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타락을 허락하지 않는 파수꾼 콤플렉스”
지난 1월 J. D. 샐린저가 타계했다.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서가 한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이고 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꺼내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한 겨울 센트럴 파크의 오리, 다이얼 한번 돌려보지 못하고 나온 공중전화 부스, 챙을 뒤로 돌려 쓴 사냥모자, 자연사 박물관의 젖가슴 봉긋한 여자 인디언, 빙빙 도는 낡은 회전목마… 17살 소년이 회상하는 16살 겨울 방황의 궤적이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은 아마 샐린저 자신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수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었거나 겪고 있을 사춘기 성장통의 정서를 탁월하게 그려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정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낸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아름다운 은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큰 호밀밭에서 어린 꼬맹이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늘 그려봐. 어린 꼬맹이들만 수천명 있고, 주변엔 아무도 없어. 큰 사람은 없다는 뜻이야, 나 말고는. 그리고 나는 어떤 엄청 가파른 벼랑 끝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말야, 누구든 벼랑 쪽으로 가려고 하면 모조리 잡는 거야. 꼬맹이들은 지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뛰어다니니까, 내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걔네들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지.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난 그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라고. 미친 생각이란 건 나도 알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건 이것뿐이야. 미친 소리란 건 나도 알아.”
도대체 오빠는 뭐가 되고 싶냐는 어린 여동생 피비의 힐난 섞인 물음에 홀든이 불현듯 떠올린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 이 장면 속에는 아이들의 순수한 세계를 어른의 세계로부터 지켜내고 싶다는 사춘기 소년의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그 중간에 낀 ‘사이 존재’가 다음 단계로의 성장을 거부하고 경계에 멈춰 서서 순수의 타락을 막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 대목의 호소력은 실로 엄청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존 레논 암살 사건이다. 존 레논 암살범 마크 데이비드 채프만이 레논 살해 직후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범행 현장에 남아서 태연하게 읽고 있었다는 책이 『호밀밭의 파수꾼』이고, 이어 법정에 서서도 줄줄 읊어댔다는 부분이 바로 이 파수꾼 대목이다. 채프만의 범행 동기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존 레논의 순수한 영혼이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파수꾼 콤플렉스가 채프만의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라는 일각의 해석은, 채프만이 파수꾼 대목을 자기 선언처럼 여겼다는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상당히 설득력 있다.
파수꾼 대목에 매료된 사람은 비단 채프만뿐만은 아닐 것이다. 방황하는 수많은 청춘들이 동화 같은 은유에 동감했을 테고, 새치 희끗희끗한 어른들도 자신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빠졌을 테니까. 그러나 채프만의 예에서 보듯이 파수꾼 은유는 그것이 인간의 병적인 어떤 심리, 말하자면 파수꾼 콤플렉스의 뇌관을 건드리는 순간 위험한 것이 되고 만다.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죽은” 남동생이 제일 좋다고 답하고, 자연사 박물관의 유리 케이스에 전시된 것들을 보며 영원히 “변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며, “제자리”에서 빙빙 맴도는 회전목마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홀든의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도 소중한 것은 차라리 박제를 해서라도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파수꾼의 위험한 욕망이 감지된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악화되었더라면 홀든은 아마도 채프만과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파수꾼 콤플렉스가 위험한 까닭은 그것이 어린이와 어른, 순수와 타락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발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이분법은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부정하는 것이고, 순수와 타락의 이분법은 선악의 이분법이다. 어린이는 순수하고 어른은 가식적이다, 라는 구분에 배태된 폭력성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는 이미 채프만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채프만처럼 콤플렉스의 폭력성이 외부로 향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콤플렉스를 앓는 당사자가 희생될 때도 있는데, 실비아 플라스의 성장 소설 『벨자』의 에스더 그린우드가 그런 경우다. 뒤늦은 사춘기라고 해야 할까, 19살에 자존감을 잃고 허우적대는 에스더 또한 순수함에 집착하는 인물로, 위선적인 어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신의 삶을 중단하기로 결심하고 끊임없이 자살을 기도한다. 어른으로 성장해 더러운 세상에 사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겠다는 에스더의 자살 충동은 파수꾼 콤플렉스의 폭력성이 자기 자신에게로 발현된 경우인 것이다.
이른바 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작품들의 메시지는 거의 비슷하다. 그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했다”이다. 그러나 “성장했다”라는 흔하고 뻔한 메시지를 거듭 확인하려고 성장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성장 소설이 끊임없이 읽히는 까닭은 성장의 과정,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결구가 나오기 전까지의 청춘의 방황과 고뇌의 흔적을 엿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그 흔적을 가장 그럴듯하게, 가장 흥미진진하게 재현한 작품들이 많이 읽히고 오래 산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성장 소설의 고전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위치에 오른 것도 샐린저가 사춘기 소년의 방황과 그 울적하고 외로운 심사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동시에, 성장기를 사춘기 소년다운 톡톡 튀는 생생한 입말로 곳곳에 유머를 담아 아주 우울하지만은 않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성실한 번역은 미덕이 아닌 의무”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게는 오래전 『호밀밭의 파수꾼』의 번역본을 읽으며 지루해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주위엔 항상 『호밀밭의 파수꾼』을 처음 읽는 어린 친구들이 있었고, 그 가운덴 제법 말 그대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축도 종종 있었다. 이 같은 편차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궁금하던 차에 샐린저의 타계 소식을 접했고, 뒤늦게 원서를 읽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 기억과는 딴판으로 전혀 지루하거 우울한 책이 아니었다. 사춘기의 잿빛 방황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건 맞지만, 잿빛 결마다 유머가 배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새삼 번역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번역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한 두 언어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작업이라니, 그 본질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계속 되어야 한다. 번역이 없다면 어찌 한국의 독자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수 있겠는가? 물론 작품이 씌어진 언어를 배워 원서로 읽는 방법도 있지만, 모어(母語) 아닌 다른 언어를 익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때문에 독자는 전문 번역가의 번역에 기대서 세계의 문학을 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번역이라는 게 절대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작업이라는 점을 아는 독자라면 불가피한 의역이나 사소한 오역에 분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성실한 번역 때문에 “내 인생의 책”이 될 수도 있었을 책을 놓치는 일이 생긴다면, 거의 십년 동안 우울하고 지루한 소설로 각인돼 있던 소설이 알고 보니 유머 넘치는 소설이었다면 어쩌겠는가?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 <나비> 지면을 빌려서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찾아낸 몇몇 어처구니 없는 번역 사례를 공개하겠다. 독자는 번역가와 출판사에게 제대로된 번역을 읽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독자도 출판사도 번역가도 성실한 번역은 미덕이 아니라 의무라는 점을 절대 잊어선 안된다.
1. "Her mother belonged to the same club we did." I said. "I used to caddy once in a while, just to make some dough. I caddy'd for her mother a couple of times. She went around in about a hundred and seventy, for nine holes."
― “그애 엄마가 우리와 같은 골프 클럽에 다녔거든.”하고 내가 다시 말했다. “난 가끔 용돈을 벌기 위해 캐디 노릇을 했는데, 두 서너 번 그애 엄마의 캐디 노릇을 해봤어. 그 부인은 아홉 홀을 넣는 데 약 백칠십 홀은 돌았지.”(문예출판사)
― “그 애의 엄마가 내가 있던 골프 클럽에 다녔어. 한때 캐디 일도 했었거든. 용돈이나 벌어볼까 하고 말이야. 한두 번쯤 그 애 엄마 캐디를 했던 것 같아. 그랬더니 9홀을 도는 데 거의 세 시간이 걸렸어.”(민음사)
― “그 애네 어머니랑 우리랑 같은 클럽에 나갔거든.” 하고 내가 말을 이었습니다. “나도 왕년에 돈 좀 벌어볼까 하고 캐디 노릇도 해봤지. 두어 번 그 애 어머니 캐디 노릇도 해주었거든. 9홀을 넣는데 무려 170홀을 돌았지.”(현암사)
* 홀든이 기숙사 룸메이트 스트라드레이터에게 제인 갤러허의 엄마를 따라다니며 캐디 노릇을 했다고 얘기하는 부분이다. 위 번역들을 보면 170이라는 숫자를 홀로 계산하거나 170을 60으로 나눠 시간으로 환산했는데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홀든의 얘기는 갤러허 부인의 골프 솜씨가 형편 없어서 고생깨나 했다는 과장 섞인 농담이다. 나인 홀 게임에서 170타 정도 치는 수준이면 정말 완전 초보 수준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홀든이 걸핏하면 과장해서 말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필자가 제안하는 번역은 다음과 같다.
― “걔 엄마가 우리랑 같은 클럽이었어. 난 그냥 용돈 좀 벌려고 가끔 캐디 일을 했었거든. 걔 엄마의 캐디 노릇도 몇 번 했지. 그 아줌마 말야, 나인 홀 게임에서 170타를 치더라니까.”
2. After I got all packed, I sort of counted my dough. I don't remember exactly how much I had, but I was pretty loaded. My grandmother'd just sent me a wad about a week before. I have this grandmother that's quite lavish with her dough. She doesn't have all her marbles any more―she's old as hell―and she keeps sending me money for my birthday about four times a year.
― 나는 짐을 꾸리고 난 다음 돈을 헤아려보았다. 정확히 얼마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1주일 전에 할머니가 큰 돈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나에겐 돈을 흥청망청 쓰는 할머니가 계시다. 이제 굉장히 늙어서 합죽 할멈이 되었지만 1년에 네 번이나 생일을 축하한다며 돈을 보내주셨다.(문예출판사)
― 짐을 다 싸고 난 후, 난 가지고 있던 돈을 세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당한 액수였던 것 같다. 할머니가 일주일 전에 용돈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돈을 펑펑 쓰시는 편이다. 이젠 이가 다 빠졌을 만큼 나이가 많으시지만, 일 년에 네 번 정도 내 생일 선물로 돈을 꼬박꼬박 보내주신다.(민음사)
― 나는 짐을 다 꾸린 뒤에 곤을 헤아려 봤습니다.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주머니가 꽤 묵직했습니다. 할머니가 거액을 보내신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내게는 돈을 물 쓰듯 쓰시는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할머니는 무척이나 연로하시지요.―그런데 일 년에 네 번쯤 내 생일이라고 돈을 계속 보내오신답니다.(현암사)
* 홀든이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나 세어 보고 용돈을 보내주신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다. “doesn't have all her marbles”라는 표현은 이빨이 다 빠졌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사전만 부지런히 들여다봤어도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번역했을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다. 이런 오역 때문에 독자가 홀필드의 유머를 전혀 즐길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 짐을 다 싸고 난 후, 돈을 세봤다. 얼마나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상당히 두둑했다. 일주일 전에 할머니가 지폐 한 다발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내겐 돈을 꽤 헤프게 쓰는 할머니가 계시다. 완전 늙어서 이젠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내 생일이라며 일년에 거의 네 번 정도 돈을 보내 주신다.
3. Finally, though, I got undressed and got in bed. I felt like praying or something, when I was in bed, but I couldn't do it. I can't always pray when I feel like it. In the first place, I'm sort of an atheist. I like Jesus and all, but I don't care too much for most of the other stuff in the Bible. Take the Disciples, for instance. They annoy the hell out of me, if you want to know the truth. They were all right after Jesus was dead and all, but while He was alive, they were about as much use to Him as a hole in the head. All they did was keep letting Him down. I like almost anybody in the Bible better than the Disciples.
― 결국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갔다. 침대에 눕자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해서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종의 무신론자였다.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성서 안에 기록된 대부분의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열두 제자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그 제자들은 질색이다. 예수가 죽은 후의 그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은 예수의 밥이나 축내는 인간들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이 한 일은 예수를 끌어내리는 일뿐이었다. 오히려 성서에 나오는 다른 인간들이 제자들보다 더 마음에 든다.(문예출판사)
― 결국 나는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순간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기도를 하고 싶을 때마다, 기도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좋아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예를 들자면, 열두 제자 같은 것. 사실 난 그 제자라는 사람들이 정말 싫다. 그 사람들도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는 괜찮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뜯어먹고 살았던 군식구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제자랍시고 그 사람들이 한 일은 예수님을 끌어내린 것밖에는 없다. 도리어 열두 제자들보다 성경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민음사)
― 마침내 나는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자리에 들자 기도든 뭐든 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마다 늘 기도가 잘 안 되거든요. 우선 나는 무신론자라고나 할까요. 예수를 좋아하지만 성경에 씌어 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가령 열두 제자만 해도 그래요. 사실은 그 사람들 때문에 정말로 괴롭다고요. 예수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모두들 그런대로 쓸 만했죠. 하지만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엔 그분에게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물이었잖아요. 예수를 끌어내리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한 게 있냐 말입니다. 열두 제자보다는 차라리 성경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이 더 마음에 듭니다.(현암사)
* 세 판본 모두 "let down"을 끌어내린다로 옮겼는데 매우 어색하다. "let down"엔 끌어내린다 라는 의미 말고도 실망시키다 라는 뜻이 있으므로, 문맥에 맞게 실망시키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기계적 번역에 때문에 생긴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다.
― 하지만 결국 난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갔다. 침대 속에 있으니까 기도든 뭐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기도하고 싶을 땐 늘 기도가 안 된다. 뭐니뭐니 해도, 나는 일종의 무신론자다.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다른 내용들은 거의 다 별로다. 예를 들어 열두 제자들이 그렇다. 정말 짜증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는 괜찮았지만, 그분이 살아있는 동안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한 짓이라곤 계속해서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일뿐이었다. 열두 제자들만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누구라도 좋을 정도다.
명기했듯이, 검토 대상으로 삼은 판본은 민음사, 문예출판사, 현암사이다. 예로 들은 위 대목들은 세 판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오역의 사례들이다. 셋 다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문체면에서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번역의 성실도를 따진다면 현암사 판본이 가장 나았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서는 김욱동과 염경숙의 공역본(현암사)의 문제로 “주인공이 구사하는 비속어가 주인공의 경어체 말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원작에서 주인공이 전하는 독백투 이야기의 잠재적 청중은 어른이라기보다 동년배로 보는 게 무난하”고 “따라서 어투도 경어체보다는 평어체로 처리하는 것이 무난하다.”라고 평했지만, 현암사본을 직접 읽어본 결과 경어체에 그다지 무리가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홀든의 회상을 듣는 청중이 어른인지 또래 아이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17세 사춘기 소년이 어른한테 얘기한다고 해서 딱히 비속어를 엄격하게 삼갈 것 같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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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우달임
영문학 박사 과정을 잠시 중단하고 번역에 몰두했다가 지금은 본격적인 서평활동과 서지 검토작업을 준비 중이다. 옮긴책으로 『아주 작은 시작이란 없다』, 『체실 비치에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