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올라와서 자취하면서 제일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바로 쓰레기 분리 배출이다. 특히 재활용 쓰레기 처리가 쉽지 않다. 수년째 사는 지금의 동네에서는 재활용 쓰레기를 한 주일에 세 번만 거둬 가는데, 매번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구분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내의 생활 쓰레기의 재활용 비율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되니, 이렇게 내놓는 쓰레기의 절반은 소각장 혹은 매립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헷갈리는 쓰레기는 일단 재활용으로 분류하지만, 그럴 때마다 과연 이 쓰레기가 제대로 재활용이 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일단 청소차가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를 거둬들여 가도 마음은 개운치 않다. 다만 “할 일을 다했다”,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헤더 로저스의 『사라진 내일』은 바로 이렇게 생각해온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책이다. 눈에 안 보이는 그 쓰레기는 사라진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좀먹고 있다.
녹색 자본주의? 녹색 쓰레기!
어렸을 적 시골에 갈 때마다 할머니와 실랑이를 하곤 했다. 마당 구석마다 도무지 쓸모가 없어 보이는 쓰레기가 널려 있는데도, 할머니는 손자의 손에 끌려서 엿을 잔뜩 들고 찾아온 엿장수를 문전박대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나아지지 않아서, 들일은커녕 거동도 불편한 지금도 할머니는 물건을 버리는 법이 없다. 이렇게 그는 평생 쓰레기를 모르고 살았다.
이 책을 보면, 지구 전체 쓰레기의 30퍼센트를 생산하는 미국인도 처음에는 할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기 전까지 미국에서 쓰레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땅에 뿌리를 박은 가난한 사람에게 쓰레기는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닦고, 고쳐 쓰다가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이랬던 그들이 변하게 된 데는 자본주의가 한몫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돈을 낳는 비밀’을 단순한 공식(M-C-M')으로 설명했다. 이 공식에서는 빠진 문자가 있다. 바로 ‘쓰레기(garbage)’의 G다. 쓰레기는 ‘자본주의의 불행한 부산물’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의 성공’을 상징한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제 꼴을 유지하려면 기업이 끊임없이 이윤을 남겨야 한다. 기업은 이를 위해서 상품을 생산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그것은 창고의 공간을 차지하는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소비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리고 소비는 곧 쓰레기다.
예를 들어볼까? 한국의 휴대전화 가입자는 이미 10년 전인 1999년 2000만 명을 넘었다. 경제 활동을 하는 거의 모든 이들이 10년 전부터 휴대전화를 들고 다녔다. 만약 그들이 거기서 휴대전화 소비를 멈췄다면, 전 세계 불황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일부 재벌 기업의 휴대전화 신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기업이 온갖 매체를 활용해서 ‘생각대로’ 하라고, ‘쇼’를 하라고 휴대전화의 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멀쩡한 휴대전화 수천만 대가 쓰레기로 돌변했다. 납, 수은, 카드뮴 등의 중금속을 포함한 이 쓰레기는 악성 중의 악성이다.
쓰레기야말로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쓰레기를 생산하는 삶의 기술을 몸에 새겨야 한다. 리 호이나키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존경을 담아서 기록한 그의 농부 아버지나, 앞에서 언급한 할머니처럼 쓰레기를 쓰레기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부적응자일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쓰레기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생산 과정을 도입하려는 일부 기업의 시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 책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듯이, 이런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추가 비용을 감수하면서 그런 시도에 동참할 기업도 적을뿐더러, 참여 기업조차도 쓰레기의 대량 배출로 이어지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대량 소비를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일부 환경운동가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수많은 옹호자가 목소리를 높여서 찬미하는 이른바 ‘녹색 자본주의’는 그 아류인 ‘녹색 성장’처럼 말이 안 된다. 자본주의 자체가 쓰레기라는 걸 인정한다면, ‘녹색 자본주의’는 곧 ‘녹색 쓰레기’의 다른 말이다. 녹색을 칠해도 쓰레기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그들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죽음
이 책은 상당 부분을 매립, 소각, 투기, 수출(!)과 같은 쓰레기 처리의 문제를 짚는데 할애한다. 실제로 오늘날 쓰레기 처리는 조폭부터 기업까지 군침을 흘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8장). 자본주의가 계속되는 한 쓰레기는 끊임없이 나올 테고, 소비자가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그 쓰레기를 감쪽같이 처리하는 일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 쓰레기 처리를 둘러싼 마술의 비밀을 살펴보자. 이 마술의 핵심은 쓰레기를 처리하는 곳과 배출하는 곳 사이의 거리다. 양측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마술이 성공할 가능성은 커진다. 집 밖에 내놓는 쓰레기가 완벽하게 처리된다는 인상을 줄수록 사람들은 쓰레기를 더 많이 생산할 것이다. 더 많은 쓰레기는 쓰레기 처리업자의 더 많은 이익으로 돌아온다.
쓰레기 처리를 외진 곳에서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쓰레기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를 도시 한복판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쓰레기를 떠안게 되는 곳에는 그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이들이 터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숫자도 적다. 조폭이나 혹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업의 입장에서 그들은 가장 손쉬운 상대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도시, 농촌의 빈민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 어느새 쓰레기의 거대한 산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가장 기막힌 운명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제3세계 도시 빈민들이다. 그들은 자국에서 생산한 쓰레기더미 속의 슬럼에서 눈을 떠, 제1세계에서 수출한 쓰레기(전자 폐기물)를 처분하는 공장으로 출근한다.
이런 마술이 영원히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조만간 불가능한 시점이 도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배, 트럭에 싣고 원거리를 이동하려면 당연히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를 태워야 한다. 만약 석유, 석탄을 다시는 지금처럼 태울 수 없는 세상이 온다면, 쓰레기의 원거리 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런 ‘석유 없는 세상’의 도래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몇몇 비관론자들이 2010년을 전후한 시점에 전 세계의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고 나서 하락하리라고 경고해온 사실은 잘 알려졌다. 최근에는 국제에너지기구(International Energy Agency·IEA)도 이런 비관론에 힘을 실어주고 나섰다. IEA에서 석유 수요, 공급 전망 분석을 주도해온 패티 바이럴(Faith Birol)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 바이럴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석유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IEA가 800곳이 넘는 유전을 조사한 결과, 세계 주요 유전의 생산량 감소 속도가 2년 전과 비교했을 때 두 배 가까이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석유가 우리를 버리기 전에 우리가 석유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설사 상당수 낙관론자의 주장처럼 석유 고갈 사태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현재 일상생활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것은 자동차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자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그것을 아무리 건설한들 자동차, 비행기가 태우는 석유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 나오는 온실가스가 지구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당연히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쓰레기를 이동시키고자 석유를 태워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폭등하는 운반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쓰레기 처리업자도 쓰레기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진실을 직시할 때
이 책이 보여주는 쓰레기를 둘러싼 섬뜩한 진실에도, 세상이 달라질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일부 눈 밝은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이 지금도 자본주의가 설치해둔 소비의 덫에 걸려서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끼를 탐닉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석유 고갈, 기후 변화 사태와 같은 외부 충격이 올 때까지 말이다.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두면 한국의 대중매체, 특히 방송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게 답답하다. 그나마 방송처럼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는 대중매체가 이 책의 내용과 같은 진실을 알려야, 한 사람이라도 각성하는 이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방송의 모습은 이런 역할과 거리가 한참 멀다.
기왕 방송을 언급한 김에 논의가 덜 된 문제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자. 이 책을 한참 읽고 있을 때, 한 방송사의 수리부엉이 다큐멘터리 조작 사실이 드러났다. 이 다큐멘터리를 찍은 이들은 수리부엉이가 발이 묶인 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을 연출해 놓고서, 마치 수리부엉이의 진짜 사냥 장면을 찍은 것처럼 방송을 내보냈다.
이 사건을 놓고서 많은 이들이 제작비가 적고, 제작 기간이 짧다는 둥 국내 자연 다큐멘터리의 열악한 제작 현실을 언급했다. 이런 시각에는 자연 다큐멘터리는 ‘잘 만들기만 하면’ 좋은 것이라는 전제가 깔렸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는 일은 마치 환경운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수리부엉이가 야생 토끼를 날쌔게 잡는 모습을 지켜본 시민이 “아, 수리부엉이를 보존해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까? (오히려 토끼가 불쌍하더라, 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고생하는 북극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그래 봤자, 바로 그들이 대자연의 경이를 보고자 여름휴가 때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비행기를 탈 텐데.
오히려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바로 이 책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 속의 불편한 진실이다. 이번에 새로 장만한 수브(SUV)가 얼마나 많은 석유를 낭비하면서 온실가스를 내뿜는지, 공짜로 준다기에 덥석 집어든 휴대전화 탓에 쓰레기 신세가 된 옛 휴대전화가 얼마나 많은 유해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지 등등.
이런 다큐멘터리야말로 특히 공영방송 정체성을 내세우는 방송사라면 적극적으로 제작해야 할 것이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수리부엉이, 북극곰의 영상을 남기는 데 그칠 가능성이 크지만,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핵심을 겨냥한 다큐멘터리는 수리부엉이, 북극곰과 함께 살아갈 미래를 보장할 테니까. (물론 방송사가 기대하는 판매 수익은 보잘 것 없을 것이다.)
뜬금없이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얘기를 길게 한 것은 이 책이 바로 헤더 로저스가 2002년 만든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내용을 토대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로저스는 오늘날 언론인이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또 이 책으로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한다.
솔직히 말하면, 환경 담당 기자인 나 역시 앞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매번 쓰레기를 집 앞에 내놓으면서 정작 이 쓰레기로 집약되는 이 사회의 온갖 모순을 드러내 보려는 시도는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녹색평론> 측에서 이 책의 서평을 맡긴 것에는 이런 질책의 의미도 있으리라. 책을 덮으면서 당장 국내의 쓰레기 처리의 실상부터 조사하리라,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정보 한 가지 더. 책을 읽기 전에 로저스의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았다. 그는 영상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아주 짧은(19분!) 시간에 우리가 살아가는 ‘쓰레기 세상’의 문제점을 고발했다. 사실 책은 다큐멘터리 영화만큼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영상이 주는 그런 강한 충격이야말로 책이 따라잡지 못하는 방송의 힘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이라면 ‘구글(www.google.com)’ 등에서 ‘Gone Tomorrow’ 등의 검색어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서 감상하길 권한다. 특히 열악한 제작비 때문에 굳이 연출까지 해가면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하는 방송사의 PD들은 꼭 한 번 보길. 좋은 다큐멘터리는 제작비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
(『녹색평론』 2009년 9-10월호, 통권 108호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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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강양구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기자. 1997년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현 시민과학센터)이 결성될 때 참여했다. 2003년부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과학ㆍ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부안 사태,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대한 기사를 썼으며, 특히 황우석 사태의 파국을 1년 전에 예견하여 화제가 된 「과학기술의 덫에 걸린 언론」등의 글을 써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과학기술과 언론, 과학기술과 환경 등 주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한국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널리 알리는 데 관심이 많다. 저서로 『침묵과 열광』,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