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의 1995년 베스트셀러 『더 리더』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시는지. 일인칭 화자 미하엘은 한나를 향한 자신의 집착이 사실은 한나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다른 욕망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게 이른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귀향'의 욕망인데 화자의 돈오 같은 깨달음에 밑줄을 그어놓으면서도 왜 뜬금없이 귀향 얘기가 나오는 걸까 하며 의아했던 독자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독자는 2006년에 출간된 『귀향』의 타이틀을 보는 순간 전작의 말미에 등장했던 귀향 이야기를 떠올렸을 게 확실하다. 아니나 다를까, 석연치 않게 남았던 귀향의 주제가 슐링크의 후속작 『귀향』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귀향』은 제3제국 이후의 독일 현대사와 전후 세대의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전작 『더 리더』와 유사한 궤도 위의 작품이다. 전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독일 통일로까지 연장되었고, 귀향 서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모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리더』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 화자 미하엘이 법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읽게 되는 책이 『오디세이아』고, 또 감옥에 있던 한나에게 보내주기 위해 그가 처음으로 녹음한 책도 『오디세이아』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더 리더』 속에 이미 『귀향』의 첫 단추가 예언처럼 꿰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특기할만한 것은 『귀향』이 『오디세이아』의 귀향 서사적 기본 요소들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아주 흥미로운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오디세이아』는 장장 20년 동안 집을 비운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었던 모험 이야기다. 하지만 『귀향』은 집에서 아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아들이 아비의 모험을 역추적하고 재구성하게끔 설정함으로써 아버지의 서사를 아들의 서사로 바꾸어놓는다.
주인공 페터 드바우어가 바로 그 아들이다.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때 죽었다고만 막연히 알고 있던 페터는 어릴 때 부분적으로 읽은 어떤 소설의 결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소설의 저자가 자기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런데 페터는 그 아버지라는 작자가 나치 사상에 동조했던 전범 수준의 인물로서 미국에 건너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급진적인 해체주의적 법 이론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 경악한다. 아래 인용에서 페터의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뒤이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의 착잡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썼던 글과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모든 책임을 면제시켜주는 그의 이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만 그가 걸었던 인생길에만큼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현실에서 득세한 것을 늘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항상 그것에서 다시 몸을 빼내 마지막엔 그 과정 자체를 합리화하는 이론을 개발한 것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의 유희적 가벼움도 감탄스러웠다. 사실, 그런 가벼운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마음만큼 쉽지 않았다. 나 역시 너무 가볍게, 너무 유희적으로 역사의 대기실에 앉아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페터가 상황에 따라 자기 변신을 일삼는 괴물과도 같은 기회주의자 아버지를 대놓고 비난할 수 없는 까닭은 자기 자신도 역사의 방관자로 살아 왔다는 죄의식 때문이다. 이런 죄의식은 그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발견하기 전부터 느꼈던 것이고, 때문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만큼은 “역사를 놓치고 싶지 않”아 동베를린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나치 과거라는 낙인이 찍힌 아버지 세대로부터 달갑지 않은 유산처럼 물려받은 죄의식에, 전후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까지 더해져, 페터는 괴로운 심경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부끄러운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된 페터의 그 다음 행보는? 페터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분출구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미국으로 날아가 결국 분노의 대상을 직접 대면하기로 한다.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말이다.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으로 강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버지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교수이긴 하지만, 여전히 예의 그 “가난과 고통이 진보와 문화를 가능케 하고, 폭력이 평화를 보장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정의로운 혁명과 정의로운 전쟁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위험한 사상을 해체주의 이론으로 옹호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페터가 그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끼고 독일로 돌아가기 전 <뉴욕타임즈>에 기고하기 위해 쓴 글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아들의 최종 평결문이라 할 수 있다.
“두려워하는 법을 가르치러 집을 나간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앞뒤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역시 유럽에 아내와 자식, 어두운 과거, 옛 이름을 두고 미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이름과 장밋빛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미국 생활을 시작해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직에까지 오른 존 드 바우어, 그러나 그는 과거에…”
아버지의 과거, 그것은 독일의 전후 세대가 부채로 물려받은 무거운 짐이다. 독일은 나치 과거에 대한 집단적인 죄의식에서 아마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페터 드바우어 같은 수많은 아들들이 자기들만의 『오디세이아』를 쓰고 또 쓸 수밖에 없으리라. 이 아들 세대에게 귀향이란 막연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를 대면하고 현재로 돌아온다는 행위가 아닐까? 2008년 『귀향』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됐을 때 쏟아졌던 영어권 국가들의 여러 서평들을 검토해 보면, 전작 『더 리더』에 비해 다층적이지만 산만하다는 평이 더러 있다. 사실 액자 소설 형식에, 귀향 알레고리, 그리고 해체론까지 형식과 내용에 있어 다양하긴 해도 중간 중간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책읽기의 즐거움이라는 게 꼭 작품의 완성도에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귀향』의 경우는 전작 『더 리더』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그 역시 오디세이아의 모티브를 소설 속에서 갖고 놀 정도로 오디세이아를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통속 문화를 처음 접한 것도 그 소설이었고, 그 소설과의 만남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결말을 모른다는 것도 내가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게 했다. 아마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고는 그렇게 오랫동안 그 사람에게 매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를 미워해도 그럴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그의 소설 속에 담긴 유희적 가벼움은 좋아했지만, 그의 편지와 기사에 담긴 유희적 가벼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저승을 꿈으로, 바다를 사막으로, 매혹이 넘치는 칼립소를 가슴이 풍부한 칼린카로 변주한 것과 같은 그런 유희적 가벼움을 사용해서 무자비함을 윤리적 원칙으로, 레닌그라드의 고사 작전을 기사도적 행위로, 베아테에 대한 유혹을 정의의 심판으로 전도시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게 계속 관심을 보여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의 결말이 궁금했다. 그사이 수없이 많은 귀향 이야기를 읽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클라인마이어가 38번지에서 주인공이 아내를 만난 이후의 사건을 수많은 버전으로 상상했음에도 나는 그 작가가 끝에 그 만남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알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아무도 쓰지 않았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귀향일 수 있었다. 어쩌면 귀향의 진수일지 몰랐다. (1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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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우달임
영문학 박사 과정을 잠시 중단하고 번역에 몰두했다가 지금은 본격적인 서평활동과 서지 검토작업을 준비 중이다. 옮긴책으로 『아주 작은 시작이란 없다』, 『체실 비치에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