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일본 알기’
예전에 비해 다소 주춤해진 느낌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본 알기’ 혹은 ‘일본 배우기’ 열기가 여전하다. 경제대국 일본은 한국의 선망 대상이었다. 한국 대기업은 해외 연수라는 명목으로 간부급 사원들을 일본 회사에 파견시켜 소위 ‘일본식 경영’ 기법을 도입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각종 미디어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이 보고 배워야 할 모델을 일본에서 찾았다. 예컨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대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일본의 건축시공기법을 습득하라고 목청을 높였고, 최근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건이 일어나자 곧바로 특집방송을 편성하여 일본의 극복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풍조가 팽배해진 오늘날, 한국 사회는 광적인 미국 열풍으로 넘쳐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본(론)에 대한 지적 욕구는 가시지 않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게 어쩔 수 없는 ‘가깝고도 먼 나라’인가 보다.
‘일본 알기’는 그동안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탐구 주체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패전을 계기로 천황제 파시즘체제에서 벗어난 일본인 자신의 ‘일본 알기’이고, 또 하나는 일본에 패배를 안겨준 서구 비(非)일본인에 의한 타자로서의 그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담론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자가 주류를 형성해왔다. 관련 연구자의 숫자는 물론, 매년 출간되는 다양한 관련서적의 목록을 살펴보더라도 그 분위기를 금방 알 수 있다. 일본학자들은 군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전후 민주주의 일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와 그 변화 양상에 관한 괄목할만할 연구업적을 쏟아냈다. 연구영역 또한 백화점식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두루 언급되었다.
‘일본 뒤집어 읽기’
연구사적으로 바라보면 에드윈 라이샤워로 대표되는 서구학자들의 입김이 거셌다. 이른바 ‘국화회’라 불리는 이 그룹의 ‘일본 알기’는 일본을 미국에 안정적으로 포섭시키기 위해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조작 유포했다. 일본의 총체적 전통, 즉 권위와 명령에 대한 순종, 공통된 목적에의 인식, 회사에 충성하는 습관 등에서 일본 기적의 비밀을 찾고, 기업전사 또는 서류가방을 든 사무라이 등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출발점인 메이지유신은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이들에게 일본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즉 이들의 ‘일본 알기’는 냉전시대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논조에 대해 과감하게 재해석하겠다는 도전장이 던져졌다. 패트릭 스미스가 지은 ‘현대 일본이 부끄러워하는 진짜 일본’이라는 부제를 단 『일본의 재구성』(Japan: A Reinterpretation)이 그것이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기존의 ‘일본 읽기’를 재구성하겠다는 말하자면 ‘일본 뒤집어 읽기’이다. 저자 패트릭 스미스는 미국 언론사 특파원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했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 도쿄에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지국장으로 근무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일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일본의 실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파헤친 이 책은, 1998년에 처음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10년이 지난 2008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근대화와 근대성
이 책에서 개진되는 논의의 초점은 근대화와 근대성의 상관관계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일본은 기술발전과 공업화 등 물질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근대화(modernization)를 이룩했지만, 심리와 의식의 측면으로서 개인이 자유롭게 자주성을 견지할 능력을 의미하는 근대성(being modern)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앞섰으나 근대성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시도할 당시의 궁극적 목적은 전통적인 ‘일본 정신’을 보존하기 위함이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성이 왜곡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기존의 논의를 답습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국화회’ 학자들이 일본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고 지적 궤변으로 미국 전체를 오도한 사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미국에 의해 왜곡된 일본상의 교정이라는 점에서 참신한 문제제기로 여겨진다.
책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굴이라기보다 기존의 광범한 논의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근대화와 근대성의 상관관계는 책 전체를 통해 투영되고 있다. 일본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교육, 직장, 도시와 농촌, 문화와 민족정체성, 성차별, 과거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분야에 걸쳐 날카로운 투시력을 보여준다.
저자는 일본이 자기 스스로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일본이 처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진단한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만들어진 과거, 의도적으로 망각한 역사 속에서 각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정립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역작 『국화와 칼』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다양한 문학작품, 미술, 연극, 음악, 만화 등 문화적 분석 도구와 언론인 특유의 신속함을 활용한 인터뷰를 곁들여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 아이누족, 1904년 >
일본 속의 타자
저자는 일본의 문제는 단지 일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사는 모든 구성원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일본 내의 타자인 피차별 부락민,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재일한국⋅조선인,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 주목한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수의 타자로서 차별받는 삶을 생생하게 전하는 동시에 그 역사적인 배경을 파헤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일본의 외국인 기피증과 차별이 보여주는 위선과 부당함을 비판하지만, 이것을 결코 변치 않는 일본의 국민성 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하려고 힘쓰는 사람들의 노력에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모습을 발견한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왜곡된 모습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강조한다.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 그리고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 등이 미국의 부당한 간섭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이것은 소위 ‘역코스’로 인해 일본 민주주의의 발전이 왜곡되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평화헌법은 미국이 만들어준 것이므로 일본이 국제사회의 실질적인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신헌법을 제정하여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은 한국인으로서 결코 용납하기 어렵다. 자주독립국이 자신들의 국가정체성을 스스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동아시아 민중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다시 군국주의로 회귀할 위험이 농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평화헌법은 개정의 대상이 아니라, 20세기의 전쟁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역사적 교훈으로 모두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상충하는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동아시아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지침이다.
10년의 공백 메우기
이 책은 10년 전에 집필되었고,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다. 그동안 일본 사회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일본의 총체적인 보수화의 물결이 드세다.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쳐드는 네오 내셔널리스트들의 출현에 힘입어, 일본 사회에는 군국주의 침략의 기류가 다시 흐르고 있다. 이 책의 집필 이후에도 안보체제=대미 군사 종속의 확대를 의미하는 가이드라인 관련법을 비롯해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를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법안도 통과되었다. 필자도 강조하듯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대미 군사 종속과 결부되어 존속되어 왔던 전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이 두 개의 법안이 거의 동시에 통과되었다는 사실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에 주는 여파는 아주 크다. 더구나 평화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소리를 여야 모두가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더욱 우려스럽다. 미국인이 바라보는 시각과 한국인이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점은 엄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본 국민 모두가 이 극우 세력에 한목소리로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국내의 소장 학자들, 수많은 시민단체들은 얼룩진 과거사라 할지라도 올바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기비판을 통하여 자기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소리를 높여 가고 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게 이러한 일본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쟁과 전후에 대한 반성과 책임에 대해 아시아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때임을 절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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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본문
2차 대전 후에 창작된 일본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워싱턴이 도쿄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반영하며, 제국주의 권력이 종속적 식민지를 다루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모든 것이 공산주의 견제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 1948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전(戰前) 일본의 재벌 세력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엘리트 세력들이 다시금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일본적 이데올로기는 각종 재료가 풍부히 뒤섞인 혼합물이었다. 전통의 조작은 비단 일본 엘리트들만의 작업은 아니었다. (23쪽)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굉장한 속도로, 적어도 경제 분야만큼은 근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이 선택한 행로가 일본인에게 커다란 희생을 가져왔다. 정치적 자유는 없었고 노동력 착취가 만연했다. 봉건적 관습은 민주주의 발전과 근대사회 체제 마련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지도층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위해 외국인혐오증과 군국주의를 조장했다. 무엇보다도, 이 근대화시기에 야기된 수많은 갈등과 충돌을 억누르려는 국가의 조치가 지극히 폭력적이었다. 일본이 겉으로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미국이 관심을 가지기 이전까지는 근대화 시기의 갈등과 충돌은 역사적 사실로서 누구나 다 아는 상식에 속한다. 일본의 갈등과 충돌의 역사는, 일본의 근대화라는 복잡하고 불안한 행보를 이해하는 데 전념했던 학자들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충실하게 확립되었다. (43쪽)
‘집단’은 일본에서 일종의 허상이다. 집단 속에서 일본인은 가면을 쓴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어떤 역할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단체(집단)에서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역할 말이다. 일본인의 가면은 남하고 똑같은 척하는 가면이다. 이 가면을 씀으로써 집단 구성원 간에 차이가 없어지고, 차이가 없다는 것은 곧 ‘일본인되기’의 한 부분이다. (79쪽)
미국의 대담한 기만을 설령 용서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국민이 겪은 고민과 혼란은 간과하기 어렵다. 덴노의 죄를 덮어버림으로써 점령군은 단숨에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를 조장했고 이런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갑자기 역사는 부인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대중은 지배자의 허울 좋은 기만에 대항하여 투쟁을 되풀이해야 했다. 승전자의 처분 때문에 한 나라의 전면 개조 계획이 뻔한 사기로 시작되고 말았다. ‘무책임’이라는 사조가 정치·교육·외교 등 각 분야에 파고들었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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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규수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 근대 일본 및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 인식을 규명하기 위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지은 책으로는 『근대 조선의 식민지 지주제와 농민운동』(일본어판),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곡의 역사』,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 『근대전환기 동아시아 속의 한국』(공저),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공저) 등이, 옮긴 책으로는 『서양과 조선』, 『기억과 망각』, 『동아시아 근현대사』(공역),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공역),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