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이 탄광촌으로 간 까닭은?”
조지 오웰의 정치적 입장은 대단히 독특하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이지만 또 격렬한 반(反) 스탈린주의자이며, 그러면서도 스페인 내전의 경험 이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항상 거리를 유지해왔고, 아나키즘의 입장과 대단히 유사해 보이면서도 실제의 정당 가입은 옛날의 영국 독립노동당이었고,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에 몰입한 적도 없었던 이이다. 하지만 그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 한겨레 출판, 이한중 옮김)은 사회주의 문헌 및 문학사에서 오웰의 정치적 입장 이상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잉글랜드 북부 탄광 지대의 노동자들과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세밀하고도 생생하게 묘사하는 ‘르포(reportage)’이며, 뒷부분은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로서의 오웰이 당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 세력과 지식인들을 향해 내놓는 성찰과 비판의 목소리이다. 이 두 부분 모두가 기존의 사회주의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갖추고 있다. 첫째 ‘르포’ 부분. 사회주의 문학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묘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 ‘현실주의’ 에 선뜻 공감하거나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며, 경제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정형화된 사실(stylized fact)’이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소위 현실주의 문학 이론의 ‘전형(典型)’ 때문일까. 공식적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문학뿐만이 아니다. 업튼 싱클레어나 심지어 브레히트 같은 가외의 인물들에게서도 느껴지는 바이다.
하지만 오웰의 ‘르포’는 다르다. 누구든 이 책의 앞부분을 읽게 되면 이 탄광 지대에 혹시 자기가 이주라도 하게 될 때 어떤 삶이 펼쳐지게 될지가 일종의 보고서처럼 담담히 적힌다 (실제 역사가들이 이 책을 데이터로 사용하기도 한다). 집값은 얼마나 드는지, 그 집이라는 게 대충 어떤 몰골인지, 만나게 될 이웃과 친구들은 어떤 이들이고 그들과 매일 어떤 식으로 부대끼고 어떤 수다를 떨게 될지, 생활비는 얼마나 들고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음식물과 옷과 기호품의 종류, 매일 반복될 일상, 10년 아니 노후까지의 삶에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지 등이 그림같이 선명하다. 이 담담한 묘사에는 ‘이 참상을 보라!’든가 ‘이 체제의 모순을 보라!’는 따위의 쇳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웰이든 당신이든 그 누구라도 그 동네에 가서 살게 되면 그 삶은 어떤 삶일까, 라는 인간적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사회주의 문헌에 항상 깔리고 있는 ‘그들’과 ‘우리’라는 시점을 찾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책의 후반부인 사회주의 운동 및 지식인 비판이 앞부분과 맥락이 닿지 않는 억지라고도 하며 (실제 후반부는 출판에서 배제될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그의 현존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이 ‘나이브’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오웰의 붓끝이 갑자기 바뀌면서 되레 사회주의 지식인들을 몇 가지 ‘전형’으로 묶어 그 세계의 위선과 모순을 낱낱이 밝히는 예측불허의 반전을 만나게 된다. 먼저 오웰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된 과정을 솔직하게 적어나간다. 19세기 유럽 문명의 온갖 자만과 아우라가 벗겨지는 1차 대전 시기에 좌파 흉내를 내는 지적 속물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오웰은 버마의 영국 경찰로 근무하다가 지배와 압제의 현실을 몸으로 겪으면서 인간과 인간의 우애와 평등은 무엇이며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절절히 깨우치게 되고 스스로 2년간 파리의 뒷골목에서 부랑 생활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 책이 씌어진 지 70여 년. 세상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정말 바뀌었을까?”
그러면서 오웰은 1부에서 그려진 탄광촌의 ‘우리’를 ‘저들’로 떼어놓고 사회주의 운동에 동원할 무지렁이 총알받이쯤으로 여기는 사회주의 지식인들에게 엉뚱하게도 ‘비판적 리얼리즘’의 메스를 들이댄다. 알량한 댄디즘에 빠져 좌파 티를 한번 내보고 싶어하는 중산층 속물들, 문화판 담론판에서 시류를 타고 한번 떠 보고자 노리는 문화 좌파들, 동료 부르주아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으로 고뇌하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어 이들을 쓸어버리자고 부르짖는 옥스퍼드 교수, 오로지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합리적’ 사회를 설파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 엘리트들, 카톨릭 사제들처럼 자기들을 뺀 모든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이단이며 개량이며 부르주아의 앞잡이라고 딱지 붙이고 편 가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마르크스주의자들 - 오웰의 표현대로 “죽은 고양이에게 파리 꼬이듯 ‘진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온갖 시시한 족속들”(245쪽)이 모두 다 공유하는 공통점은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데에 있다. 탄광촌 때에 찌든 하숙집에서 쥐꼬리만 한 실업 수당으로 오늘을 꾸려가기 바쁜 이들이 자기들을 ‘저들’이라고 부르는 이 시건방진 족속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주의 운동은 그래서 이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들 사이에서 힘을 얻는 것은 되레 파시즘이 되어가고 있다고 오웰은 경고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정작 소중한 ‘우리’를 회복하고 그 인간적 정서의 연대와 우정을 회복하는 일은 뒷전에 둔 채, 현 체제에 대한 자신들의 악감정과 저주를 풀어놓기에 바쁘다. 이와 반대로 파시스트들은 남루한 작업복을 입고 빈곤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 ‘일체감’이니 하는 말들로 빈곤 대중들을 전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책 전체가 보통의 사회주의 문학 작품들과 그 구성이나 흐름이 정반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보통의 사회주의 문학 작품들은 ‘당파적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논리에서 도출되는 현실 세계의 ‘모순’을 읽어내기 위한 텍스트로서 현실 세계를 스캔하며, 거기에서 걸려드는 건더기들을 다듬어서 ‘전형’을 만들어 낸다. 오웰은 다르다. 파리 뒷골목의 부랑 생활의 이력을 살려 탄광촌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촘촘히 ‘겪는다’. 그리고 자신이 이들과 ‘우리’로 한데 얽힐 사회주의 운동이 현실에서 힘을 얻지 못하는 ‘모순’을 발견한다. 이 ‘모순’을 렌즈로 삼아 현존하는 사회주의 세력을 스캔한 뒤, 거기에서 걸려드는 가지가지 모습들을 ‘전형화’하고 신랄한 독설을 퍼붓는다.
오웰이 이 책을 쓴 뒤 70년이 지났고, 세상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 정말 바뀌었을까. 그렇다면 1부에 적힌 사람들의 삶은 서울 한 귀퉁이 쪽방 고시원의 삶과 어찌도 그렇게 닮은 것일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심지어 자신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언어로 오늘도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질타하는 좌파 지식인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당장의 괴로운 삶을 좀 풀어보려는 소박한 노력들이 있을 때마다 ‘올바른 관점’ 들이대며 주눅 들게 하는 ‘좌파’들은 왜 아직도 설치고 있는 것일까. 진보 정당은 두 개씩 있건만 합당이네 분당이네 하는 것 말고는 대중 사업을 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혹 합당/분당이 그들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사업인가). 삶이 괴로운 우리들은 매일같이 무수히 우리 서로의 눈에 밟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우리를 만나 서로 힘과 희망을 나눌 수 있는 장(場)은 왜 이리 드문 것일까. 위건 부두로 돌아가고 싶다. 탄광촌의 힘든 사람들은 고급 휴양지(pier)를 갈 돈도 시간도 없으니 옆 동네 위건(Wigan)에 있는 쓰러져가는 꾀죄죄한 나무 부두(pier)나 가서 놀자는 자조(自嘲)의 농담이 있었다고 한다. 2010년 서울에 살고 있는 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이상이 완벽하게 실현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따위는 갈 생각도 갈 힘도 없다. 집 앞 누추한 꼼장어 집에서 우리들과 모여 위로하고 위로받고 작은 미래를 함께 모색하고 싶을 뿐. (*)
노동자는 진정한 노동자로 남는 한,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거의 혹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다분하며, 기회가 닿으면 공산당에도 표를 던질 수 있겠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보다 신분이 높고 책으로 훈련받은 사회주의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평범한 노동자에게, 이를테면 토요일 밤 아무 선술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유형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혁명적인 유형에겐, 즉 기아 및 실업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석하고 고용주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유형에겐, 사회주의란 압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구호일 뿐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진정한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보다 심각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사회주의란 곧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良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가 모르는 것은 사회주의를 경제적 정의로만 축소할 수는 없으며,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문명과 우리 자신의 생활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미래관은 지금 사회에서 최악의 폐해만 제거된, 관심사(가정생활, 선술집, 축구, 지역정치)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인 면에 대해, 저 신비로운 세 존재 정正·반反·합合이라는 트릭에 대해, 나는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노동자는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 물론 노동 계급 ‘출신’이면서 이론적이고 딱딱한 문어를 구사하는 유형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로 ‘남은’ 사람이 절대 아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바로 앞 장에서 언급한 유형 중 하나에 속한다. 즉, 문단의 인텔리가 되어 중산층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유형이거나, 노동당 하원의원 또는 고위 노조 간부가 되는 유형인 것이다. 이 마지막 유형은 세상에 비할 데가 없는 꼴불견이다. 그는 정작 자기 동료들을 위해 싸우라고 선출됐지만, 그 자리는 그에게 오로지 편안한 일자리와 신분 ‘향상’의 기회일 뿐이다. 그는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와 싸움으로써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 남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실제로 ‘노동’을 하고 있으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건전한 광부나 제철 노동자, 직조공, 부두 노동자, 건설 인부를 만나본 적이 전혀 없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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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홍기빈
대학시절 주류 경제학보다는 뮤지컬을 작곡하는 등 총 연극회를 중심으로 각종 문화패 활동을 주로 했다. 90년대에 정치경제학 연구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외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정치경제를 공부했다. 이후 요크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지구정치경제학을 공부했으며, 조너선 닛잔 교수의 지도 아래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소유 구조, 금융 체제, 지배 블록의 역사적 융합을 논한 “자본 통합 복합체”이론을 구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기적인 관심사는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서구 지배체제에 맞서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대체 세력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동북아시아 국가들 간의 평화적인 경제 안보 체제 구축과 급변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치 경제학에서의 이론적 혁신은 어떻게 가능한가 등이다.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여러 매체에 지구정치경제 칼럼니스트로 정기·비정기 기고를 하고 있다. 저서로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 2001), 『투자자 - 국가 직접 소송제: 한미 FTA의 지구정치경제학』(녹색평론사, 2006), 『소유는 춤춘다: 세상을 움직이는 소유 이야기』(책세상, 2007)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책세상, 2002), 『다수 문명에 대한 사유』(책세상, 2005),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책세상, 2009),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ㆍ경제적 기원』(도서출판 길, 2009), 『뉴 레프트 리뷰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