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무력감과 현실도피에 빠져 있는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하여, 이들이 대중운동에서 열렬한 맹신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요점은 ‘좌절한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현실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잊고, 숭고한 목적의 일부라는 강렬하고 맹목적인 열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맹신자들의 심리동학은 그것이 종교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혁명운동이든 동일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호퍼는 이와 같은 주장을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나치즘운동의 사례를 제시하며 입증하고 있는데, 모든 대중운동은 그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맹신자들의 심리동학과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지도자들의 전략이 적절히 결합함으로써 성공해 왔다.
책의 냉정한 결론은 세계가 “광신주의라는 질병”을 얻으면서 “사회와 국가를 죽음에서 일으키는 기적의 도구”도 함께 얻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광신주의에 대한 역설적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사회에서 희열,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이 종종 이성적 판단보다 더 큰 사회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논의들은 이미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격정적 감정의 소유자들이 한 사회의 변화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대중운동의 과정 및 새롭게 이룩한 사회에서 종국에는 희생자가 된다면?
지난 2008년 6월, 한미FTA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모습 |
대중운동은 무기력한 사람들의 아편
호퍼에 의하면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에게 가까운 미래에 주어질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그 희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권력의식이 주어질 때 역동적으로 형성된다. 이 역동기에는 좌절로 인해 무력감을 지녔던 사람들이 그것을 대체해 줄 새로운 대의, 신념에 대한 강렬한 맹신자로 등장하며, 이들은 대중운동 집단에 동일시하고 헌신함으로써 대중운동의 거대한 원동력이 된다. 현실의 사회운동은 소외된 자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집단적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거대한 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논의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퍼의 주장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먼저 호퍼는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자기부정과 현실도피의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일련의 악덕이나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 무능한 사람들, 과도하게 이기적인 사람들, 따분한 사람들, 죄인 등이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 속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과 무기력을 느끼며, 지속적인 불안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대체물을 강하게 열망한다. 이러한 심리는 곧 다가올 희망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청사진과 신념을 만나 강렬한 열광의 감정을 형성한다. 이들에게 대중운동에의 참여는 초라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존재를 잊고, 그 자신이 숭고한 목적과 전체의 일부라는 존재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숭고한 목적은 그것이 종교적 교의든, 민족주의 이념이든, 공산주의 강령이든, 국가의 정책적 신념이든 상관 없다.
성공한 모든 대중운동에는 미래의 희망이 있고, 대중의 초조함을 달래고 인생에서 자신의 몫을 감수하게 해줄 마약품이 있다. 스탈린주의는 기존의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인민의 아편이었다.(54)
좌절한 사람들이 이러한 대의에 자신을 동일시하여, 대중운동이라는 “마약품”에 강력히 빨려 들어가게 되면 단결과 자기희생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빈민들을 그 중 한 부류로 제시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빈민들의 경우에도 신생빈민이나, 어느 정도 경제적 조건이 낫거나 자유를 얻은 빈민들에게서 맹신자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혹은 중세 장인들처럼 개인의 개성과 창조력을 갑작스럽게 박탈당한 빈민, 전통적 유대(가족 등)로부터 뿌리 뽑힌 빈민들도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극빈층은 오히려 이러한 맹신자들이 될 가능성이 많지 않다. 비참하게 가난하고 세 끼 식사를 마련하는 데 종일 시간을 보내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생존이라는 개인의 목표가 뚜렷하며, 허무감이라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만은 비참함이 견딜 만할 때, 상황이 개선되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반항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경험이다.(52)”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의 경험이 존재할 때 불만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희망을 찾아 나설 수 있다.
비단 빈민뿐만 아니라 부적응자, 소수자,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죄인(범죄자) 등 다양한 부류의 개인들은 단결과 자기희생이라는 상호적인 행동방식에 몰입하게 된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에게 좌절한 사람들은 “현실을 비하하는 기질, 몽상에 빠지는 습성, 습관적인 증오심, 남 하는 대로 따라 하려는 경향, 현혹되기 쉬운 경향,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는 경향(93)”을 지니며, 이러한 현상이 단결의 동인이자 무모함을 부추기는 배후가 된다.
맹신자들을 포섭해온 대중운동의 지도자들
나아가 호퍼는 역사 속의 대중운동 지도자들이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단결과 자기희생을 이끌어 내는 전략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 운동, 나치즘, 시온주의,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운동, 일본 근대국가의 형성, 중국혁명 실패의 사례 등 호퍼가 든 역사적 사례들은 지도자가 맹신자들을 단결시키는 법, 자기희생을 이끄는 전략과 전술, 기존 공동체적 유대의 적절한 이용 전략 등을 얼마나 잘 구사했는지에 따라 그 운동의 성패가 결정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호퍼의 입장에서 해석된 역사적 사건들과 대중운동의 심리동학은 르봉의 『군중심리』,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등에서 분석된 내용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발발한 대중운동의 경과과정 속에서, 엘리트의 파시즘 동원 전략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적극적인 심리변화과정을 신랄하게 제시한 것이 이 책의 묘미이다. 다만 수많은 대중운동은 무척 다양한 사회적 요인과 환경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운동의 동학을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다만 호퍼의 아이디어는 기존의 진보주의적 사관이나 냉전논리 또는 좌파 담론에서 당연시했던 운동론의 관점을 전환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그 성격과 양태가 다른 다양한 대중운동을 동일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여러 대중운동이 공통점이 많다는 가정은 모든 운동이 똑같이 이롭다거나 똑같이 해롭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으며 일절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14)”고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보수적 운동과 진보적 운동, ‘건전한’ 종교집단과 ‘불건전한’ 종교집단, 정의로운 국가와 독재국가 사이의 이분법적 통념을 벗어나, 건강한 대중운동의 본질을 성찰해 볼 수 있게 된다.
집단적 열광은 마약인가, 삶의 에너지인가
어떤 크고 작은 집단행동에서 생성될 수 있는 맹신자들의 심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질문은 책을 읽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다. 물론 호퍼는 이와 같은 자기희생과 몰입의 에너지가 가지는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개인이 혹독한 고립과 고통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특정 이념과 집단에 대한 동일시와 열광이 그것을 넘어서는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는 생각보다 가족, 민족, 국가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와 정념이 있을 때 개인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고문 혹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는 자기 개인의 능력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는 듯하다. 그에게 유일한 힘의 원천은 본연의 자신을 추스르는 것보다는 강력하고 영광스러우며 파괴되지 않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99)
지난해 6월, 반값등록금을 외치며 거리로 나온 대학생과 시민들 |
실제 심리학적으로도 한 개인이 고문이나 학대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감옥 바깥에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물을 상상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기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고 한다. 고통의 상황에서 자신 외부의 절대적인 존재는 한 개인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보호요인이 되는 것이다. 한편 그러한 보호요인을 지니지 못할 때 개인은 자기분리(자기해리)를 통해서, 즉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상과 현재의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끔찍한 상황을 탈출하고자 한다.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어느 정도 현실이라면, 외부의 대치물을 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듯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대치물이 전자가 될 것인지, 후자가 될 것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우리는 현실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현실부정의 심리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표상을 설정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호퍼의 표현대로 “개성이 살아 있는 독립적인 개인”, “창조적인 자아”를 만들어 가는 방법은 무엇일지. 그것은 국가, 정당, 회사, 종교, 노조, 가족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보다 안정되고 건강한 것이어야 하며, 자기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대중운동은 맹신자들의 희생 위에서 행동가들의 성공으로 끝난다
이 책의 후반부는 대중운동이 전개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 단계별로 서로 다른 참여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호퍼에 의하면 “운동을 개척하는 것은 지식인,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행동가이다.(214)” 초창기 대중운동의 산파 역할을 했던 지식인들이 새로운 운동의 사상과 전망을 제시했다면, 맹신자들은 그러한 신조를 따라 격정적이고 광범위하게 사회 분위기를 뒤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역동기의 끝에서 운동의 현실적 결과와 성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행동가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운동은 사업이 되며, 맹신자들이 단결과 자기희생을 통해 변화시켜 놓은 토양을 행동가들이 획득해 간다. 만약 이러한 행동가가 등장하지 못한다면 대중운동은 격정과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행동가는 대중운동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나 행동가의 등장은 대개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동가의 목표는 세계 개혁이 아니라 소유다. 역동적 단계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숨결이 저항과 급격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최종 단계는 주로 획득한 권력을 집행하고 영속시키는 문제에 집중된다. 행동가의 등장과 함께 대중운동의 폭발적 격정은 봉헌된 제도 속에 방부처리되어 밀봉된다. 종교운동은 계급제와 의례로 구체화되며, 혁명운동은 자경조직과 행정 제도로, 민족운동은 정부 기관과 애국적 제도로 구체화된다. 교회의 제도화는 쇄신의 기풍이 끝났음을 의미하며, 승리한 혁명 조직은 혁명정신과 전술을 청산하고, 신생 국가 혹은 재건된 국가의 정부 조직은 호전적인 애국주의에 종지부를 찍는다.(216-217)
호퍼는 이처럼 대중운동이 최종단계에 접어들 때, 운동을 안착시키고 일상적 시기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행동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진정한 행동가는 신념가가 아니라 법률가다. 행동가는 새로운 분위기에 걸맞는 각종 제도와 법률을 구축하면서도 운동 초기의 지식인들과 광신자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새로운 선전선동, 그러나 철저히 충성할 수 있는 기념의식을 만든다. 다시 행동가는 새 체제의 안정과 지속성을 꾀하기 위해 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구체제에서 사용했던 체제 안정 기법을 다양하게 동원하며, 신구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이념, 제도, 경제시스템 등을 새롭게 “이어 붙인 조각보”를 만든다.
행동가의 손에 들어간 대중운동은 더 이상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부담의 도피처가 아니라 야심가의 자기실현 수단으로 바뀐다. 대중운동이 개인의 출세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휘하는 현상은 이제 운동의 성격이 급격히 변화하고 현재와 화해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시사하는 명쾌한 징후다. 이 출세를 위해 달리는 이들의 유입이 대중운동을 하나의 사업으로 변모하도록 가속도를 올리는 요인임은 분명하다 ... 이렇듯 격정적인 시기가 지난 운동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권력의 수단이요 좌절한 이들에게는 아편이 된다.(221)
대중운동은 맹신자들의 희생 위에서, 행동가들의 성공으로 끝이 나며, 열광적인 맹신자들은 다시 일상의 안정적이고 통제된 체제 위에 재배치된다. 호퍼는 열광이 지속되길 원하는 맹신자들 때문에, 그것을 지속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이 역동기 이후 비참한 최후를 맡는 경우를 지적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대중운동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이루어내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결코 평등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약속한 운동이 투쟁을 벌이게 되면, 운동을 위해 단결하고 개인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는 호퍼의 주장은 한국사회의 사회운동 내부에서 비판적으로 제기된 논점이기도 하다. 70-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제쳐두더라도, 2000년대 들어서만도 여중생을 위한 촛불시위, 탄핵반대 시위, 미국산 소고기 반대 촛불시위 등 전국적인 대중운동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 노력, 희생으로 만들어진 대중운동의 결과가 정당하게 도출되었는지, 대중운동 이후 그 성과를 어떠한 방식으로 도출하고, 나눌 것인지를 행동가들이 진정성 있게 논의하지 못하는 과정, 그래서 운동의 참여자들에게 한바탕 벌어진 운동의 끄트머리에서 생겨나는 공허함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맹신자들과 그 이용자들은 언제나 나타날 수 있다
호퍼가 이 글을 썼던 1951년은 1·2차 세계 대전, 파시즘과 홀로코스트,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체주의화 등 전세계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시기였고, 이성의 합리성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절망과 비관, 공황상태에 빠졌던 시기이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결코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2012년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 좌절한 대중들이 광신적 대중운동에 동원되었던 호퍼의 설명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다만 현재의 한국사회는 가시적 폭력과 전쟁의 시대를 넘겼지만,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극대화되면서 현대인들은 비가시적인 폭력과 비인간적인 차별 속에서 깊은 무력감과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실업 및 고용불안정, 경제위기로 인한 불안, 안정적인 공동체의 부재 등으로 인해 불안의 징후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상처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좌절한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양산될 수 있다. 『맹신자들』의 현재적 교훈은 무엇보다 이 땅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지니는 뿌리 깊은 절망과 트라우마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심리적 불안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 왕따 현상, 자살율을 급격한 증가, 가족 살해의 증가 등 철저히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이러한 불안들이 급기야는 새로운 대중운동의 맹신자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나아가 좌절감을 강하게 경험한 사람들일수록 갖게 되는 희망의 절실함을 역사가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정치의 계절인 지금, 정치가들이 제시하는 정책과 선거공약들이 어디까지 계산된 것인지, 현대인들이 겪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사업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자유, 평등을 위한 운동이 모색될 때, 운동참여자들이 운동의 대상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도 남겨져 있다. 운동을 이끌기 위한 ‘신화적 슬로건’을 제시하기에 앞서 현재의 너와 나, 우리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운동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개인의 열정이 투영되지만, 개인의 존재가 희생되지 않은 공동체, 정당, 단체, 종교, 국가를 만드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은 참으로 오래 되었다. 마르크스는 200여년 전에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대체”를 꿈꾸었다. 답은 언제나 현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