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의 짧은 논문으로 구성된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걸음, 2007)는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이상한 경제학’을 전도하고자 한다. 첫 번째 논문의 서두부터 저자는 자신의 경제학이 무엇을 옹호하고 공박할지를 미리 밝힌다. 저자가 보기에 “근대 경제학은 인간이 뼈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뼈만으로 되어 있다고 가정하고서 인간의 영혼을 부정한 뒤, 그 토대 위에 진보의 골격 이론”을 세운다. 거기에 반해 자신의 경제학은 리카도와 밀로 대표되는 근대 고전주의 경제학이 말살시킨 영혼?애정?도덕을 도입하고자 한다.일례로 대개의 경제학 이론이나 현실의 사례는 고용주의 이익이 고용인의 이익과 상반되거나 또는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하지만 러스킨은 “이해관계가 상반된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또는 언제나 대립하지는 않는”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집안에 빵이 한 조각밖에 없는데 어머니와 아이들이 모두 굶주려 있다면, 그들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어머니가 그 빵을 먹으면 아이들은 빵을 먹을 수 없고, 아이들이 빵을 먹으면 어머니는 배를 곯은 채 일하러 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 사이에 ‘적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빵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힘이 센 어머니가 빵을 차지해서 먹어버리는 결과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적개심을 품고 서로 바라보며, 이익을 얻기 위해 폭력이나 교활한 책략을 쓴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이상한 경제학’에서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바람직한 관계를 부모(아버지)와 자식(아들)의 관계로 본다. 온갖 사회과학적인 논리로 훈련된 오늘의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노사관계를 ‘가족’ 관계로 환유하는 저자의 주장이 순진하고 소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그런 관점은 러스킨이 속했던 중상층 부르주아들의 의식에 뿌리 깊게 내재한 계급 부정론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862년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되기 7년 전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경제학을 ‘부에 대한 과학적 학문’으로만 여기는 정통적인 경제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경제학의 골격을 세우고자 했던 저자의 고심으로 해석할 필요도 있다. 다시 말해 경제학의 법칙을 늑대(타인)와 늑대(타인) 간의 먹이다툼이 아닌, 애정이 바탕 된 ‘가족간의 비즈니스’로 새로 정의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탐욕과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용주가 고용인들을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아들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고용인이 되었을 경우 그 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해보고, 지금 고용인들을 그렇게 다루고 있는지 엄숙하게 자문해보는 것이다 (…) 그때 공장주는 부하 노동자들에게도 자기 아들을 다루듯이 대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경제학이 이 논점에 줄 수 있는 효과적이고도 진정한 그리고 실제적인 단 하나의 철학인 것이다."
노사관계는 물론이고 경제활동 전반과 경제학 자체를 이기심과 탐욕 대신 이타성과 자기희생 위에 새로 건설하고자 했던 러스킨의 여러 주장들은 앞서 밝힌 것처럼, 7년 뒤에 올 마르크스를 예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스킨이 경제학은 “모든 물건을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물건을 적당한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을 때, 그 주장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한다’는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도덕과 영성을 앞세우는 러스킨의 유심적(唯心的) 관점에서 보자면 리카도?밀의 정통적 고전주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똑같이 유물성(唯物性)에 근거한 발전주의적 경제학이다. 그러나 뒤에 살펴보겠지만, 러스킨의 ‘이상한 경제학’은 높은 생산성이나 이득이 경제활동의 최고선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책의 옮긴이도 “요컨대 경제학의 천하를 삼분하여 그 하나를 차지한 촉나라 같은 느낌을 띠는 것이 러스킨의 인도주의 경제학일 것이다”고 재치있게 쓴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부자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부자에 대한 이런 흔한 양가감정과 부자에 대한 과도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 아예 부자를 악인과 동일시하는 감정은 한국인에게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말해지곤 하지만, 러스킨의 이 책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러스킨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본가(상인)을 미워하는 까닭은 군인?법률가?목사?의사 등과는 달리 그들은 “매사에 이기적으로 행동”할거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며, 그들의 목적은 온갖 거래에서 “자기가 최대한 많이 갖고 이웃(또는 고객)에게는 되도록 조금 밖에 남겨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새삼 놀라운 점은, 부자를 존경할 수 없을뿐더러 그들을 악인과 동일시하는 모든 근거를 성경에서 얻어 온다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디모데 전서」 6:10)라거나, 재물을 섬기는 것과 신을 섬기는 것은 정반대여서 양립할 수 없다(「마태복음」6:24), 또 부유한 자는 화를 입을 것이고(「누가복음」6:24) 가난한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마태복음」5:3)는 경고가 그렇다. 비록 이 책에는 인용되지 않았지만,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누가복음 12:16의 말씀은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구절이다. 그런데도 이런 경구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새삼 놀랍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아마 이 책이 나온 1862년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출간된 1905년 사이에 커다란 에토스의 분열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건 그 나름으로 매우 흥미롭지만, 이 글의 주제를 멀리 벗어난다. 막스 베버는 그의 책에서 성경의 말씀을 빌려 부를 타기시한 러스킨과는 달리, ‘지상의 부는 내가 신의 은총을 받고 있음을 가시적이고 계량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확신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한국인들은 모두가 막스 베버가 말하는 그 기독교인들이다.
러스킨의 ‘이상한 경제학’은 “보통의 상업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부자 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을 뜻하며 “자기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상업이라고 불러온 것은 사실은 상업이 아니고 사기”였으며, 거기에 봉사해온 근대 경제학은 “암흑의 학문이요 가짜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기적이지 않은 종류의 상업”을 찾아야 한다고 권하는 그는 “진정한 상업”에서는 “자진해서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금전적 이득은 진정한 이득인 인간애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자진해서 얻을 수 있는 손해 중에 가장 고귀한 손해는, 사용 가능한 유휴(잉여) 노동력을 빌미로 노동자의 임금을 깍지 않는 것이다.
(John Ruskin : Watendlath Tarn, Cumberland, 1838)
정통적인 주류 경제학에서나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나 높은 생산성과 이득은 경제활동의 최고선이다.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이득을 산출할 수만 있다면, 어떤 생산이든 선으로 추구된다. 하지만 ‘이상한 경제학’은 어떤 생산물을 만드느냐를 묻지 않는 생산이나 자본의 증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선언한다. 사치품이나 폭탄은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으며 생명을 낳지 못한다. 어떤 경제학자도 이처럼 중요한 진실을 묻지 않는다.
"우리가 정의를 내려야 할 마지막 용어는 ‘생산물’이다. 나는 이제까지 모든 노동을 유익 한 것으로 논해 왔다 (…) 하지만 가장 양질의 노동도 목적에서는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즉, 농업처럼 건설적(constructive)일 수도 있고, 보석세공처럼 무효적일 수도 있고, 전쟁처럼 파괴적(destructive)일 수도 있다."
"자본은 생명에 유용한 어떤 물건을 공급하느냐, 생명을 보호하는 어떤 구조물을 짓느냐?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자본 자체의 증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 자본은 아예 없느니만 못하다."
위에 인용된 두 질문은 생산물?자본?노동의 가치와 유익성을 별외로 치부하는 기존의 경제학을 도리어 ‘이상한 경제학’으로 만들면서 러스킨의 ‘이상한 경제학’을 인도주의적으로 만든다. 생산물?자본?노동의 가치와 유익성을 묻지 않을 때 “인간은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자기를 파괴하느냐 또는 자기 주거지를 황폐화 시키느냐를 연구해왔고, 기아를 널리 퍼뜨리고 전염병의 씨를 부리고 칼의 위력을 발휘”하는 잘못을 계속 범하게 될 것이다.
책의 제목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마태복음」제 20장에 나오는 예수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 구절이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1데나리우스를 주기로 하고 이른 아침부터 일꾼에게 일을 맡겼다. 그런데 그 주인은 아침 아홉시와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도 계속해서 일거리를 찾고 있는 새로운 일꾼을 불러 왔다. 저녁이 되어 맨 먼저 온 사람에서부터 맨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포도밭 주인은 똑같이 1데나리우스씩을 주었다. 그러자 이른 아침부터 일을 했던 일꾼이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주인은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다’고 설득해서 보냈다.
러스킨이 이 이야기에서 제목을 발췌한 것은, 노동자는 노동할 권리가 있으며, 노동자는 공평한 보수로 생존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2007년부터 한 기독교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해고 사태는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라는 포도밭 주인의 지혜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뒤늦게 온 일꾼에게도 같은 임금을 보장해 주는 포도밭 주인의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고서도 차별을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는 불합리한 처사다. 그리고 단지 뒤늦게 태어난 죄(?)로 높은 경쟁과 열악한 노동조건, 형편없는 보수를 받게 될 ‘88만원 세대’에게도 포도밭 주인과 같은 지혜가 베풀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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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7년 희곡 「실내극」을 발표, 1988년 단편소설 「펠리칸」을 발표하며 극작가,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 저서로 『장정일 삼국지』 전 10권, 『장정일의 공부』, 『고르비 전당포』, 『장정일의 독서일기』 1~7권, 『햄버거에 대한 명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