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더럽고 타락한 것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닥에 더러운 게 있으면 반드시 거름쇠스랑(muckrake)으로 긁어내야 합니다. 이런 작업이 가장 필요한 때와 장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외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쇠스랑으로 더러운 것을 긁어냈다는 자신의 공적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사람은 사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삽시간에 가장 강력한 악의 세력이 됩니다.”
먹레이킹(muckraking), 추문을 들추고 고발하다
위 인용은 1906년 4월 15일,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일명 「거름쇠스랑을 든 남자」로 불리는 연설 중의 한 대목이다. 연설 초반부에 루스벨트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거름쇠스랑을 손에 든 남자’를 소개한다. 이 남자는 천상의 왕관도 마다하고 오로지 아래만 보면서 쇠스랑으로 바닥의 오물을 긁어모으는 사람이다.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사회의 타락상을 폭로했던 언론 및 여타 고발 문학을 고결한 것은 볼 생각도 않고 더러운 것에만 집착하는 쇠스랑 든 남자에 비유함으로써 고발문학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후 미국 사회에서 먹레이커(muckraker)라는 어휘는 ‘추문을 들추고 고발하는’ 일단의 글쓰기 및 그 작가를 지칭하게 된다.
연설 한 달 전인 3월, 루스벨트는 미국 정육업계의 타락상을 고발한 소설 『정글』의 작가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에게 손수 편지를 써서 백악관에서 만나자고 제안한다. 『정글』이 출판된 것은 같은 해 2월이었는데,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루스벨트 정부는 여론의 엄청난 뭇매를 맞는다. 루스벨트는 싱클레어가 폭로한 정육업계의 현실이 사실인지 직접 작가를 만나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정글』이 폭로한 소 도살장의 불결한 도축 및 가공 환경은 미국내 쇠고기 수요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수출도 급감시켰는데 이런 정황으로 미뤄볼 때 루스벨트는 연설에서 『정글』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루스벨트의 심경이야 어쨌든 미국에서는 소설 『정글』이 일으킨 파장 덕분에 그해 6월 식품의약품위생법이 제정됐고 식품의약국(FDA)가 설립됐다. 펜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가슴을 겨냥했는데 배를 맞히고 말았다
이처럼 사회적 반향이 컸던 먹레이커 『정글』의 번역서가 한국에서 재출간 됐다. 책 말미에 수록된 「재출간에 덧붙이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은 1979년 채광석의 번역으로 처음 출판됐다가 1991년 완역 출판됐고 2009년 6월에 다시 출판됐다. 최근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였던 광우병 사태를 생각해볼 때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시의적절한 재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겨냥했는데 어쩌다가 배를 맞히고 말았다”는 싱클레어의 회한 섞인 고백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가슴을 겨냥했는데 배를 명중시켰다니, 무슨 말인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싶었는데 독자들은 외려 소고기 가공의 비위생적인 환경에만, 그리고 자기들 뱃속의 안전에만 관심을 갖고 열을 올렸다는 소리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말하고자 했던 부분을 독자에게 외면당한 싱클레어의 착잡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싱클레어가 정작 폭로하고자 했던 것은 불결한 정육 및 가공 환경이 아니었다. 그가 들추어내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작업 환경 때문에 더욱더 착취당하는 임금 노동자의 현실이었다. 자본주의라는 정글에서 인간으로서 사는 게 아니라 짐승처럼 생존해야 하는 노동자의 기막힌 현실에 대한 작가적 고발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를, 그래서 사람을 짐승처럼 부리는 야만적인 자본의 횡포가 천하에 알려지길 그는 바랐던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글』의 독자는 이 책을 가슴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정육 기계의 톱니바퀴
먹레이커의 계보를 잇고 있는 에릭 슐로셔는 『패스트푸드의 제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세기 전만 해도 시카고는 전 세계 정육업의 중심지였다. 비프 트러스트가 태어난 곳도, 주요 정육업체의 본사가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인데 4만 명의 사람들이 유니온 스톡야드 근처의 육류가공 지역에서 일한다. 시카고에서 냉장처리된 육류는 미국 전역뿐 아니라 유럽으로까지 선적된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 작가 업턴 싱클레어는 시카고의 패킹타운을 ‘노동력과 자본이 최대로 집결된 장소’라고 불렀다. 그는 이곳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오명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대한 성공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정글』은 정육업의 메카인 시카고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유르기스와 그 가족의 비극적인 삶의 궤적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건너온 건장한 청년 유르기스가 ‘트러스트’로 묶인 거대 자본에 의해 철저히 착취당하고 폐기처분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싱클레어는 과도한 작업량, 열악한 작업 환경, 아동 노동, 만연한 정경 유착, 노조 탄압 등 탐욕스런 자본의 횡포를 낱낱이 고발한다. 특히 엄청난 생활고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는 가정과, 파업 때 파업파괴자를 대체 인력으로 고용하는 기업의 비열한 작태는 최근 한국에서의 어떤 자동차 공장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노동자를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는 ‘위대한 자본주의’의 현실은 한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피가수스의 꿈
『정글』은 미국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필독서 목록에 단골로 오를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출판 당시의 사회적 파장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데 『정글』이 지금까지도 벗지 못한 오명이 하나 있다. 먹레이커로선 훌륭하지만 문학 작품으로선 격이 떨어진다는 오명이 그것이다. 특히 유르기스가 사회주의 활동가로 변모하게 되는 작품 후반부는 매우 인위적이고, 작품의 전체 구성상 불필요한 사족에 가깝다는 비판이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정글』의 한국어판 초판 번역에서도 그 후반부가 생략되었지만 이번 번역에는 포함되어 있다). 사실 사회주의자들의 연설과 대화로 이루어진 후반부를 읽노라면 마치 『공산당 선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부분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어 했던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하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부분을 넣은 것이 꼭 적절한 선택이었는가 하는 의구심도 들만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싱클레어가 꿈꾸었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구경하다보면 독자도 한 번쯤은 자본주의 아닌 다른 세계의 대안적 가능성을 꿈꾸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먹레이커는 작가 존 스타인벡의 서명용 인장에 새겨져 있었다는 피가수스(Pigasus)†를 닮은 것도 같다. 땅에 붙어 살아야 하지만 하늘을 동경한 나머지 뒤룩뒤룩 걸으면서도 잘 펴지지 않는 날개로 애써 날고자 하는 날개 달린 돼지가 피가수스다. 거름쇠스랑을 들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오물을 긁는 먹레이커의 가슴에도 돼지의 날개 같은 희망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나온 한국어판 번역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서와 번역본을 놓고 1장을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비교해 보았는데, 자잘한 오역이 여러 개 발견되었으나 문제는 오역이 아니라 자의적인 첨삭(添削)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역자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 그냥 덮어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는 역자의 문제를 떠나 출판 관행의 문제라는 판단에서 여기 일단 지적하고 넘어간다. 성실한 번역과 편집은 출판의 미덕이 아니라 의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
† 피가수스(Pigasu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Pegasus)의 이름에서 모음 하나를 바꿔 말[馬]을 돼지(pig)로 변신시킨 기발하고 재치 있는 이름이다.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쳐 죽였을 때 메두사가 흘린 피에서 탄생했다는 날개 달린 말인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씨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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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본문
유르기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패킹타운에 왔을 때 돼지를 도살하는 것을 꾹 참고 보았던 일, 그 일이 정말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던 일, 자신이 돼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안도하던 일 등을 회상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새 친구는 돼지란 다름 아닌 유르기스 자신이었다는 것, 그가 통조림 공장주들의 돼지들 중 한 마리였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돼지로부터 모든 이익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저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또한 대중들로부터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에게 돼지가 고통 받는다는 것, 그리고 돼지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돼지에 불과하며, 자기들은 고기의 구매자 그 이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패킹타운에서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도살 작업은 더욱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통조림 공장주들의 계산 방식으로는 백 명의 인간 생명이 1펜스의 이익만큼의 값어치도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유르기스가 사회주의 책자들을 접하게 되면, 그는 늘 그랬듯이 매우 신속하게 쇠고기 트러스트를 모든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모든 곳에서 똑같은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쇠고기 트러스트는 맹목적이고 비정한 탐욕의 화신이었다. 그것은 수천 개의 발굽으로 노동자를 짓밟으면서 수천 개의 입으로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괴물이었다. 그것은 거인 백정이었다. 그것은 살이 뒤룩뒤룩 찐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경제라는 바다 위에서 항해하는 해적선이었다. 그 해적선은 검은 깃발을 높이 올리고 문명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약탈과 부패가 그것의 일상적인 행위였다. 시카고의 시 정부는 해적선의 지부 사무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해적선은 도시의 수십억 갤런이나 되는 물을 공개적으로 약탈했으며, 무질서한 파업 참가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도록 재판관에게 지시했으며, 시장에게는 해적선에 불리한 건축법을 적용하지 말도록 요구했다. 국가의 수도에서 해적선은 통조림 생산 현장에 대한 조사를 금지시키거나 정부의 보고서를 왜곡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현장 조사 보고서가 공개될 수밖에 없었을 때 해적선은 그 보고서를 불태웠고, 범죄 대리인들을 국외로 내보냈다. 해적선은 경제계에서 자거노트 차(인도 신화에 나오는 크리슈나 신상인 자거노트를 실은 차. 이 차에 치어 죽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타인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상징함 옮긴이)였다. 그것은 매년 수천 개의 기업을 쓸어 버렸고 사람들을 미치게 하거나 자살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가축의 값을 강제로 낮추어 모든 주州의 생활 기반인 축산업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육류의 취급을 거부한 수천 명의 푸줏간 주인들을 파멸시켰다. 그것은 이 나라를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여 그 모든 지역에서 고기값을 묶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냉동차를 독점했고 모든 닭과 계란, 과일과 채소에 막대한 세금을 붙여 놓았다.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수백만 달러의 돈을 가지고 철도와 전차의 부설권, 가스와 전등의 판매권 등 다른 이권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이 나라의 가축 산업과 곡물 산업을 소유했다. 민중은 그것의 침략에 크게 동요했지만 누구도 그 방어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대중을 가르치고 조직하여 쇠고기 트러스트라는 거대한 기구를 장악하게 될 때를 준비시키고, 그 기구를 일단의 해적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쌓아올리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식량을 생산하는 데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르기스가 오스트린스키의 부엌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을 때는 한밤중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러나 그는 패킹타운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가축 수용장 조합을 장악하는 즐겁고 영광스런 미래를 생각하느라 한 시간이 넘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다. (29장 절망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519~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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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우달임
영문학 박사 과정을 잠시 중단하고 번역에 몰두했다가 지금은 본격적인 서평활동과 서지 검토작업을 준비 중이다. 옮긴책으로 『아주 작은 시작이란 없다』 , 『체실 비치에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