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지성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평가되는 존 롤즈(1921-2002)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대학교에 수학하였다. 코넬대학교와 MIT에서 교수 생활을 처음 시작한 그는 1962년 하버드대학교로 옮긴 이후 이 학교에서 줄곧 가르쳤다.
대학시절 성직자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였지만, 2차 세계 대전 중 보병으로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하바드대학교 재직 중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그는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무자비하게 자행하는 미국 정부의 구조와 정책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시도하며 이를 시민들이 양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길에 대해 고민한다. 롤즈의 이러한 고민이 학문적으로 구체화된 3대 저술이 『정의론』(1971, 개정판 1999), 『정치적 자유주의』(1993), 『만민법』(1999)이다.
롤즈의 일관된 사상은 ‘공정으로서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그의 정치적 정의관으로 요약된다. 롤즈에 따르면, 정의란 민주주의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며, 만일 법이나 제도가 정의롭지 못할 경우, 설령 아무리 효율적일지라도, 개혁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민주주의 사회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공정한 조건에서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이다.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가장 적합한 도덕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인류 지성사의 기념비적 저술로 평가되는 그의 첫 번째 저술인『정의론』의 목표인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롤즈는 그 당시 지배적 학설이던 공리주의가 효율성을 증진할 수는 있을지언정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적절히 존중할 수 없다는 점에서 거부한다. 그 대신 그는 루소, 로크, 칸트의 사회계약론을 원용하여 정의의 두 원칙을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이론적 기초로 제시한다. 정의론의 핵심이 되는 정의의 두 원칙은 자유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으로 대별된다. 제1원칙은 모든 시민이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평등한 정치적 자유의 원칙이다. 경제적 평등에 관한 제2원칙은 공정한 기회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으로 세분된다. 공정한 기회의 원칙이란 모든 직책이 공정한 기회의 평등 원칙에 따라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최소수혜자 우선성의 원칙으로 일컬어지는 차등의 원칙은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불가피할 경우 그 사회의 최소 수혜자를 우선 배려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제1원칙을 자유의 원칙이라고 약칭하지만 사실상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의 평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제1원칙과 제2원칙 모두 평등을 옹호하는 원칙이다. 바로 이 점에서 롤즈의 정의관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 정의관이다.
롤즈의 평등주의적 정의관은 그 태생지인 미국 사회의 당시 실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공동체적 유대가 근본적으로 빈약한 가운데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표현이 시시하듯 자본주의적 경쟁과 성공을 강조할 뿐 평등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거의 전무한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1950년대 매카시즘을 거치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정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공산주의자의 사회교란 책동으로 매장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미국 사회에서 부자의 자선에 호소하거나 정부의 시혜적 복지 정책에 무기력하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롤즈의 정의론은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정의론』의 영향력은 정의의 두 원칙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원칙을 제시하는 그의 독특한 방법론 덕분에 더욱 깊고 넓게 지속되었다. 사실 20세기 초반부터 영미학계에 몰아친 언어분석철학의 광풍 속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적 논의는 무의미한 말장난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정의의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최초의 계약 상황,’ ‘원초적 입장,’ ‘무지의 베일,’ ‘반성적 평형,’ ‘구성주의’와 같은 독특한 개념적 장치를 통해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롤즈의 방법론은 다원화되고 이질적인 사회에서 규범적 문제를 내실있게 전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정의의 문제’가 논의의 전면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이나 법철학자 하트와 같은 당대의 쟁쟁한 여러 지성의 거대한 비판을 마주하면서 『정의론』에 대한 논쟁은 철학계를 넘어 사회과학 및 법학계로까지 확장되었다.
1980년대 이후 사회정치철학, 윤리학, 법철학 분야에서 진행된 주요 논쟁은 사실상 롤즈의 정의론과 어떤 형태로건 연관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서부터 복지 정책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나 국가 중립성에 대한 논쟁 그리고 최근 공화주의 논쟁은 한결같이 롤즈의 정의론에서 파생되었거나 적어도 직간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특히 1995년 『철학』(The Journal of Philosophy)지면에서 하버마스와의 논쟁은 세계 지성사에서 롤즈의 정의론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다.
롤즈의 정의론이 지성사에 미친 엄청난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적 영향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롤즈의 정의론의 태생적 특성과 학문적 추상성이다. 마르크스를 위시하여 19세기를 풍미한 사회주의 변혁 운동과 비교해 볼 때 롤즈의 정의론은 근본적으로 강단철학이다. 미국 사회의 경우 밑으로부터 사회변혁 운동 역량이 매우 미약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거의 없이 점진적 개량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정의론』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구조적 부정의를 생생하게 고발하거나 장밋빛 미래에 대한 실천적 전략을 제시하며 독자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책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600쪽이 넘는 원저(번역서의 경우 782쪽) 자체가 주는 지면의 부담감이 결코 적지 않으며 그 내용 역시 근대 서양 사상에 대한 차분한 성찰 없이는 결코 쉽게 읽을 수는 없다. 어느 쪽을 펴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기품이 깃든 표현과 아름다운 문체는 독자에게 학문적 희열을 선사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내용의 심오함과 더불어 실천적 영향력을 약화시킨다.
이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일맥상통한다. 『정의론』은 1970년대 중반 국내에서 읽히기 시작하여 1977년 황경식 교수를 통해 번역되었고 2003년 개정판 역시 황경식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제 롤즈에 대한 국내 연구가 30여년이 넘어서며 상당한 정도의 연구 성과를 축적하면서 중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소개되고 있으나 실천적 영향은 미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 학문적 추상성뿐만 아니라 롤즈의 『정의론』이 이미 선진화된 미국 사회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이를 국내 상황에 활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이른바 단일 언어와 단일 문화를 공유하는 단일 민족 국가라는 발상은 공동체 중심인데 비해 롤즈의 정의론은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체질적인 이질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시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사회적 빈부의 격차는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다양한 종교적 신념간의 사회적 갈등이 내연하는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의 지속적인 유입과 국제결혼의 꾸준한 증가는 사회 구성원 자체를 다양화하면서 사회적 이질화가 공동체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급속한 퇴행 앞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규범적 기초에 대해 근본적인 재성찰을 요구하는 지금,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존중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도모하며 참된 민주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새로운 도전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그 누구도 유린당할 수 없는 불가침의 인권을 존중하는 가운데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도덕적 기초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립하고자 한 현대의 지성 롤즈의 『정의론』은 학문적 희열과 함께 실천적 고민을 풀어 나갈 의미있는 실마리를 분명 제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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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본문
사상 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하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더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빼앗는 것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더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 생활의 제1덕목으로서 진리와 정의는 지극히 준엄한 것이다. (제 1절 정의의 역할,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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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원섭
철학박사. 미국 퍼듀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교양학부에 근무중. 현재 주된 관심사는 디지털 혁명이 야기는 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건강한 민주주의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다. 저서로 『롤즈의 공적 이성과 입헌민주주의』(학술원 우수도서 선정)가 있고, 논문 「공적 이성과 정치적 정의관」(『롤즈의 정의론과 그 이후』), 「Democratic Consolidation in Digital Environments」(2007), 「디지털환경에서 지적 재산권」(2004), 「사이버 공간의 윤리적 함축」(2003)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