조차 모두 기술될 필요가 있다는 듯.
그가 도달한 지점은 수술대 위에 눕혀진 타인과 자신의 위치를 바꿔보는 것이며, 자신을 투사한 불행한 타인에게 그가 행하는 어떤 행위이고, 결심이다. 이라크 전에 대한 거대 담론은, 퍼론에게 일어난 하루 간의 일을 통해 철저히 현실주의자인 그에게 드디어 삶으로 밀착된다. 그에게 닥쳐온 현실에서의 선택은 그의 전쟁에 대한 견해의 선택과 궤를 같이한다. 진정한 반전(反轉)인 반전(反戰). 그 선택은 그리고 놀랍게도 과학 너머의 지점에 딸 데이지가 읊는 한편의 시(詩)로부터 온다. 이 소설은 전쟁과 기술적 진보의 시대를 다루되, 그것을 넘을 수 있는 것은 문학임을 힘주지 않는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토요일』은 이언 매큐언의 다른 소설들처럼 깔끔하거나 구조적이지 않다. 하지만 감동적이다. ‘무시무시한(macabre)’ 이언 매큐언이란 별명이 무색할 정도이다. 일요일의 안식을 찾는 한 남자의 하루 간의 긴 여행. 매큐언의 다른 작품 『이런 사랑』처럼 놀랍게 극적이지도, 『체실 비치에서』처럼 완벽하게 아름답지도, 『속죄』처럼 변형된 고전문학 같지도, 『시멘트 가든』처럼 기발하며 악랄하지도, 『암스테르담』처럼 유머러스하지도 않다. 하지만 토요일의 곳곳에 머무르며 강박적 사유가 연주하는 우아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은 막강하다. (*)
-------------------------------------
필자소개
채윤정
약대를 졸업하고, <헬스조선> 편집장을 지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든 잡지 <허스토리>의 기자로 일했고, <한겨레21> 객원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이며,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