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 청년 논객1983년생. 자유기고가. 종종 번역을 한다. 『탄탈로스의 신화』 『논객시대』를 썼고, 『아웃라이어』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대 미국 경제와 정치의 발전상을 기록하면 두 개의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 경제 그래프는 심했던 소득 격차가 어느 정도 줄었다가 다시 심하게 벌어짐을 보여준다. 정치 그래프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극화가 심해졌다가 초당적 제휴의 기미를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양극화를 초래한 모양새다. 이 두 그래프는 평행을 이룬다. 다시 말해 평등했던 경제적인 황금시대는 초당적 제휴가 이루어졌던 정치적인 황금시대와 거의 일치한다.”(20쪽)
원제가 ‘The Conscience of a Liberal’, 즉 ‘한 자유주의자의 양심’인 이 책은, 국내에서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출간된 후, 뒤이어 『폴 크루그먼 새로운 미래를 말하다』라고 재판이 나왔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이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바라보고 해법을 찾으려면 가장 먼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변화해가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폴 크루그먼의 이 명저를 꼭 읽어보도록 하자.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서도 정치와 경제는 서로 한 데 얽힌 채 출렁여갔다. 미국과는 달리 이른바 ‘압축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던 전후 대한민국은 10년을 주기로 경제 호황 혹은 버블을 겪었고, 그에 따라 아파트의 가격이 상승하였으며, 놀랍게도 정치적 격변 역시 비슷한 주기로 돌아왔다. 디자인의 소비자인 중산층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그 중산층의 산실인 아파트를 자신의 연구 주제로 삼게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박해천의 책 『아파트 게임』은 이렇게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버블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만 10년을 주기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세대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개별 세대의 정체성과 경험 구조를 규정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현대사의 정치적 격변을 내세우곤 하는데, 그 격변 역시 10년 주기로 발생했다. 1960년의 4·19 혁명, 1972년의 유신헌법 제정,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세대론의 주창자들은 이 사건들을 주요 지표로 활용해 그에 맞춰 4·19 세대, 유신 세대, 386 세대 같은 명칭의 개별 세대들을 호명한다.” (20쪽)
‘청년’과 ‘세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 사회는 짐짓 그 이면의 경제적 작동에 대해서는 눈을 돌려왔다. 박해천은 그 왕년의 '청년'들이 뜨거운 투쟁을 하고 난 후 어떤 식으로 중산층 대열에 편입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저널리즘적으로 파고들자니 자료가 부족하고, 소설로 쓰자니 너무도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이기에, 그는 '비평적 픽션'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게임』은 그렇게 4·19 세대, 유신 세대, 386 세대, X세대를 넘어 2000년대에 20대를 맞이한 ‘3포세대’, ‘5포세대’, 혹은 ‘n포세대’에 당도한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내 집 마련을 하는 등 이전 세대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인생의 사다리’를 밟지 못할 것임을 알고 포기해버린 세대. 왜 이런 결과가 벌어졌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해서’가 아니다. “이런 꿈이 많은 이에게 실현 가능했던 것은 일종의 복권처럼 운영되던 ‘내 집 마련’의 사다리 덕분”(270쪽)이었는데, “이 사다리는 정부의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전반에 걸친 부동산 시장의 폭등세로 인해 끝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270쪽)던 것이다. 이렇게 ‘청춘’은 ‘포기’했다. 이전 세대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인생의 단계’들을. 『아파트 게임』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현대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복습하게 해주는 책이다.
오늘날의 ‘청년 문제’ 가운데 실업만큼이나 도드라지는 것이 성비 불균형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시피, 흔히 ‘결혼적령기’라 부르는 28세에서 35세 사이의 남성과, 26세에서 33세 사이의 여성의 숫자를 비교해보면, 남자 6명당 여자는 5명밖에 없는 ‘남초사회’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초 현상이 대체 왜 벌어진 것인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여아 선별 낙태가 횡횡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의 기자인 마라 비슨달이 쓴 『남성 과잉 사회』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시아와 서구를 비교해보면 아시아에서의 낙태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와 서유럽에서 낙태 합법화는 보통 낙태 건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것은 보기만큼 역설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태법을 완화할 때는 피임도 함께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아울러 애당초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대두된다. 하지만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208쪽)
남초 사회가 되어버린 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마치 남자들이 ‘희생자’가 된 것처럼 애잔한 시선을 보내곤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비가 이토록 깨진 것은 그 자체가 여성차별의 결과물이다.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성비 불균형으로 장가를 못 가는 남자들’을 애처로운 듯이 말할 때, 태어나기 전부터 그 존재가 삭제될 수도 있었던 청년기의 여성들은 또 한 차례 배제당한다. 이것이, 이것부터가, 여성 차별이다.
사실 결혼과 출산이 반드시 연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프랑스의 경우 비혼여성의 출산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대폭 강화한 결과 출산율의 하락세를 막아냈고 현재 서유럽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미혼 여성을 그러한 방식으로,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출산하며 육아할 수도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젊은이들에게 결혼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을 뿐이다.
‘청년 문제’는 이렇듯 그 의제 설정부터 성차별에 대해 둔감했다. 그런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나 스스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2015년 무렵부터 여성주의적 관점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남성인 독자들은, 무슨 책을 읽어나가야 할까?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단 한 권을 추천한다면 역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이다. 가장 오래된 페미니즘 서적이면서, 남자가 쓴 체계적인 여성주의 저술로서 최초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자가 쓴 페미니즘 서적 중 아직까지 이 책을 능가하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여성들이 직접 쓴 책에 감정이입을 못 하는 남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나는 『여성의 종속』이라는 19세기의 책을 권한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 스스로가 말하고 있다시피, “여성 자신들이 해야 할 말을 다 들려주기 전까지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식 ─ 그들의 장차 모습이 아니라, 그저 지금까지 보여준, 그리고 현재 이 시점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 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피상적"(54쪽)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고 제시하는 바는, 비극적이게도, 2016년 현재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기존에 당연시되어온 차별 의식에서 벗어나,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진보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사실 이 주제에 대한 책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이것은 ‘지식’을 넘어서는 ‘실천’의 영역이며, '실천'의 영역 속에서 책은 종이 뭉치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평생을 급진적 운동가로 치열하게 살아온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사울 알린스키. 그리고 2016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청년 정치인으로 활약 중인 조성주라는 사람이 있다. 조성주는 알린스키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읽고, 2015년 4월 14일부터 4월 28일까지 정치발전소의 수강생들과 토론하여, 그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이 바로 그것이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혁명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미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수많은 급진적 학생 운동가들과 알린스키가 치열하게 논쟁한 후 집필된 책이다.”(21쪽) 한편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은 2008년 촛불시위의 열기가 가라앉은 후, 오히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회의주의와 정치 혐오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무렵에 작성된 강의록이다. 알린스키는 “정치적으로 정리된 언어로 상대를 존중하며 의사소통하고 그 안에서 다수를 끈질기게 설득해 나가야 한다”(23쪽)고 주장했다. 조성주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 ‘포기해버린’ 청년 세대는, 이렇게 한 조각씩 희망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