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간은 꽤 쏟아져 나왔다. 사회 과학이나 정치 분야를 포함해서 거기에 필적했던 주제는 미국 패권주의와 연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2007년 12월을 생각하면, 출판 편집자들의 노고도 헛되이, 그것들은 독자들의 손에 닿지 않았거나, 그들의 가슴을 울리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너무 이론적이고 학술적이었던 탓일까? 오히려 한국인 대다수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나『세계는 평평하다』 따위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말랑말랑한 장밋빛 교설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2007)는 무척 분발했다. 독자들 가운데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읽었고, 그만큼 재판을 거듭했다. 책의 구성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화로 엮어져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소구층을 일찌감치 청소년층으로 규정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 책에는 젊은 독자층의 마음을 흔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 책은 간단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기술과 생산력의 발달은 유전자 변형 식품 없이도 12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정도로 발달했지만(현재 인구는 65억 정도), 어째서 8억 이상의 남반구(제3세계) 인구가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는 것일까?’ 저자는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아프리카·남아시아·남아메리카를 샅샅이 누비고 다닌 자신의 경험을 털어 놓는다. 이론서도 아니고 그렇다고해서 허구도 아닌 이런 책을 ‘논픽션’이라고 한다.
지글러의 책을 읽다보면 2005~2006년 사이에 베스트셀러였던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푸른숲,2005)가 묘하게 중첩된다. 그 책은 이미 여행작가로 익히 알려진 저자가 국제 구호기관에 자원한 뒤, 아프카니스탄·말라위·잠비아·시에라리온·라이베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벌였던 구호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지글러와 한비야의 이런 공통점은, 청소년뿐 아니라 규범화된 모든 한국인들에게 ‘선한’ 로망(꿈)을 선사한다. 눈을 밖으로 돌리라는 것! 다시말해 삼성 사원이나, 공무원이 최고가 아니라는 얘기. 이거야말로 입시에 찌들고, 실업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복음과 같은 로망이다.
두 책이 뿜어내는 ‘선한’ 로망은 단순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은 기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또 한 사람은 전쟁이나 갑작스러운 자연 재해 지역에 필요한 구호를 위해 지구촌을 동분서주했지만,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동일하다. 즉, 나만을 위해 아득바득 사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람, 그것도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느끼라는 것, 손 내 밀라는 것! 장 지글러는>『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한국어판 서문과 에필로그에 연대의 가치와 역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기아로 인한 떼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서문)
"하지만 과연 동료 인간의 고통을 공감하고 급진적인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현실적일까? 그것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역사는 그런 질적인 도약을 알고 있다. 국가의 성립도 그에 대한 한 예다. 먼 과거에 인간들은 가족, 씨족, 그리고 한 마을 사람들끼리만 연대감을 느끼고 동일시하였다. 연대감은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친한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국가가 성립되면 인간은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평생 알 일이 없을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 공동체 의식, 공공시설, 그리고 모두에게 구속력을 발휘하는 법이 탄생하였다."(에필로그)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무한경쟁이 당연시 된 사회에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가 널리 읽히는 것은 실낱같은 희망이 된다. 그런 중에『탐욕의 시대』 (갈라파고스, 2008)가 나왔다. 피상적으로 보면 전작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책은 전작보다 더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다시 후술되겠지만 저자의 분노 혹은 연대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글러는 두 책을 통해 ‘기술과 생산력은 발전했지만, 생존이 위태로울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어째서 줄지 않고 늘어나는가?’라고 물은 뒤, ‘탐욕스러운 누군가가 권력과 금지를 통해 자본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즉 기술과 생산력이 낮았던 고대나 중세에는 ‘입을 덜기 위해’ 유아 살해가 제도화 될 만큼 빈곤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나, 오늘날의 결핍은 재화의 독점과 분배를 틀어쥔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화한 금융자본 세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다. 이들은 옥수수든 밀이든 커피든 또는 의약품이든 ‘희귀재’를 만들고 ‘희귀성’을 조작해아만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 된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재화가 지니는 값어치는 그 재화의 희귀 정도에 다라 결정된다. 재화가 희귀할수록 값은 올라간다는 말이다. 풍요와 무료라는 두 가지 개념은 이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한다. 오직 희귀성만이 이익을 보장한다. 그러니 희귀성을 만들자!"
오로지 탐욕으로 무장된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은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했거나 경제적 자립도가 약한 저개발 국가를 먹잇감으로 삼는다. “현대판 봉건 독재자들”이라고 불리우는 두 세력은 다종다양한 방법으로 제3세계를 좀먹는다. 흔한 방법은 부패하거나 독재적인 신생 정권에 아무런 관리나 감사 없이 막대한 차관을 빌려 주는 것이다. 산업이 기반이 없어 외자말고는 돈을 만져볼 여력이 없는 대부분의 신생 국가 독재자들은 그 돈을 덥석 받아 개인 금고에 착복하고, 나머지는 국가(정권) 안보에 허비한다.
불가사의하게도 돈을 빌려준 제1세계의 다국적 기업이나 그들과 똑같은 이해관계에 있는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같은 기구들은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한 불신용 정권에 더 많은 차관을 빌려주고, 대신 노른자위와 같은 개발권이나 공공서비스를 앗아간다. 뿐 아니라, 이때부터는 다국적 기업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현지의 산업 구조를 조정한다. 그렇게 되면 현지인들은 농지에 자신이 먹을 것을 경작하는 게 아니라, 유럽의 소들을 먹일 콩과 미국의 자동차 연료로 쓰일 사탕수수를 재배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수출국인 브라질이 자국의 기아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다.
"브라질 북부의 판자촌에 사는 주부들은 저녁이면 냄비에 돌을 넣고 물을 끓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어머니들은 배가 고파서 보채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밥이 될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브라질을 포함한 남미의 온두라스·과테말라, 아시아의 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 아프리카의 수단·가봉·나이지리아·모로코·카메룬·르완다는 부패한 정권과 다국적 기업·금융자본의 야합에 의해 자국의 국민이 부채와 기아라는 악순환에 빠져든 대표적 경우다. 칠레의 아옌데와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는 “현대판 봉건 독재자들”인 다국적기업의 요구를 거스르려 했기 때문에 청부를 받은 쿠데타를 빙자한 용병들에게 살해됐다.
보았다시피, 부패한 정권과 취약한 국가 경제는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최적의 온상이다. 문제는 정권이 부패하지 않고 국민이 나태하지 않더라도, 원산지의 주력 수출품(주로 농산물)에 대한 가격 폭락이나 금융 공격을 통해 얼마든지 제3세계와 중진국을 거지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이들이 가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반구의 대부분 국가는 부채를 지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부시와 네오콘 세력이 계획한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다국적 석유회사와 거대 군수산업이 벌인 합작품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지만, “신흥 봉건제후”들이 획책하는 포성이 들리지 않는 은밀한 수탈과 책략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경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신흥 봉건제후”들은 옛날의 봉건제후들 처럼 법을 어기거나 무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언론과 여론의 위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코미디 같지만, 2000년대 초반에 이런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파키스탄의 언론에서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벌어졌다. 네슬레 측에서는 이 캠페인이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예방 캠페인’에서는 카라치나 물탄·라호르·이슬라마바드·라왈핀디 등의 공공 상수도 시설을 통해서 공급되는 물이 비위생적이고 건강을 위협하므로 이를 저지하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물은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기준에 합당한 물이었다."
다국적 기업에 매수된 언론이 벌여준 ‘예방 캠페인’ 소동이 있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계적인 식수 공급망과 생수 사업의 강자인 네슬레는 파키스탄에서 낱개 병으로 포장된 생수를 판매했고 거기서 챙긴 이익은 천문학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볼리비아의 경우, 세계은행의 압력으로 공공 상수도 망을 민간 기업에 판 직후 물 값이 2배로 뛰었다. 수도 사업권을 민간 기업에 이양되면, 사람들은 허가 없이 마을에 공동우물을 팔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허가증을 사지 않고서는 자기 땅에서 빗물을 받아 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니, 모두 다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다.
하지만 이 탐욕의 세력은 자연이 선사한 무상성이라면 무조건 질색이다. 자연의 무상성을 일종의 불공정 경쟁으로 여기는 이들은 공기·물·빛 등이 얼마든지 무료로 생산된다는 게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들에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공재산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이 베푸는 무료를 끔찍하게 혐오한다. 이 문제는 자연스레 아래의 주제로 연결된다.
"신흥 봉건제후"들은 서로간의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의 주요 실험실과 연구실을 운영한다. “인류 공동의 자산이 되어야 할 생산이나 학문적 발견을 사유화 또는 독점하는 방식이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세계적인 생명공학기업 인 몬산토의 유전자 변형 종자 사업이 실감케 해준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2006년에 내놓은 보고서는 현재의 생산력으로 볼 때 세계 농업은 유전자 변형 식품 없이도 120억 명 까지는 ‘별문제 없이’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으나, 이들은 유전자 변형 품종만이 기아를 퇴치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방편이라면서 제3세계에 자신이 개발한 유전자 변형 품종을 강요한다.(미국의 농무부 장관 앤 베네만은 몬산토사가 부르키파소의 수도 와가구드에서 개최한 대규모의 생물공학 학회에서 아프리카 정상들과 관리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녹색 혁명에 실패했고, 산업혁명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유전자 혁명에서만큼은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기가 막힌 개회사를 낭독했다).
유전자 변형 품종의 안전성은 차지하고서라도, 문제는 원래 농부는 자신의 밭에서 얻은 낟알을 다시 심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길 수 없건만, 법원은 몬산토의 유전자 변형 품종을 쓸 때마다 특허권료를 내야 한다는 판결을 냈다. 다시말해 유전자 변형된 종자를 사용하는 농부가 지난해의 수확에서 다음 해의 수확을 위해 일정 비율의 종자를 남긴다면, 농부는 이 종자의 특허권을 가진 거대 다국적 기업에 일종의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농부가 유전자 변형된 종자를 사용하되 그 종자가 번식 불가능한 종자(‘터미네이터’ 특허)라면, 농부는 해마다 기업으로부터 새로운 종자를 사들여야 한다. 이들은 진짜로 자연의 무상성을 증오하는 것이다.
부패한 정권, 매수된 언론, 사유화된 기술 연구와 함께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이 자신의 힘을 수호하고 관철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은 “국적을 초월한 모든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오른팔”이라는 미국이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지원군에 힘입어 국제법과 유엔을 무력화 시킨다. 9년 동안 유엔 인권위원회 산하 식량특별조사관 업무를 수행했던 저자의 체험과 관찰이 녹록치 않게 드러나는 이 대목은 유엔의 현재 위상을 잘 보여준다. “2007년 6월, 유엔은 62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앞으로 그리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그의 말처럼, 부시2세의 재임 기간 동안 유엔은 미국을 위해서만 숨을 쉬는 ‘식물 기구’나 같았다.
“우리는 이 세계가 다시금 봉건화되어가는 참상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새로 등장한 봉건적 권력으로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가들을 지목하면서, 이 “신흥 봉건제후”들은 과거의 봉건제후들보다 “한결 야만적이고 교활”하다고 말한다. 까닭은 이들이 무력적인 ‘하드 파워’보다는 제조업·은행업·서비스업과 같은 민간 기업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언론이나 유엔 또는 경제적 진보(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라!)같은 가면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사이에 나온 두 책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략이나 목표가 다르다. 전작의 에필로그에서 지글러는 “멜서스적인 선입견을 없”애는 데 기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명기해 놓았다. 1798년에 발표된 인구 법칙에 관한 한 논문에서 멜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산아제한을 해야하고,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야 한다’, 또 ‘질병과 배고픔은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인구를 줄여주는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인들은 자연도태설에 다름 아닌 멜서스의 신화로부터 기아로 죽어가는 끔찍한 제3세계의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위안을 구했다.
지글러는 서구인이 신봉하는 멜서스 신화를 깨트리기 위해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적인 능력과 연대를 촉구하는 전작을 썼던 것이다(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담식 구성은 청소년에게 읽힐 의도도 있지만, 우선은 ‘연대의 형식’이다). 반면 이번 책에서는 전작 보다 더 비관적으로 보이는 통계들과 적나라한 사례들을 보여줌과 함께 착취의 구조를 좀더 세세히 들여다 본다. 그러면서 세계의 부를 과점하고 있는 “신흥 봉건제후”들이 남반구만 갈취하는 게 아니라 북반구도 똑같이 피폐시키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번 책에서 역시 “나는 타인이며 동시에 타인은 나다. 타인에게 가하는 비인간적인 행동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는 호소가 모자라지 않지만, 이 책의 기조는 남반구 민중과 서반구 민중들의 연대와 투쟁에 방점이 찍혀있다. “국가가 지니는 규범적인 권력을 정면에서 공격하며, 민중의 주권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전복하며, 자연을 훼손하고, 인간과 인간의 자유를 유린”하는 “신흥 봉건제후”들의 “구조적 폭력”과 싸우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미 앞선 책에서 프랑스 혁명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거기서 “민중과 그 적들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칼뿐이다”는 생쥐스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우리 역시 바로 이런 상황에 있다”고 썼다. 선언적인 언급에 불과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작정하고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주역들의 주장에 밀착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의 주요 동기와 목표는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으며, ‘누구나 행복할 권리’란 최소한 기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은 그런 후에야 존엄하게 된다. 하지만 대혁명의 정신은 ‘정치적 평등, 언론·사상·집회의 자유, 사적 재산 절대 불가침’이란 부르주아들의 전리물로 왜곡되면서,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추구되지 못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문명화된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국의 헌법에 굶주리지 않고 적절한 교육과 치료를 받음으로써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행복 추구권’이 명시 되어 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 헌법 2장 제10조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분명히 적어 놓고 있다. 하지만, 헌법이 시민들에게 권리로 보장한 ‘행복 추구권’은 한번도 ‘사적 재산 절대 불가침, 언론·사상·집회의 자유, 정치적 평등’이란 부르주아적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된 적이 없다. ‘사적 재산 절대 불가침’을 문명 세계의 신주처럼 여기면서, ‘자유로운 인간도 굶어 죽을 수 있다’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망각한 세계에서는, 아사자가 사라질 리 없다.
오늘의 상황이 프랑스 혁명 때와 동일시 되는 것은, 현대의 다국적기업과 금융자본가들이 프랑스 혁명 당시에 곡물을 독점하고 이득을 불렸던 바로 그 투기업자들의 귀환에 비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다시 혁명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독려하며(“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이 책이 평등보다 사유 재산이 더 높은 항목에 놓여 있는 현재의 질서를 뿌리 뽑는데 필요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
사족: 1776년에 공표된 미국의 인권선언과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 그리고 1948년에 발표된 유엔의 인권선언은 모두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언론의 자유, 집회와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에 집중되어 있다. 유엔 인권선언의 경우에도 몇몇 사회 경제적 권리(모성 보호, 먹을 권리, 실업이나 배우자 사망·노화·신체장애 등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주거의 권리, 의료 수혜 권리, 어린이 보호 등)가 25항에 잠시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체제는 “한편으로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문화적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했을까?
"공산주의체제란 민주주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복수 정당제, 보통선거, 공적인 자유 행사 등을 부정한다. 공산주의체제는 인민 의지의 전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일당 체제를 고수하며, 주민들의 사회적 진보를 절대적인 우위에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경제·문화적인 권리를 시민으로서의 권리나 정치적인 권리보다 우선적으로 구체화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냉전은 서방 사회와 공산주의 진영을 귀머거리로 만들어 놓았다. “서방 사회는 공산주의 진영이 시민들의 정치적인 권리를 부인함으로써 자유로운 표현을 금지하고 민주주의의 도래를 방해한다”고 비난했고, 공산주의 진영 국가들은 “서방 세계가 이름뿐인 민주주의를 내세워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게을리 한다”고 비방했다. 이런 반쪽 대화는 소련이 해체되고 2년이 지난 1993년,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인권회의에서 해소됐다. 거기서 채택된 비엔나 인권선언은, 한편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정치적인 권리’는 다른 한편의 ‘사회·경제·문화적 권리’와 균형이 유지되어야 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
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7년 희곡 「실내극」을 발표, 1988년 단편소설 「펠리칸」을 발표하며 극작가,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 저서로 『장정일 삼국지』 전 10권, 『장정일의 공부』, 『고르비 전당포』, 『장정일의 독서일기』 1~7권, 『햄버거에 대한 명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