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으로 바뀐 것은 미국 사회가 공감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
언제부턴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물밀듯 들어오더니, 이어 코리안 드림이라는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이 한국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비단 노동자뿐만이 아니다. 외로운 농촌 총각의 평생배필로 낙찰된 수많은 외국인 며느리의 탄생도 그 본질은 코리안 드림이다. 이름만 들어도 자연스레 외국인 노동자가 떠오르는 도시가 생겨났고, 시골 살림은 한국말 서툰 며느리 손에 맡겨졌다. 이제 한국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어우러진 다문화/다인종 사회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코리안 드림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그늘이 사뭇 짙다. 오죽하면 한때 “사장님, 나빠요”라는 유행어가 돌았을까?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장이 많고, 자기 하나만 믿고 따라온 외국인 부인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남편이 부지기수다. 이런 민망한 현실은 아직 우리 사회가 한국에 온 외국인들의 소박한 꿈을 실현시켜줄 여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충분한 마음의 준비 없이 급하게 머릿속으로 주판알만 튕기며 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름’에 대한 편견과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곳에서 이방인의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꿈을 실현하기는커녕 착취와 유린에 시달리다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가. 코리안 드림에 대한 반성이 시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기에 한국에 『사코와 반제티』가 번역출판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20세기 초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이면이라 할 수 있는 사코/반제티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코리안 드림의 병폐를 진단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유의 여신상’ 기단에 씌어진 에마 라자러스의 시 「새로운 거상」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미국은 언제나 꿈의 대륙이었지만,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렸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엔 특히 이민자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뉴욕항 엘리스섬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이민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놀라운 광경 가운데 하나는 리버티섬의 자유의 여신상이었는데, 여신상 기단 내부 동판엔 “그대의 지치고 가난한 자들을, 자유를 숨 쉬고 싶어 하는 서민들을, 그대의 충만한 해안이 거부한 불쌍한 쓰레기들을 내게 주시오. 집도 없이 온갖 불행에 시달린 이 사람들을 내게 보내주면, 황금 문 옆에 등불을 들어 올리고 있으리다”라는 시구(에마 라자러스(Emma Lazarus)의 「새로운 거상(巨像)」(“New Colossus”) 중에서)가 마치 환영사처럼 새겨져 있다. 그러나 1927년 여름, 늘 넓은 품으로 이민자를 거두어줄 것 같던 자유의 여신상이 피눈물을 흘릴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뒤 신랄한 사회풍자로 유명한 독일 화가 게오르그 그로츠는 실제로 피 흘리는 여신상을 그렸는데 그 그림 속 자유의 여신상은 사코와 반제티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단 위에 서서 하늘 높이 전기의자를 쳐들고 있었다.
그로츠의 그림에 등장하는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1927년 8월 23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무장강도 및 살인죄로 전기처형당한 이탈리아계 이주 노동자이다. 1920년 기소된 후 항소를 위한 잇단 이의신청과 기각으로 점철되다 끝내 사형 집행으로 막을 내린 7년여의 법정 공방은 당대에 세계적인 반향이 대단했을 뿐 아니라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미국의 진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2008년 <사코/반제티 기념회> 강연에서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을 보고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관심이 아직도 뜨겁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정도다. 사코/반제티 사건은 그러나 한국의 경우 2007년 재일조선인 서경식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짤막한 꼭지를 통해 소개한 적이 있을 뿐 한국 독자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망각지대였다. 비슷한 성격의 세계적 누명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의 국내 인지도가 제법 높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사코/반제티 재판을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재판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 사회의 이주 노동자에 대한 암묵적인 편견과 차별이 극단으로 치닫다가 사법 정의의 실패로 귀결된 대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와 20세기 사이의 경계선, 사코/반제티 사건”
사건 초기 사코/반제티 재판의 쟁점은 7년여의 긴 재판 기간이 무색하리만치 간단했다. 1920년 5월 5일 매사추세츠 주 경찰은 살인 및 무장강도 혐의로 사코와 반제티를 체포한다. 사코와 반제티가 제화 공장의 주급 봉투를 나르던 경리부장과 보안요원을 총으로 살해하고 1,600달러의 급료를 강탈했다는 혐의였다. 유죄냐 무죄냐만 공정하게 가리면 쉽게 끝날 재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의 결백을 입증해주는 알리바이에 대한 여러 증언과 정황 증거에도 불구하고, 매사추세츠 주 법정의 “선입견에 치우친 배심장(foreman), 정치색이 짙은 법정, 악의적인 판사”는 불공정한 재판을 강행, 결국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런 이유로 재판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미국 안팎에서 커지기 시작해 대대적인 시위로 발전했다. 또 두 피고인이 평소 무정부주의를 신봉했다는 사실이 도마에 오름에 따라, 재판은 보수/기득권층의 매사추세츠 주 대(對) 급진 사상에 물든 이주 노동자라는 전례 없는 계급투쟁과 사상투쟁의 장으로 확대됐다. 저자 브루스 왓슨도 사코/반제티 재판을 유죄냐 무죄냐의 사법 정의의 차원을 넘어선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국경을 넘어서면 미국은 단일한 나라로 보였다. 그러나 1927년에 미국은 존 더스 패서스(John Dos Passos)가 썼듯이 ‘두 개의 나라’였다. (중략) 미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뚜렷한 미국적인 해가 시작되었을 때, 사코와 반제티는 이런 관계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들이 유죄냐 무죄냐에 대한 견해에 따라 세련된 도시민과 ‘시골뜨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이들과 경찰, 판사, 배심원이라면 무작정 믿는 이들이 구분되었다.” 왓슨에 따르면 보수 진영에게 사코와 반제티는 서민 이민 계층과 급진주의자의 부활을 상징했고, 이 둘의 사형은 범죄의 근절을 상징했으며, 보수 세력의 성채인 보스턴에서 사코와 반제티는 “이런 여러 상징을 넘어” “빅토리아 시대와 혼란스런 20세기 사이의 경계선”이었다. 서경식 또한 사코/반제티 재판의 시대적 문맥을 짚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경기 불황으로 파업과 데모 등 민중 투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적색 공포 조장과 인종차별적인 이민제한 입법으로 강경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적색 공포가 공격적인 백색 테러로 변질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해져 가던 와중에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는 이탈리아계 이주노동자’였던 사코와 반제티는 말 그대로 시대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 1898년 1월 13일 프랑스 일간지 <로로르>(L'Aurore)에 실린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
시대적, 정치적 맥락 외에 저자 왓슨이 책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언급하고 부각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나는 고발한다’ 파(派)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로 앨버트 아인슈타인, 스콧 피츠제럴드, 업튼 싱클레어, 로맹 롤랑, H. G. 웰스, 조지 버나드 쇼 등 여러 명사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사코와 반제티의 사형 선고에서부터 집행까지 불공정한 재판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불의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한 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나톨 프랑스는 「유럽 노인의 호소」라는 글에서 “가장 사악한 이 판결이 집행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사코와 반제티의 사형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당신들은 수치스러움으로 뒤덮일 것이다. 당신들은 위대한 민족이다. 당신들은 공정해야 한다. 사코와 반제티를 석방하라”고 호소한다. 일개 ‘착한 제화공과 가난한 생선 장수’에 불과한 두 이주 노동자가 당한 불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용감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지식인의 생생한 발언을 읽다 보면 사코와 반제티가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은 데에는 이들의 역할도 컸으리라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엔 오만가지 불의가 횡행했고 또 횡행하고 있지만, 그 모든 불의가 집단의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감증과 무관심 때문에 소리 없이 묻히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렇다면 어떤 사건이 인류의 기억 창고 속에 보존되는 운을 누리는 것일까? 인간이 겪는 부당한 고통에 공감하고 더 나아가 그런 불의를 소리 높여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부당한 사건은 잊혀지기보다 기억되기 쉽다. 우리가 드레퓌스라는 유대계 프랑스 장교의 누명사건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덕분이지 않은가. 사코와 반제티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이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끌다가 집행된 것은 불의에 눈감지 않고 저항한 고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사형이 집행된 지 8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코와 반제티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연을 시, 소설, 노래, 연극, 영화, 그림으로 부지런히 기록하고 재현함으로써 고발해왔기 때문이다.
미국 고발 문학의 기수였던 업튼 싱클레어는 사코/반제티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 『보스턴』(Boston) 서문에서 『보스턴』을 “동시대 역사 소설(contemporary historical novel)”이라 칭하면서 “사코와 반제티라는 두 개인을 다룸에 있어서 이 책은 허구가 아닌 역사를 기록하려는 시도이다”라고 썼다. 방대한 재판 기록을 꼼꼼히 점검하고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했을 뿐 아니라 그 정치적 이면을 양극화된 미국 사회의 분열로 짚어냈다는 점에서 왓슨의 『사코와 반제티』 또한 역사를 기록하려는 시도임이 틀림없다. 특히 왓슨이 “(미국에서) 1920년대에 스러져 간 모든 것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건 무엇보다 공감의 상실”이라고 진단한 부분은 두 이주 노동자의 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으로 바뀐 것은 미국 사회가 공감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저자의 이런 통찰을 코리안 드림에 역으로 적용해 보면 이렇다. 외국인 노동자의 코리안 드림이 악몽으로 끝나지 않도록 한국 사회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부단히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공감의 능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타인의 부당한 고통, 즉 불의에 무관심하거나 눈 돌리지 않고 앞장서서 소리 높여 비판하고 부지런히 기록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공감의 능력이 크리란 것만은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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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오 반제티, 발언할 것이 있습니까?”
반제티가 일어섰다. 그는 얼마나 긴긴 밤들을 엎치락뒤치락하며 이 장면을 예상해 왔던가? 지난날 쉰 명 앞에서 했을지도 모를 연설문을 작성한 뒤 체포된 그는 이제 수백 명의 방청객 앞에 섰다. 그 가운데에는 반제티의 발언을 온 세계에 알리려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설문을 써 오지 않고 그저 낡은 편지지 뒷면에 연필로 몇 가지 요점만 정리해 왔다.
1. 두 가지 범죄와 무관하다.
2. 절도와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3. 법과 종교가 금지하는 강도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쪽지를 쥔 반제티가 입을 열었다. “나는 두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생 도둑질을 한 적도, 누굴 죽인 적도, 폭력 행위를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 … 내 두 팔을 잘 아는 모든 이들은, 내가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을 까닭이 없다는 걸 압니다. 나는 내 두 팔을 갖고 잘 삽니다.” 방청객들은 눈물을 애써 참았고, 반제티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세이어 판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 사건이 ‘유럽 사람들이 꽃을 피워 냈음을, 유럽의 훌륭한 과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를 위해 탄원했음을’ 안다고 했다. “도대체 말이 됩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세상이, 온 세상이 틀렸다고 말하는데 배심원들이 그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 판사님은 우리가 일곱 해를 갇혀 있었던 걸 압니다. 그 일곱 해 동안 우리가 겪은 고통은 어떤 사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판사님은 내가 판사님 앞에서 떨지 않는다는 걸 보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수치스러워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 나는 판사님을 똑바로 보고 있습니다.” (중략)
쪽지를 간간이 들여다보고, 쪽지를 난간에 내리치기도 하면서 반제티는 42분 동안 발언했다. 그는 ‘판사님과 모든 권력이 배척하는 … 캘리포니아 출신’ 변호사를 고용한 일을 한탄했다. 그리고 세이어 판사에게 호통을 쳤다.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편견에 차 있고, 이보다 더 잔인한 판사는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입증했습니다.” 콧수염을 기른 이 키 작은 사람이 울안에서 이야기할 때, 판사는 허공을 응시하거나 판사석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방청객들은 그에게 집중했다. 반제티는 마지막 진술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개나 뱀에게 구차하게 빌지 않을 것입니다. … 저지르지 않은 죄로 고통받아야 했던 것들에 대해서. 그러나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고통받아야 했다는 걸 분명히 압니다. 나는 급진주의자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급진주의자입니다. 나는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물론 나는 이탈리아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족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고통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두 번 죽일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두 번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여태까지 살았던 대로 똑같이 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0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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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우달임
영문학 박사 과정을 잠시 중단하고 번역에 몰두했다가 지금은 본격적인 서평활동과 서지 검토작업을 준비 중이다. 옮긴책으로 『아주 작은 시작이란 없다』, 『체실 비치에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