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희곡인가?”
“시, 소설을 쓰는 다섯 작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0. 왜 작가들은 희곡을 쓰고, 희곡을 쓰지 않을까? 우리나라 작가들은 희곡을 쓰는 이들과 쓰지 않는 이들로 구별될 수 있다. 희곡을 쓰는 작가 대부분은 문학보다는 연극 동네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들의 작품 대부분은 집필 전이나 후에 각종 문예 지원금의 혜택을 받아 공연에 이르게 된다.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이매진, 2009)는 그 흔한 번역극보다 우선시되는 창작희곡이라는 범주를 내세우지 않은, 작가들이 그저 “한국 문단에 존재하고 있는 장르 간의 칸막이 현상을 조금이라고 해소해 보겠다는 욕심”으로 씌어진 희곡집이다. 이들 작가들은 문학이라는 전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은 이들의 깃발처럼 보인다. 문학이라는 글쓰기가 작가들에게 생계형이 다 된 지금, 소설다운 소설을 찾아 읽기 힘든 오늘날, 아니 문학이란 이름값조차 축소되거나 기형이 된 이곳에, 장정일과 김경주가 엮은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 작품을 짬짜미한 하일지, 정영문, 서준환, 김경주와 같은 작가들은 장엄한 귀순 용사가 아니라 문학의 최전방 진지로 들어간 척후병 같다. 책을 읽으면서 반갑고, 놀라운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이 ‘낯선’ 희곡집을 거푸 읽으면서 연극과 글쓰기에 관한 내용을 지닌 체호프의 「갈매기」를 연상했다. 5명의 작가들 모두 어려운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조금 불편하겠지만,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체호프의 「갈매기」로 이 희곡집을 언급하고 싶다. 희곡읽기가 재미있다는 것, 희곡이 결코 소설이나 시에 밀려 문학의 하위 장르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 왼쪽부터 장정일, 김경주, 하일지, 정영문, 서준환. 사진제공: <한겨레>
1. 체호프는 소설과 희곡을 두루 썼다. 좋은 희곡은 거푸 읽게 되고, 두루 해석하게 된다. 내게 「갈매기」와 같은 희곡은 분석의 대상이기 보다는 읽어서 더 깊게 이해하고 싶은 텍스트로 있다.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 들어 있는 작품들을 쓴 4명의 작가들이 「갈매기」에 나오는 뜨레쁠레프와 오버랩되었다. 텍스트를 읽다 보면 읽는 내 나이와 비슷한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마련이다. 이제는 소설을 쓰는 뜨리고린이나 의사인 도른 혹은 교사인 메드베젠꼬와 같은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아르까지나와 쏘린 혹은 샤므라예프에게 깊은 연민을 지니게 될 것 같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뜨레쁠레프와 니나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갈매기」는 힘들게 희곡을 쓰면서 세상에 저항하는 한 젊은 작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겉잡아서 보면,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는 한국 문학에서 희곡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 그러니까 희곡을 발표할 지면이 없다는 것, 발표되었다고 해도 서평 한 번 실리지 못하는 현실을 거침없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표현양식과 지평을 넓히는, 문학의 속살로서 희곡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말하고 있다. 다섯 명의 작가가 뜻을 모은 이런 식의 희곡집 출간은 거의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들조차 이 희곡집 출간 다음을 걱정하고 있다. 이는 희곡집 출간 전과 후가 같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이 희곡집은 다른 시인, 소설가들에 의해서 “연이어 출간될”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희곡이 “한국 문학 속에 자연스러운 일로 자리잡기를, 그렇게 무마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때가 2009년 10월이었다.
2. 왜 하필 희곡인가? 시나 소설에 비해서 희곡만 유독 힘든 세월을 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희곡은 참 읽기가 어려운 장르이다. 내 경우, 체호프의 희곡을 예로 들면, 읽기는 읽되 다 읽기가 어려웠다. “도무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니나) 체호프의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러했다. 그러나 「갈매기」에 나오는 마샤의 첫 대사인 “검은 옷, 내 인생의 상복”, “불행한 여자”, “검은 느릅나무”가 젊은 시절의 아포리즘처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정말이지 대학에 들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때는 “춥고 추웠으며, 허무하고 허무했으며, 두려웠고 두려웠으며 또 두려웠었다”(니나). 체호프는 “나는 고독하다. 백 년에 한 번 말하기 위해 입을 연다… 나의 목소리는 이 공허 속에서 쓸쓸하게 울리지만 듣는 사람은 없다”(니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체호프 작품의 속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세상은 “떡갈나무 거목”이었다가 “지금은 그루터기뿐”(도른)으로 변했다. 정영문의 「당나귀들」을 읽고는 나는 조금 더 슬펐다. 그의 희곡이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는 그 그루터기마저 사라진 폐허 위에 세운 인공의 세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희곡은 가상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인데, 읽다 보면 이것이 속이 없고, 겉만 있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아포리즘이라는 것을 절로 깨닫게 된다. 삶의 터전이 망가진 다음에 언어가 겪는 그 수렁이 참으로 혹독하다. 장군, 신하, 학자, 전령, 광대의 말들이 그저 공허할 뿐이다. 크게 보면, 이 희곡집에 실린 4개의 희곡 모두 이 시대의 우울하고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상복이다.
3. 그런데 요즘은 체호프가 잘 읽힌다.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도 끝까지 읽었다. 그것도 한 줄 한 줄 끝까지. 손에 들고 고개를 낮춰 읽다보면 어느새 다 읽게 된다. 「갈매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돈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마샤의 대사는 부자도 불행할 수 있고, 가난한 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이는 하일지의 「파도를 타고」에 등장하는, 한국을 버리고, 가능하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가면서 행복을 찾는 아버지인 남자와 닮았다. 아버지인 남자와 남자의 아버지인 노인은 모두 오늘날 한국처럼 “앞뒤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처럼, 시골과 도시의 차이처럼, 「갈매기」는 맨 앞부분부터 장소의 대비와 더불어 일상생활과 인물들에 대한 이항적 대비가 철저하다. 마샤와 그녀를 사랑하지만 서로 영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메드베젠코의 일상이 전경이라면 그 후경에 뜨레쁠레프와 희곡을 쓰고 연극을 하는 이 아들과 불화하는 어머니인 배우출신의 아르까지나가 있다. 아들은 어머니를 “악덕에 몸을 맡기고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사랑을 찾”는 존재로, 어머니는 아들을 “피투성이 넋으로 치명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란한 명성을” 원하는 니나와 “갈매기처럼 자유롭”고자 하는 뜨레쁠레프의 연극이 자리 잡는다. 전경인 일상과 후경인 연극도 또 다른 모순적 대비일 터이다. “신원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지도 모르는” 마샤와 “술과 하늘을 좋아하는” 뜨레고린을 포함하여 등장인물들은 한통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본 적이 없는 인물들”과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생은 얼마나 많이 이런 사람들을 낳고 무시하고 또 반복하는가! 뜨레쁠레프의 대사처럼,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구분되는가! 극장을 인정하는 이와 극장을 좋아하는 이, 나이를 생각하는 이와 생각하지 않은 이로 얼마나 극명하게 나누어지는가! 그런데 체호프의 작품은 여기에 그냥 머물지 않는다. 문제는 발자국과 발자국의 경계, 사이의 흔적, 자취에 있다. 이 경계와 사이에 ‘무거운 시간Le temps est lourd’(마샤)과 ‘어떠한 장치aucun décor’도 없는 ‘빈 공간espace vide’(뜨레쁠례프) 즉 “틀에 박히고, 인습에 불과”한 세상이 슬쩍 감추어져 있다. 「파도를 타고」에서 그런 공간은 바다일 터이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 내게는 이런 것들을 알아채고 느낄만한 깜냥이 없었다. 그저 “진지한 것이 아름답다”, “무엇 때문에 쓰는가?”(도른)라는 말들만 가슴 속 깊은 우물에 넣어두었을 뿐이었다. 「갈매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일상적 삶은 감옥이고, 연극(하기)은 그 “감옥을 탈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된다. 어두운 우울에 명징한 절망이 덧붙여지면 그 끝은 자살일 터, 「갈매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땅을 버리고 뭍으로 간, 조국을 잊겠다고 다짐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하일지의 「파도를 타고」는 희곡의 새로운 형식이기보다는 전복된 삶을 보여준다. 국가와 가족 그리고 개인의 흔적이 전경이며 후경이며 내용인데, 일상의 삶과 사뭇 다르다. 그만큼 오늘날 이 땅의 삶은 복마전과 같다는 뜻이다. 「파도를 타고」에서 “낡고 사방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배, 그러니까 일상의 삶부터 국가는 「갈매기」의 그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인물들이 어김없이 죽는 것, 그 죽음이 일상의 깃발과 같은 것, 오늘날 사는 일 그 자체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운명’이라고 말한다.
4.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를 다 읽고 나니 뜨레쁠레프처럼 “생이 어느 날 갑자기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된 때가 떠오른다. “젊음이 어느 날 갑자기 꺾여 벌써 구십 년이나 산 것”과 같은 기분이 든 때가 상기된다. 그러고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하는 이가 걷던 땅에 입을 맞추고, 어디를 보아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보이고, 한 생애의 가장 즐거웠던 시대를 비춰 준 사랑하는 이가 보여주었던 미소”를 기억하게 된다. 그 생은 얼마나 고독하고 추운 것인가. 떠나가는 니나가 정말 깨달은 것일까? 맨 끝 부분에서 니나가 하는 고백처럼, “무대에 서는 거나 글을 쓰는 거나 매한가지”라는 것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정말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법을 알고”있어 “그다지 괴로울 것도 없고, 사명을 다하면 인생도 두렵진 않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직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다음, 니나가 “지금 가까스로 서 있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부분이 내게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갈매기」를 다시 읽으니,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없어”(뜨리고린) 보였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청각, 후각과 같은 미세한 감각일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서준환의 「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 나오는 ‘마담 X의 스튜디오’라는 정체 모를 장소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부질없는 짓이긴 해도 이런 걸 부질없이 하는 만큼은 부질있기도 한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애매모호한 내용과 비슷하다. 인물들은 거의 모두 젊음의 기억 없이 한순간에 늙어버린 것 같다. 이 작품은 “모든 감각 세포들이 돌올하게 곤두서는”, 듣고 냄새 맡는 감각이 두드러진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눈으로 보고 생겨난 자극”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 속, 눈으로 보는 세상과 등장인물들은 기괴하고 다층적이고 꼬리가 꼬리를 무는 형상이다. 그것은 김경주의 「블랙박스」에 이르러 카파, 미하일, 스튜어디스와 같은 인물과 비행기 기내와 같은 공간의 기괴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5. 2009년 10월, 시와 소설을 쓰는 다섯 명의 작가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 희곡 속 그 암울하고 기괴한 세상은 새로운 형식의 연극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갈매기」에서 뜨레쁠레프가 갈구하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란 단순히 연극에 머물지 않고, 위에 적은 모든 적대적 관계들이 서로 소통하는, “삶을 재현하되 있는 그대로도 아니고,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보여줘서도 안 되고 오로지 우리들 꿈속에서 보여지는 것”이어야 하는 연극이다. 그리하여 그 연극은 사랑하는 이가 저쪽에서 내가 있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를 아름답게 ‘꿈’꿀 수 있는 일상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리하여 “여전히 망상과 환영의 혼돈 속에 방황”할 수밖에 없고, “신념을 가질 수도 없고, 무엇이 자기의 사명인지도 모르는”(뜨레쁠레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국가주의를 부정하고, 나라가 망하는 현장에서 언어가 꾸미는 패러디를 보여주고, 섹스 숍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오늘날 세상을 환치하고, 모든 게 소란스럽고, 불안하기만 한 그 속에서도 새로운 언어를 꿈꾸는 우리 작가들의 노력과 신념을 보았다.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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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안치운
호서대 연극학과 교수이자 연극평론가이다. 지은 책으로 『연극배우 추송웅』, 『연극과 기억』, 『연극 반연극 비연극』 등 연극에 관한 책들과 산문집 『시냇물에 책이 있다』, 『길과 집과 사람사이』 등이 있다. 지금은 프랑스 현대 연극의 상징이 된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희곡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