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출신 프랑스 저널리스트이자 에콜로지 사상가 앙드레 고르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소수의 문화이론가들이나 생태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지만, 그의 주요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우리는 고르에 대한 소문과 설(說)을 접할 기회가 간헐적으로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육성을 직접 듣게 된 것이다. 유럽의 ‘고급’이론이라면 앞을 다투어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진보적’인 이론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학자들이 대학 안팎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유럽의 ‘68지식인’들 중에서도 뚜렷한 탈근대적 생태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앙드레 고르가 세상을 떠난 이제야 번역서를 통해서 한국의 지식대중들과 만나게 된 것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늦은 감이 있다.
고르의 언어는 다른 유럽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 비해 구체적이면서도 평이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의 생애 말년의 저작 『에콜로지카』의 한국어판 출간은 여러가지로 시의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본격적인 국면에 들어서지도 않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궤멸적 파장을 실감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에콜로지카』를 통해서 세계적 경제위기의 본질에 대해 명쾌하고 알기 쉬운 해설을 접할 수 있다. 고르는 자본주의 체제의 운영을 뒷받침하는 기술적 토대에 해설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성 향상은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산성 향상은 자본의 끝없는 자기확장이야말로 이 체제의 생존수단이면서 존재이유라는 것과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지고 있다. 자본을 투입하여 생산해내는 제품이 시장가치를 더하는 과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는 자동화, 전산화라는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고르가 주목하는 것은 자동화·전산화로 인해 생산성 향상에서 노동력이 차지하는 부분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확장될 수 없고, 따라서 퇴조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형성되었다. 첫째, 자본증식에 필요한 노동인구가 줄어듦으로써―고르에 의하면 ‘자본생산적 인구’가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전체적으로 생산성 향상이 한계상황에 부딪혀 있다.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인구가 전체의 55퍼센트를 차지하지만 이중 4분의 1 정도가 종업원, 판매원, 육아도우미 등 이른바 ‘워킹푸어(wordking poors)'로서, 지불수단의 양을 늘리지 못하는 계층이다. 급증 추세에 있는 이 계층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의 원활한 운영에 짐이 되는 잉여인구로 전락하고 있다. 이는 소수 다국적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됨으로써 생기는 현상이며, 또한 이것은 생산의 자동화와 전산화라는 기술적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둘째, 시장이 과포화상태라는 점이다. 생산성 증가의 한계가 기업체제의 내적 한계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증가하는 상품의 총량을 소화시킬 시장의 크기가 무한히 늘어날 수 없다는 점은 그 외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계에 도달한 시장 내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기업 간의 경쟁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다수의 패자와 소수의 승자로 시장은 재편되어 왔다. 이러한 시장의 상황은 다시 경제력 집중을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생산성 증가의 한계와 시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 체제는 여러 형태의 거품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 한계를 극복해왔으며, 거품경제의 궁극적 모습은 금융자본의 확장으로 나타났다. 금융자본주의란 실제 물건을 만들어 파는 행위로는 화폐를 증식시키는 데에 한계가 온 상황에서 주식, 부동산, 화폐시세차익 등을 통해서 금융자산을 부풀리는 극단적 형태의 머니게임 체제를 일컫는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의 기업들이 획득하는 이윤의 절반 이상이 금융거래를 통해서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윤창출은 온갖 종류의 부동산 부채와 이를 담보로 한 파생 금융상품에 의한 가상적 수치놀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일단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 “교환가치에 기초한 경제의 하강이 점점더 심해질 것”(119쪽)이라는 것이 고르의 일관된 예측이었다.
‘교환가치에 기초한 경제’는 곧 자본주의 경제를 의미한다. 현대경제의 위기에 대한 고르의 설명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지구적 경제위기로 발전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고르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거품 유지 정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케인즈식 재정정책을 통한 경제회복을 시도하는 세계 각국의 방안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고르의 설명은 단순히 경기순환상의 자본주의 경제의 하강국면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에 체제의 자기파멸 논리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렇게 볼 때, 고르는 맑스주의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리상 이렇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는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달려있다고 보는 점에서 고르는 속류 맑스주의의 결정론적인 태도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르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이다. 자율적인 개인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 행사에 의한 사회적 결과를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유로운 개인들이 공동체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통제의 실현 여부에 달려있다.
고르가 ‘정치생태학’이라고 이름붙인 실천철학은 철저히 실천적 의지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무엇을 실천하는가?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경험과 사회활동은 생산, 소비, 문화, 정치 등의 개별화된 행위로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은 각 영역 전문가들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전문가들이다. 전문가들의 지식은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능력과 생산과 소비의 방식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국가와 자본이 빼앗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하여 고르는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을) 무능화시키는 일’을 하는 인간이라고 말한 이반 일리치의 견해에 공감한다.
고르는 국가와 자본의 지원을 받는 전문가들이 규정해온 ‘욕구’를 다시 개인들의 통제 아래에 둘 것을 요구한다. “정치생태학에 제기되는 문제는, 그들의 체험된 세계 내에서 그들만의 목표를 추구하는 자율적 개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해 에코시스템의 요구사항들을 고려하게끔 허용하는 실천적 양태들의 문제다.”(58쪽) 실천의 요체는 진정한 ‘욕구’를 자각하기 위한 자기억제에 있다.
‘자기통제’나 ‘자기억제’는 자본의 자기확장 체제에 대응하는 개인의 윤리적 규범이기도 하지만, 고르의 관심은 도덕규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도덕적 가치를 누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생산자들이 노동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자유를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자기소외를 겪고 자연의 에코시스템을 붕괴시키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맑스주의자들의 설명대로, 자본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는 맑스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자본이 독점한 생산수단을 특정계급이 빼앗아온다고 해서 인간해방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문제는 생산수단 자체의 변화를 도모해야 된다는 것이다.
고르에 따르면, 맑스가 연합된 소규모 생산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이들이야말로 자본의 독재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진정한 욕구와 필요를 자각하여, 거기에 적합한 생산수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합된 소생산자들이 생산수단을 자기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전산화와 정보화 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들어맞는 맞춤형 생산수단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기술적·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규모 플랜트 시설이나 원자력 발전기구 같은 생산수단이 인간을 그 아래에 예속시켜왔던 반면, 고르에 따르면, 다른 한편으로는 전산화와 정보화가 급속하게 진척되면서 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생산수단을 지식노동자들이 직접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 예컨대, 휴직상태에 있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지식·육체 노동자들이 공동제작소에서 인터넷상에 제공된 무료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마을에 필요한 물품의 거의 전부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브라질 빈민촌의 청년들은 매년 80종의 음반을 직접 구워내고 있으며 2004년 브라질 전체에서 제작된 컴퓨터의 4분의 3 정도가 폐품으로 버려지는 부품을 이용해서 빈민촌 청년들이 자체 제작했다는 것이다.
고르가 정보화·전산화 같은 이른바 탈근대적 기술사회에서 인간해방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의 다른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과 달리 자연의 소멸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이 오히려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는 조건이라는 도착(倒錯)적인 사유를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이나 사회체제를 건설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으로서 현단계의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한소비와 자원고갈을 부추기는 현재의 엄청난 생산력이 결국 지속불가능한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고 볼 때, 고르의 입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정보화 시스템이 결국 정치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회복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르는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의 바탕에는 고도의 산업화 시스템을 포기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생산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다. 고도로 발달한 이러한 생산력의 토대 위에서, 에코시스템을 교란하는 산업노동을 줄이면서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땅과 씨앗의 상품화에 대항하여 벌이는 싸움이나 무료 소프트웨어의 보급을 위한 싸움(41쪽)이 반드시 현단계의 생산력을 유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산업화로 인한 땅의 쇠락 현상을 막고, 토착적인 고유 종자의 상품화에 저항할 수 있는 소규모 가족농을 보존하는 데에 탈근대적 정보화 시스템이 보조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자체가 산업적 생산력의 제고에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업생산력의 유지와 향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C)가 결성되고 유럽 전역의 공동시장에서 농산물 시장을 전면 개방한다는 정책이 나왔을 대, 고르는 그 경우 소농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을 우려하면서도,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경제력 증대에 도움이 됨으로써 그 개방정책이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섞인 예측을 내놓은 바 있다(“Common Market Agriculture”, New Left Review 1964년 1-2월호). 그러나 소농의 희생 위에서 건설되는 사회주의는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일까? 소규모 농업 생산에 기초한 자급사회에 대한 비전이 빠진 정보사회주의에 대한 상상이 얼마나 현실적일까? 고르를 읽으며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 의문이다. (*)
(『녹색평론』 2009년 1-2월호, 통권 104호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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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기 본문
생계수당이 도입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화와는 다른 통화가 될 것입니다. 지금과 동일한 기능을 갖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것은 지배목적, 힘의 목적에 쓰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만들어질 것이고, 밑으로부터 형성된 힘에 의해 나아갈 것이고, 동시에 자급생산협동조합들에 의해 추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지금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위기들, 에너지 위기와 신용시스템 붕괴에 따른 통화위기 등의 위기 발생 상황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라도 아르헨티나가 겪은 그러한 사태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많은 부분,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그러한 세상을 준비하는 조직과 단체에 달려 있다고 하겠죠. (6. 가치없는 부, 부 없는 가치, 167쪽)
이러한 바탕 위에서만 산업화, 즉 자본 축적은 가능했던 것이다. 직접적 생산자로 하여금 필요를 초과하는 잉여를 생산하게 만들고 이 ‘경제적 잉여’를 생산수단의 배가와 그 수단의 힘을 늘리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직접적 생산자를 생산수단과 생산결과에서 분리시킴으로써만 가능했다. 실제로, 산업의 생산수단이 애초에 그들 스스로 연합한 생산자들에 의해 발달했다고 가정한다면, 기업들은 여전히 생산자들이 통제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았을 것이며, 그들은 끊임없이 필요, 노동 성격과 강도를 자기제한했을 것이다. 따라서 산업화는 그들의 규모와 복합성 덕에 생산자들의 중재력의 영향을 벗어난 집중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발전’은 일정한 문턱을 넘지 못했을 것이며, 경쟁은 억제되고, 충분한 것의 기준이 계속 ‘자연과의 교환’을 규제했을 것이다. (전문가정치와 자기제한 사이에 있는 정치적 생태학,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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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승렬
영남대 영문과 교수. 비평이론 전공. 옮긴 책으로 『우리시대 문화이론』이 있고, 논문「잃어버린 민족의 망명정부, <우리학교>」, 「다시 문화를 생각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공통의 문화'」, 「근대문학의 종언, 그 후 또는 그 이전에 대하여」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