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 분쟁지역 전문 PD
서른 살에 방송 피디가 되어 15년간 세계의 분쟁 지역을 취재해 왔다. 현재는 공중파 방송 다큐멘터리 피디로 일하면서 『시사인』 국제문제 편집위원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SBS 특집 다큐멘터리 『동티모르 푸른 천사』를 시작으로 최근 SBS 삼일절 특집 「꽃들의 저항, 조선 기생의 만세운동」, SBS 스페셜 「IS, 이슬람 전사 그리고 김군」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이라크 파병, 동원호 사건, IS 등 국제문제를 다룬 르포를 제작했으며, 공정무역을 다룬 다큐멘터리 『히말라야 커피로드』를 재능기부로 연출했다. 여성인권 디딤돌상, MBC 방송대상 공로상, 일본NTV 10대 디렉터상, 한국 YWCA 여성 지도사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히말라야 커피로드』 『세계는 왜 싸우는가?』 『사람이 아프다』 『아들에게 보내는 갈채』(공저) 『위로의 음식』(공저) 등이 있다.
얼마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인천공항에서 15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이가 한국 입국을 희망하며 이 아이가 내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아이였다. 시리아 내전 취재 5년이 넘어가며 시리아 땅에서 수도 없이 취재원들에게 뿌린 명함이 그 아이에게도 흘러갔나 보다. 그 아이가 전화로 내게 처음 한 말은 ‘학교에 가고 싶어서 한국에 왔다’였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아이는 어려도 너무 어려 보였다. 아이의 사연을 파악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랍어 한국인 통역과 시리아인 한국어 통역, 변호사까지 그 자리에 모시고 나갔지만 아이가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표현을 못 한다, 아랍어는 할 줄 알지만, 두서없이 말하고 글자도 전혀 모른다. 내전 기간 동안 시리아의 학교기능이 완전히 상실한 상태라 아이는 학교에 다닌 기억이 까마득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알아낸 사실은 아이의 부모님이 모두 폭격에 사망했다는 것. 그리고 고향인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혼자 육로로 레바논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한국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한국으로 가지고 온 것은 내 전화번호뿐이었다. 아이는 미성년자이므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우리 정부가 입국을 허락했다. 그렇게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꺼낸 종이에는 부모님의 사진과 사망 증명서였다. 막상 그 물건을 꺼내며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이는 슬퍼서 자주 꺼내볼 수 없는 물건이었나 보다.
지금 아이는 모처에서 한국 학교에 다니고 있고 제법 한국말도 한다. 아이가 생애 최초로 배운 글자가 한글이다. 더듬더듬 한국어를 쓰며 더는 문맹이 아님을 자랑스러워한다. 아이는 한국에서 자라서 공부하고 일하기를 바란다. 다시 시리아 땅으로 가면 죽으리라는 것을 육감으로 느낀다고 한다. 아이의 등장은 한국 사회에도 시리아 난민의 여파가 미치고 있음을 실감한 사건이었다. 시리아 아이들 대부분이 이 아이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부모는 죽고 떠돌아다니며 자기들끼리 의지하고 사는 아이들도 많다. 터키 남부 가지안테프에서 만난 ‘꽃 파는 시리아 아이들’이 그런 경우이다. 아이들 대부분 고아였다. 고아원도 뭐도 없는 환경에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며 공원에서 데이트하는 커플을 보면 장미꽃을 들고 가서 강매한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대충 10여 명이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12살, 어린 아이는 5살이다. 꽃을 파는 아이 중 가장 어린 아이가 꽃을 들고 가서 아주 서툰 터키어로 (시리아 사람들은 아랍어를 사용한다) “아름다운 아가씨, 꽃을 사 주세요. 신의 평화가 함께 하실 거예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동정심에 꽃을 사주고 그 돈으로 아이들 무리는 빵을 사서 나눠 먹는다. 공원을 중심으로 서너 무리의 이런 시리아 아이들이 영업을 한다. 때로는 뒷골목에서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며 자신의 영업구역을 지킨다. 철저하게 정글의 법칙으로 살아남는다. 한창 부모님 밑에서 응석을 부르고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이렇게 외국 길바닥에 내몰리리라고는 불과 6년 전만 해도 상상을 할 수 없었다.
시리아는 내가 이라크 전쟁을 취재하는 동안 휴가를 가던 아름다운 나라였다.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는 고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였다. 단돈 10달러만 들고 나가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라는 ‘쇽’에서 샌드위치와 홍차도 마시고 멋스러운 스카프도 한 장 살 수 있었다. 시리아 북부 도시 알레포는 강가에 세워진 아름다운 호텔 테라스에서 한 달 동안 유유자적하며 쉬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나 알레포는 지금 도시 전체가 폐허이다. 하루가 멀다고 떨어지는 드럼통 폭탄(드럼통에 화약과 쇳조각을 가득 채운 폭탄으로 제조단가가 아주 싼 재래식 폭탄)이 건물이란 건물을 모두 파괴했다. 얼마 전 폭격 후 잔해를 뒤집어쓰고 구출된 후 눈도 깜짝 못하고 얼어있던 아이의 영상이 전 세계의 심금을 울렸다. 그곳이 알레포이다. 드럼통 폭탄을 떨어트리는 사람들은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군이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민간인 지역에 떨어트린다. 시리아 사람들은 헬리콥터 소리가 나면 드럼통 폭탄이 터질 것을 안다고 한다. 반면 전투기 소리가 요란하면 미군과 연합군의 폭격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한다. 미군 전투기 소리는 어마어마한 성능의 미사일이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 위에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미사일에 희생된다. 물론 이런 폭격에는 명분이 있다. 시리아에서 악명을 떨치는 이슬람국가(IS)를 섬멸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IS 대원 한 사람 죽이려고 시리아 민가인 100여 명이 희생된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미사일이 어떻게 IS 대원 한 사람만 겨냥하겠는가. 반경 1Km에 있는 생물체를 모두 초토화하는 미사일이기에 민간인의 희생이 몇 곱절 클 수밖에 없다. 빈대 한 마리 잡느라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우는 전략이 현재 시리아의 대IS 해법이다. 당연히 시리아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려면 시리아 땅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시리아 국경을 넘는다. 시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난민이 된 것이다.
시리아 인근 국가로 몰려든 난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시리아 인근 국가로는 북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요르단, 서쪽으로 레바논, 그리고 동쪽으로 더 심한 전쟁 중인 이라크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밀려오는 시리아 난민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난민들에게 먹을 것과 천막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되는 것이다. 일정 기간 인근 국가에서 머물던 난민들도 어쩔 수 없이 더 멀더라도 형편이 되는 나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여든 것이 유럽의 문인 그리스이다. 그리스로 가면 육로로 서유럽에 도달할 수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는 부자국가이므로 최소한 굶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다. 난민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도 않다. 난민촌에서 굶어 죽느니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유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유럽으로 가는 여정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터키 서부 해안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가는 도중 배가 뒤집혀 떼죽음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빨간 상의를 입고 터키 해변에서 엎드려 숨진 시리아 꼬마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비극도 이 와중에 생긴 일이다. 욕심 많은 밀항 알선업자가 배에 정원을 초과해서 사람들을 태우기 때문에 이런 비극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공짜가 아니다. 한 사람당 1000 유로(우리 돈 1백2십4만여 원)이다. 큰돈을 주고 구사일생으로 바다를 건너 그리스에 도착한다. 해도 첩첩산중이다. 그리스도 경제 위기로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라 그리스 정부는 난민들을 그리스 땅을 지나 유럽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난민들은 다시 불법 알선업자들에게 돈을 주고 육로로 가는 길을 떠난다. 그 와중에 컨테이너나 탑차에서 정원 이상 난민들을 태우다 보니 유럽의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질식사하는 경우가 속출한다.
이런 죽음의 난민 이동 경로를 통해 난민들은 생사를 넘나든다.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에 몰려들자 독일은 100만 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독일 정부는 난민들의 주택과 일자리, 의료와 아이들 교육 지원에 나섰다. 유럽의 각국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드렸다. 캐나다의 ‘캐나다 난민 보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만여 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작년 11월, 프랑스 파리의 식당과 카페, 경기장 그리고 공연장에서 록 콘서트를 즐기던 시민 130명이 동시 다발 테러로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IS를 추종한 이슬람 테러범이 일으켰다. 테러범이 난민들 사이에서 섞여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온 사실이 알려지며 유럽에서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난민과 테러범을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유럽 각국은 국경의 빗장을 닫아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난민들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도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려는 난민들이 넘쳐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난민촌인 깔레 난민촌은 정부 차원에서 철거되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오는 지금 난민들이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없다. UNHCR유엔 난민 기구 홈페이지가 공개한 시리아 난민의 전체 숫자는 2011년 내전 발발 후 지난 7월까지의 기준으로 480만 8229명이다. 이들 난민도 누군가의 자식이며 부모이다. 가족이 모여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것은 인간의 기본 권리이다. 이것이 깨지는 순간 그 여파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도 800여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와 있다. 이들 중 우리 정부로부터 정식 난민 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겨우 3명이다. 시리아 난민을 전쟁 난민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내전은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므로 전쟁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민 판정을 받지 못한 시리아 난민들은 한국에서 의료나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일자리도 없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집을 구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이들도 우리의 이웃이다. 과거 일제
치하에서 만주벌판이나 러시아로 이동했던 선조들도 엄밀하게 구분하면 난민이다. 일본의 재일동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선조들은 낯선 땅에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21세기이다. 좀 더 발달한 문명의 세상에 산다. 나눔과 평화를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우는 세상이다. 난민들에게 조그만 희망이라도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촛불처럼 살아있다고 믿고 싶다.
일본 외교관 출신이 저술한 책으로 서구 미디어가 보는 시리아 내전이 아닌 다른 각도의 시리아를 재조명한 내용이 좋은 책이다. 현재 시리아 내전의 핵심 인물인 시리아 대통령 바시르 알 아사드에 대한 심층 깊은 분석도 돋보인다.
올해 나온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책 중 가장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지만 메시지는 그 어느 책보다 강하다. 현재 독일에 정착한 열 살 라하프네 가족의 실제 이야기이다. 시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이웃들과 행복하게 살던 평범한 가족이 독일까지 오는 여정을 담고 있다. 라하프의 “폭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말은 모든 시리아 난민들이 바라는 희망이다.
프랑스에서 많이 알려진 시리아 난민에 대한 동화책. 프랑스에 정착했던 시리아 난민 누네 가족이 경찰에게 갑자기 끌려간다. 프랑스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서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경찰에게 끌려간 뒤, 그의 프랑스 친구 리사는 누를 걱정한다. 리사가 걱정하는 동안 누는 허름한 건물에서 갇혀 지낸다. 그곳은 누네 가족처럼 서류가 없는 난민들이 수용된 곳이다. 누는 이 건물에서 리사를 그리워한다. 리사와 누는 서로 친구일 뿐이지 프랑스니 시리아니 하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나 누와 리사로 입장을 바꿔 보면 난민의 다양한 이해가 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우리나라 분쟁지역 취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정의길 기자의 역작이다. 현대 이슬람주의의 탄생에서 시리아에서 악명을 떨치는 IS의 탄생까지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슬람 전사(지하디스크)의 백과사전 같은 책으로 다소 어렵다 느껴질 수 있지만, 이슬람 전사를 설명한 국내 저자의 책 중에 가장 뛰어나다.
국내 저자 중에 유일하게 시리아 난민을 위한 인권동화이다. 시리아 난민에 대한 동화는 주로 외국에서 많이 출간되기에 필자가 눈여겨 본 책 중 하나이다. 『노경실 선생님의 지구촌 인권 동화』 중 제3권으로 전쟁으로 참혹한 생활을 하는 시리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시리아 난민 아이들은 요르단에서 난민 생활을 한다. 시리아 난민 아이들의 희망과 꿈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어른인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 책이기도 하다. 현실은 아이들의 희망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