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거듭난 히피의 유쾌한 모험기”
“자본의 논리/윤리는 탁월하게도 스스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대를 포섭하고 순치할 줄 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생각이나 믿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품은 사람들의 규모가 클수록 그렇다. 개인들의 믿음이 보편성을 띤다고 여겨지는 신념의 자리에 한 번 올라앉으면 그 신념을 허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된다. 신념 자체의 내구력과 관성이 있고, 신념을 버릴 때 주어질 처벌에 대한 두려움 탓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 이 같은 보편적 신념을 대표할 만한 예는 경제의 크기와 자본의 힘을 키우는 것이 더 나은 미래와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가장 긴요한 조건이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오늘 아무도 거역하지 못할 묵시의 율법이 되어 있다. 물론 율법을 어기거나 의혹을 던진다 해서 20년 전처럼 손톱 밑을 바늘로 찔러대거나 인간 통닭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 방법은 지나치게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을 제사장과 형리들이 알아챘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사람은 이제 무시당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런 만큼 자본이 선호하는 흐름을 거스르는 방향에서 바람직한 미래와 삶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메아리를 얻기가 쉽지 않다. 메아리는커녕 철 지난 개꿈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지 모른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막연한 구호 수준을 넘어선 생태주의·환경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받는 처우는 여전히 이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이들 담론은 대체로 지구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건강을 첫 번째 관심사로 두는 까닭에 한국인 다수가 섬기는 경제 지상주의에는 못마땅한 상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윤리가 탁월한 점은 스스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대를 포섭하고 순치할 줄 안다는 것이다. 돈도 벌고 환경도 지키겠다는 ‘녹색성장’론은 그 유력한 본보기 아닐까. 여기서 이 문제를 따져볼 겨를은 없다. 단지 돈벌이를 능사로 아는 권력마저 어떤 식으로든 의제 삼기를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생태·환경의 위기가 깊어졌다는 사실, 이 위기가 불러오는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작은 샘물이라도 파러 나선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 충분하다.
『굿바이, 스바루』의 지은이 덕 파인은 그처럼 스스로 샘을 판 목마른 사람들의 일원이다. 자유로운 신분의 기자로 15년 넘게 세계를 돌아다니던 이 30대 미국인 총각은 어느 날 아무 연고도 없는 뉴멕시코주의 시골 농장으로 들어간다. 왜? “화석연료를 근절하고 지역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가 보기에 오늘의 생태·환경 위기는 석유와 석탄 같은 화석연료에 의해 움직이는 문명이 필연적으로 가져온 결과이며, 책 제목에 나오는 일본제 사륜구동 승용차 스바루는 바로 그 석유문명을 한몸에 상징하는 존재다. 석유문명과 (점진적으로나마) 이별하고 대안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저자의 기획은 그래서 스바루를 버리고 트럭을 산 뒤 석유 아닌 폐식용유를 연료로 삼는 데서 시작한다. 나아가 그는 국가 전력망에 기대지 않고 에너지 전환을 실행코자 태양열 전지판을 설치하고, 유기농으로 텃밭을 가꾸는 한편 닭을 길러 식량을 마련하며, 생활협동조합에 참여해 자립적 지역경제를 살리는 데 힘을 보탠다. 이런 행동들을 통해 “독립적인 녹색 삶”에 다가서려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우여곡절과 좌충우돌의 기록이 이 책이다.
독립적인 삶을 꿈꾸며 시골로 가서 체제에 대한 나름의 거역을 실천하는 미국인들의 이야기라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소로우의 『월든』이나 스콧/헬렌 니어링의 책들 같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굿바이, 스바루』의 저자가 정신적 계보상으로 이 사람들과 근친관계를 맺고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덕 파인은 선배들의 진지한 어조나 남다른 길을 걷는 이들다운 고독과 침잠의 분위기는 하나도 물려받지 않았다. 반대로 그의 말투는 더러 경망스럽다는 느낌을 줄 만큼 명랑하고 발랄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바탕에 쉼 없이 흐르는 것은 해학과 풍자의 충동, 매사를 한 번쯤 뒤집거나 비틀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장난기다. 파인은 자신이 초심자로 시골에 정착하면서 저지르는 엉뚱한 실수와 사고, 동네 이웃들과의 어울림과 어긋남을 해학 어린 필치로 묘사한다. 이를테면 장차 젖을 짜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을 작정으로 데려온 어린 염소들과 다투거나 가축들을 코요테의 습격에서 보호하려고 갈팡질팡하는 저자의 모습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부시 행정부에서부터 “유엔을 두려워”하고 총을 사랑하는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마법의 E로 시작하는 주문(Economy)”에 들려 있는 미국의 반환경적이고 보수적인 정치·문화에 조롱과 풍자를 아끼지 않는다. 미국 소비문화의 성지라고 할 대형할인매장 월마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관찰은 이 책의 풍자정신이 성공적인 표현을 얻은 경우다.
심지어 온도와 습도까지 아칸소 본부에서 관장했다. 무한정 자라나는 절박한 쇼핑객들을 재배하는 할인소매 토양이 깔린 정원 같았다. 이곳은 쇼핑객들에게 먹이도 주고 물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월마트 경영자들은 농부라고 해도 좋았다.
본래 해학과 풍자는 원대한 이상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정열의 소산이라기보다 사물의 이면과 모순에 민감한 정신의 증표다. 덕 파인도 친환경적 삶이라는 이상을 품고 몸소 실천하고 있지만 그는 이 삶에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모순을 정직하게 응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모순이란 날림 음식(정크푸드)이 있어야 청정연료(폐식용유)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 태양열을 얻기 위해서는 비용을 뽑을 길 없는 1만 2천 달러짜리 전지판을 달아야 한다는 사실, 게다가 그 전지는 “캐나다 상당 부분을 오염시킨” 납을 함유한다는 점 같은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의 깨달음이 내디딘 발길을 되돌리게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명분과 대의 앞에 스스로의 욕망을 종속시키거나 불필요한 요소들을 삶에서 추방하는 데 몰두하기를 어렵게 할 가능성은 있다. 그런 종류의 행동을 사양할 뜻을 파인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힌다.
넷플릭스 인터넷 비디오 대여 서비스, 무선 이메일, 쿵쿵 울리는 서브우퍼가 좋다는 것. 솔직히 말해, 그런 것들 없이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태양열을 동력으로 쓰고 싶었을 뿐.
이 말은 파인의 환경주의가 산업문명의 해악뿐 아니라 그 혜택과도 결별을 감수해야 한다고 보는 근본주의적 생태 이념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생태·환경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관건이 에너지 전환과 더불어 에너지 사용 자체를 최대한 줄이는 일이라는 입장에 선다면 파인의 현실주의 또는 미국인다운 실용주의를 불철저하다고 여길 소지가 있을 터이다. 아무려나 덕 파인이 선 자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발돋움이, 방금 인용한 말에 나오는, 현대성의 영예(또는 잔재)로 간주되는 사물들을 포기할 각오와 능력을 갖춘 특별한 인간들만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다. 오히려 그런 각오와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의 자기 구제를 위한 한 걸음이 지구와 인간의 안녕을 위해 결정적이라는 말을 이 책은 핵심에 두고 있다. 농장에서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를 묻는 동네 친구에게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미국인이 화석연료를 대폭 줄이고도 평범한 미국인답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하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이 생태와 환경에 닥친 위기를 시시각각 실감하면서 나날의 삶을 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숲이 사라지고 땅이 사막으로 변한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우리는 지금 누리는 소비생활이 지속 가능하리라고 막연히 상상한다. 덕 파인은 이것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의 사회적 등가물”이라고 본다. 또 우리가 더 이상 지금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으며, 파국을 면하려면 평범한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굿바이, 스바루』는 이렇듯 심각한 전언을 저자의 경쾌 무비한 행적을 보고하는 가운데 지루하지 않게 건네온다. 생태주의·환경주의를 위한 쓸모 있는 입문서의 자리에 낄 만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꼭 환경 위기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굿바이, 스바루』는 그냥 통념을 거슬러 살기를 선택한 ‘쿨 가이(cool guy)’, 디지털 시대에 거듭난 히피의 유쾌한 모험기로 읽혀도 무방하다. 자잘한 사건사고의 삽화들은 가득하지만 모험가의 삶 전체를 시험하는 시련이나 도전(그리고 그것과의 맞씨름)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모험기의 밀도와 진정성을 위해서는 약점이다. 그렇다 해도 파인의 모험은 남들과 다른 삶, 획일적인 규준에서 벗어난 삶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한 우리 사회의 독자들에게 각별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도와 관습 바깥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이토록 가난해진 시절이 (적어도 우리 근현대사의 구비에) 달리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 제도와 관습에 복종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삶을 택해도 굶어 죽지 않을뿐더러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시 받고 싶은 이라면 덕 파인의 모험에 동행해볼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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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본문
“집 안에서 나 혼자 식사를 하면서 사회적 경계선을 위반하면, 염소들은 우리 집 미닫이 유리문을 점점 세게 뿔로 받으면서 들어오려고 했다. 염소들은 사실 노크도 했다. 그래도 안 되면, 긍정적으로만이 아니라 부정적으로라도 주목을 끌고 싶은 아이들처럼 장미꽃밭으로 달려가곤 했다. 특히 그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더했다. 이게 바로 염소들의 정신세계였다. 녀석들은 장미 메인 요리를 먹으면 내가 뛰쳐나와서 소리를 지르고 훈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내가 곁에 있으리라는 것도.” (85쪽)
“과학자들과 종말론 작가들이 우리가 제시하는 전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만물이 밀접히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절실하게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석유를 절감하려는 나의 노력이 개인적인 보람으로 돌아오리라 믿는다. 내가 남기는 탄소 족적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가 행하는 일들이 지구와 지역사회에 긍정적이라고 느껴진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긍정적일 테니까.”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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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손경목
문학평론을 쓰면서 몇몇 문학지와 인문사회 분야 잡지를 편집했다. 평론가로서는 오랫동안 폐업에 가까운 휴업상태에 있었으나, 최근 그간의 태만을 반성하고 글쓰기에 복귀할 뜻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